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에서 찬송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찬송의 선교적 의미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도 말씀했습니다만 우리가 찬송하는 목적은 오직 한가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어떤 사람은 찬송의 선교적 의미를 찾아보자는 말에 찬송을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찬송하는 이유와 목적은 오로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되 그 과정에서 발생
되는 몇 가지 현상들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그 첫째로, 우리는 찬송에 담긴 복음의 능력과 그로 인해 얻어지는 선교의 열매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의 의사와 상관 없이 수 많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물론 그 소리 가운데는 유익을
주는 어떤 음악이나 새로운 정보가 있을 수도 있고 단순 소음으로 괴롭힘을 주는 공해도 있을 것입니다.
찬송도 그 가운데 하나의 소리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모든 찬송이 소리로 표현됩니다.
아울러 소리로 표현된 찬송은 그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므튼 그 울림 반경 내에 있는 사람은 자기 의사와
상관 없이 들려오는 찬송의 소리를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찬송의 선교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오늘 직장에서 일을 하다 잠시 휴식을 하는 가운데 작은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몇 사람의 동료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다고 아울러 가정해 봅시다.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주고 받다가 찬송이 계속되자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해서 차츰 찬송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나다.
여러분 찬송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말씀 그 자체를 선율로 담았거나 아니면 복음적인 고백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찬송은 복음이거나 복음의 해설처럼 들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오늘 그들이 들은 소리는 결코 예사로운 소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들의 심령에서 역사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생활 속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가 그저 스쳐 지나가거나 잠시 기억되다 이내 사라지는 것에 비해 찬송에 담긴
복음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결코 그대로 소멸되지 않고 그 소리를 들은 수 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갈아 엎는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 자신들이 말씀을 통해 새롭게 된 것 같이 우리 주변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역시 그들의 의사와 전혀 상관
없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을 통해 복음을 듣고 이미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사역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특히 감사했던 것은 찬송을 듣고 에수님을 영접했다는
분들의 간증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군복무 시절 하루 일과가 끝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찬송 소리에 어느날 지기도 모르게 교회에 발을 들여 났었다는
어는 형제의 고백, 예수를 전혀 모르는데 누군가가 선물로 보내준 성가 테이프를 무심코 듣다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엇다는 어느 자매의 고백등 우리가 드리는 찬송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서울로 올라와서 매주 수요일, 금요일 학교 쉬는 날 1시간씩 전철역 입구에서 찬양을 합니다.
복음 전도의 목적이나 선교 헌금을 모금하려는 목적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한 신사분이 찬양하는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찬양을 다 드린 후 짐을 정리하는데 다가 오시더니 저에게 말을 걸어 오시더군요.
그분은 과거 열심으로 주님을 믿고 교회를 따르던 집사님이었는데 교회의 관계의 실족으로 주님을 버리고
세상에 몸을 맏기셨던 분이십니다.
제가 찬양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분의 귀에 찬양을 들리게 하셨고 주님과의 첫 사랑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는 역사하심이 있었습니다.
또 한번은 노원역 7호선과 4호선 교차 통로에서 찬양을 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곳에는 다리가 없이 앉아서 구걸하고 있던 분이 계셨는데요. 그날은 그분이 엉엉 울고 계시는 겁니다.
찬양을 하다 그분을 본 저는 깜짝 놀라서 찬양을 멈추고 어디 많이 아프시냐고 물었습니다.
제 찬양의 가사를 반복해서 듣다가 그 가사의 내용이 자신을 찌르고, 위로하고, 사랑이 그리워서 울고 있다고 합니다.
그분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평안을 빌어주고, 명함을 전해주며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요즘 지하철을 많이 이용합니다.
지하철 곳곳에 찬양하기 좋은 공간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새로 생긴 습관이 있는데요
지하철을 타고 하나님을 묵상하다가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어디서든 내려서 좋은 장소를 찾아 찬양을 합니다.
제가 요즘 키타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 이유가 그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찬양하다 보면 관심을 갇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제 찬양을 경청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그분들에게 제 명함을 드리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하시라고 합니다.
또 저희 카페를 소개하며 언제든 꼭 한번 놀러오시라고 하죠.
이렇게 우리가 드리는 찬양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찬송의 선교적 의미는 육신의 한계 즉, 상황을 초월하여 부르는 찬송은 듣는 이로
하여금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좋은 예를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선교 여정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오클레소프 장군이 이끄는 조지아주 이민단의
소속 목사로 1735년 10월 중순 시몬드호를 타고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갑자기 불어닥치 폭풍으로 인해 요한
웨슬리 자신 뿐 아니라 선원들을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찬송의 소리,
바로 함께 승선하고 있는 26명의 모라비아 교도들의 평안에 넘치는 찬송의 소리는 선교사라고 뽐냈던 요한 웨슬리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것 없으며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이론에 불과한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날의 체험을 '오늘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날중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날' 이라고 기록해 두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사건입니까?
