하나님은 종종 예배 인도자들에게 예상하지 못한 것을 하라고 부르신다. 때대로 하나님은 특별한 순간에 특별한 것을 준비하신다. 하나님이 하고 계실 때,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우리도 하면, 하나님은 힘있고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 예배에 갑자기 들어오실 것이다. 제 때에 정확하게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 모든 사역을 효과적으게 하는 열쇠이다.
몇년 전에, 마이크 필라비치와 나는 사역 여행으로 노르웨이에 초대를 받았다. 그때 마이크는 비행기 타기가 겁나서 비행기 대신 여객선을 타자고 주장했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단지 공황까지 40분, 그리고 비행시간 90분이면 되는 것을, 여객선 페리호가 있는 곳까지 차를 몰고 가는데 6시간, 이어서 바다로 가로질러 가는데 26시간이 들었다(내가 아직도 치를 떤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악몽까지 꾸자, 여객선 안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빙고 놀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지루한 여행을 했다. 거두절미하고(여하튼 길었단 말이다0 나는 너무 안 좋은 기분으로 노르웨이에 도착했다.
마침내 우리는 젊은이들의 모임 장소로 갔다. 이 모임은 힘든 모임들 중의 하나였고, 그곳에 모든 것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실패였고, 아무도 진실로 호응하지 않았으며, 나 자신이 침몰하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어떤 노래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노래는 그순간 내가 듣기 원했던 종류가 아니었다. 기적처럼 모든 사람들을 예배로 끌어들이는 새롭고 자연스러운 노래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은 전부 그 당시에 음악 숭위에 올라 았던 마이클 잭슨의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라는 노래였다. 나는 다음 예배 시간에 이 노래를 부르라고 말하는 작은 속삭임을 느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해!'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고, 심지어 내가 이런 생각까지 한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이 생각은 떠나지 않았고, 내가 곧 직면한 사실은, 실재로 일이 더 나아지면 나아졌지 더 이상 악화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판단들을 모두 물리치고, 앞장서서 그 노래의 코드를 생각하느라 애스면서 나는 이 노래의 후렴 부분을 불렀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내가 여기 당신과 있어요..."
끔찍한 순간이었다. 노래를 시작하고 몇 분만에 나는 '이 얼간아, 너 뭐하고 있니? 너는 예배를 인도하려고 해야지, 값싼 소리로 겉모양을 바꾸려 해서는 안돼!' 라고 생각했다. 나는 단지 팬팬한 줄 위를 걸어가는 느낌이라고 상상할 뿐이었다. 언젠가 당신도 걸어 본 적이 있었다면, 거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고,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래를 보지 않고 계속 가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고, 최선을 다하기 원했으며, 다음 여갯건 시간이 언제인지 궁금했다.
모임이 끝난 후에, 내가 머리를 숙여 기타를 챙기고 있었을 때, 한 무리의 십대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알고 보니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그들을 모임으로 들어오게 한 유일한 입구였다. 우리는 몇몇 다른 팝송을 함께 부른 후에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함께 한 짧은 시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교회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약간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감사해요, 주님. 결국은 이것으로 무엇인가 선한 일을 드러내셨군요.' 그들이 자리를 뜨자, 내 눈 한 구석에 울며 다가오고 있는 한 숙녀가 보였다. 내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멈추고 그녀가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했을 때, 나는 즉시 하나님이 줄곧 역사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는 오늘 밤 최악의 상황에서 이 모임에 나왔어요. 저는 여기에 오려고 6시간이나 여행을 했고, 오는 동안 내내 하나님게 부르짖었어요. '애 당신은 저를 홀로 남겨 두셨나요? 하나님, 당신은 저만 홀로 남겨 두셨고, 그래서 저는 절망했습니다. 저는 마지막 수단으로 이 모임에 가려고 합니다. 당신께서 제게 들려 주셔야 저는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내가 여기 당신과 함께 있어요" 라는 그 노래를 소리내어 부를 때, 이 숙녀에게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은 매우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절망적인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고 계셨다.
이것은 나에게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직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경배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날 여지를 남겨야 한다. 때때로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로 우리가 어리석다고 보는 것을 통해 힘있는 발걸음을 들여 놓으신다.
예배 인도자로서 어떤 흐름이나 형식을 따라 가는 것이 쉬울 수 있다. 당신이 선택한 곡들로 계획을 세우고 인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또 연애를 위한 공간도 남겨라. 어느 때든지 성령님이 당신을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도록 당신의 사고 방식에 그분과 속삭이는 공간을 두라. 카디널 수넨스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영은 뜻밖의 햇빛으로 인간의 수준에서 예측을 하도록 말씀할 수 있다."