배가 거의 침몰해 가는 상황에서 모라비아 교도들이 뱃전에 둘러앉아 찬송했던 것은 결코 웨슬리에게 감동을
주고자 함이 아이었습니다. 반석이 되신 주님께 영혼의 닻을 내라고 그의 영광을 찬송함이 그 순간 그들의 목적
이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동기는 그랬는데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날 보았던 그 놀라운 현상은
한줄기 빛이 되어 그의 가슴에 남았고 결국 그 빛은 2년 간의 조지아주 사역을 쓰라린 패배로 장식하고 본국에
돌아갔던 그를 올더스케이트에서의 성령 체험으로 이끈 한 줄기 서광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우리는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빌립보 감옥 하면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준 일로 무고하게 매을 맞고 같히게 된 바울과 실라를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바울과 실라의 이야기입니다.
자, 그대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2000여 년 전이니까 그 감옥 안의 모습은 지금 교도소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6장 23절에 보니까 많이 때린 후 가뒀다고 했습니다.
발에는 착고를 채우기까지 했습니다. 몸도 많이 상했을 것이고 굶주리기까지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런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가 밤중쯤 되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했습니다.
죄수들이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십중팔구는 비웃었을 것입니다.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불의한 일의 대가로 자신들은 감옥에 들어왔지만 그래도 원망과 저주 때문에 잠못이루고 있는데
아무 죄도 없이 매맞고 같히게 된 그들이야 어서 풀어 달라고 아우성치고 울부짖는 것이 당연하겠거늘
젼혀 그런 항변 없이 오히려 주께 감사하며 찬송하고 있으니 어찌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거기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미쳤다고만
생각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상황에 굴하지 않고 찬송하는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그들 중 일부에게는 심한 영적 문제로
도전되엇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똑같은 상황에서 자신들의 입에서는 원망과 저주가,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는 찬송이 나오는데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찬송하는 그들을 모두 미친 사람으로만 생각하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저의 희망사항일 뿐일지라도 저는 그 가운데 몇 사람의 입에서는 이런 고백이 나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하, 예수쟁이들은 역시 다르구나! 보아하니 억지로 하는 것 같지는 않고 평소에 떠들어 대기를 기쁨, 소망, 감사, 평안
그런 것들이 모두 위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런가 보구나..............."
그렇다면 그날의 사건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과 실라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자신들이 수없이 외첬던 복음을 확증해 보이은 것이요, 듣는 이들에게는
단편적으로나마 들었던 복음의 능력을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제가 군대 생활을 할때입니다. 저는 90년 3월 27일 입대해서 석달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27사단 '이기자'부대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그곳은 훈련사단으로 행군으로 힘들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더구나 저는 81mm 중화기 중대에
속해서 행군할때마다 무거운 포를 어깨에 매고 다녀야 했습니다.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달이 지나서 문뜩 행군할때마다 버릇이 하나 생긴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들릴듯 말듯 찬양을 하면서 행군을 하면 도 별로 안드는 것 같고 행군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래서 행군할때 마다 흥얼거렸습니다.
그러다 몇개월이 지난 어느날... 늘 옆에 같이 걷던 고참이 넌지시 제가 묻더군요.
"김 이병. 너는 행군이 힘들지도 않나? 무슨 노래를 그리 흥얼거리면서 행군을 하나? 힘이 남아도나 보지?"
"네, 힘이 남아서 부르는게 아니고 이 노래를 부르면 힘이 납니다. 그래서 늘 부릅니다!"
"이 사람아 그럼 혼자 부르지 말고 같이 부르자고. 좀 배우게 크게 불러봐!!"
"네! 알았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이 외치세~"
이렇게 해서 우리 소대는 행군할때마다 찬양을 부르며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소대의 전통이 되었지요.
처음에는 이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도 모른체 신나게 따라 부르더군요.
주님을 모르는 자들을 통해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것도 20명의 청년들의 행군나팔로~~
전혀 제가 의도했던 바가 아닙니다. 전 단지 찬양을 부르며 행군하면 즐거웠을 뿐입니다.
아마 그때부터 그들의 마음 속에 변화가 일어났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상병쯤 되었을 때 전 군종병이 되었고 마침내 우리 소대 전원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소대원이 모두 교회에 나오는 날. 예배시간 특송 때 부른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이 외치세~ 주의 이름높여~ 다 찬양하라~"
저는 단연코 이 복음의 사작이 제가 이등병때 행군하면서 불렀던 그 찬양에서 비롯되엇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땅 위에 살면서 빌립보 감옥 같은 억울한 상황, 군대 행군과도 같은 힘든 상황에 가로 놓일 때가
자주 있습니다.
진학, 취직, 사업, 가정, 건강 등의 문제로 인해서,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그동안 우리가 외쳐온
복음의 능력이 과연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탱해 나가는지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처럼 상황에 지배 당하지 않고 예전처럼 찬송하면 자신의 믿음을 많은 사람들 앞에 확증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엔 그가 외친 모든 것이 허상임을 본인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찬송의 선교적 의미는 크고 아름다운 복음의 나팔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도구인 반면에
그동안 수없이 외쳐왔던 복음의 능력을 확증해 보이는 실험이기도 합니다.
'†찬양 사역† > 찬양팀 영성 훈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구아수 선언문(99년) (0) | 2008.11.04 |
---|---|
탈리반으로부터 석방된 선교사 간증 (0) | 2008.10.31 |
찬송은 소중한 예물입니다 (0) | 2008.10.28 |
[은혜 찬양]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0) | 2008.10.28 |
노래 잘하는 비법 플러스! 바이브레이션! (0) | 2008.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