우리가 다음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그런 신선함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역동적인 경배의 시간보다 더 흥미 있는 일이 없다. 성령님은 가장 놀랍도록 깊이 있는 보좌의 방에 우리를 데려 가실 것이고, 가끔은 우리가 전에는 결코 가본 적이 없는 길로 그 보좌의 방에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예배 인도자는 항상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가 그렇게 했다면, 모든 사람은 곧 짜증을 낼 것이고 계속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루이스는 예배를 드리면서 너무나 많은 새롭고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이 실재로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그 예배 자체에 초점을 맞추게 하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을 떠나가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사람들의 눈을 예수님 대신에 그 예배에 고정시켰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는 에배 인도자들에게 상기시킨다. "베드로의 임무는 '내 양을 먹이라' 였지, '내 쥐들로 시험하라' 였거나, 심지어 '재주 부리는 나의 개에게 새 기술을 가르치라'가 아니었다!"
핵심은 예언자적인 것(새로운 땅을 침범하고자 하는 열망)과 목회적인 것(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사로잡으려는 열망) 사이에 어쨌든 바른 균형을 잡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님께 이것을 행할 통찰력과 지혜를 달라고 구해야만 한다.
나는 최근에 누군가에게서 '예배 인도자들' 이라는 말 대신 '인도하는 예배자들'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들었다. 나의 즉각적인 반응은, 솔직히 '그래, 아주 똑똑하네. 교할한 말장난이나 하고 잇으니' 였다. 그러나 이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이 작은 말장난이 실재로 사물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매우 도움을 준다고 더욱 깨닫게 된다. 여기에는 성령님이 바로 궁극적인 예배 인도자라는 현실감이 있다. 그분은 우리의 경배 시간에 일어나는 의미 있는 모든 것들의 대리인이다. 빌립보서 3장 3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경배)한다" 고 말하며, 예수님은 성령님의 주요 역할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지적하신다. 그러면 사람인 '예배 인도자'는 더욱 '인도하는 예배자' 에 어울린다. 즉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고자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이 다라야 할 모범으로서 전심으로 자기 자신을 경배에 던져야 한다.
사물을 바라보는 이런 방식은 예배 인도자들, 또는 우리가 여기서 그들을 부르고 있는 인도하는 예배자들에게 어떤 큰 암시를 하고 있다. 첫째로 이 방식은 압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경배가 일어나도록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엄청난 노력이나 마약을 복용한다 해도 참다운 경배를 전달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성령으로 경배한다.
인도하는 예배자들을 위한 둘째 안시는 이 사실로 우리가 계속해서 의자하게 된다는 점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전적으로 연약하여 의지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실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 인도하는 이로가 관련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교훈이 된다. 우리는 어떻게 곡들을 연결하고, 어떻게 잘 연주해서 훌륭한 경배를 드릴 것인가 하는 실제적이고 외부적인 측면을 너무 많이 듣는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이런 많은 요소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핵심은 결코 하나님의 성령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다. 그분이 관여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 어떤 탁월한 음악적 재능이나 편곡 기술로도 결코 그 공간을 메울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경배 중에, 몇몇 멋진 음악가들과 함께 연주할 특권을 누렸다. 더구나 본교회에서도 우리는 능숙한 음악가들이 많아 복을 누렸다. 그런데 가끔 나는 거기에 너무 비중을 두고 의존하면서, 내가 훌륭한 악단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훌륭한 경배'를 드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햇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 내게 그분을 의지하고 항상 의지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셨다. 경배는 음악 집회이기 이전에 영적 집회이다.
사물들을 바라보는 이 방식이 주는 셋째 암시는 모든 경배가 무대로부터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에서 인도하는 경배자가 취해야 할 정말 유익한 모범이 될 수 있다. 어떤 예배 인도자들은 하나님이 어덯게 우리를 인도하기 원하시는지를 생각하는데 시간을 투자했고, 우리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어떤 실질적인 기술들을 뽑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인도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그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노래를 시작할 수 있다고 느끼며, 성령님이 인도한다고 느끼는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우리가 환경을 조성할 때 매우 강력해 질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앞에 선 사람들을 압력에서 벗어나게 한다. 나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았고,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회중 가운데 일어나기 시작했다.
때때로 우리는 성령님이 정말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덫에 걸린다. 교회의 어떤 쪽에서는 성령님을 무시하려고 하는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너무나 친해진 나머지 그분이 우리와 만나는 방식에 관해 농담까지 하게 된다. 우리는 니케아 신조의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성령님은) 경배를 받으시며 영화로우시다" 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 모든 진정한 경배의 핵심임을 깨달아야 한다. 예배자와 예배 인도자로서 똑같이 우리는 그분을 더욱 경외해야 하고, 구분을 더욱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령님의 대답한 속삼임에 따를 준비가 된 예배자들, 즉 진정한 '예배 인도자'를 찾고 계신다. 그들은 함께 모이면, 항상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첫사랑의 연애 감정을 계속해서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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