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천한 예배자 1

예림의집 2008. 10. 25. 17:48

천한 예배자(the undinginfied Worshipper)

 

경배곡들을 자곡하는데 주목할 점은 당신이 간청하여 실재로 용기를 얻게 된 것 말고도 성경을 인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나는 <춤추며 찬양해>(Undigninifies)라는 노래를 작곡했다. 내가 그 곡을 작곡했다고 말할 때, 내가 정말 한 것은 수 천년 전에 대윗 왕이 작성한 구절을 훔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마침내 주님의 법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다윗은 매우 흥분해서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었다. 다윗의 아내 미갈은 이것 때문에 다윗을 경멸했고, 다윗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구절을 적었다.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삼하 6:21-22).

나는 뒤윗이 송축한 상황을 보고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 사건에서 단지 군중들 가운데 한 명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었다. 보호자의 공적인 상징으로 위대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힘과 권위와 부가 맡겨졌다. 그러나 그는 앞장서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공적인 자신의 입장을 '잃어버리고', 그렇게 찬양의 불로 어떤 금지 사항들이나 자부심에 상관없이 그의 경배는 활활 타올랐다. 참다운 경배는 항상 그 자체를 잊어버린다.

찬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중 하나인 '할랄'(Hallal)은 주님 앞에서 '시끄러운 바보처럼' 되거나 '미치는' 것을 의마한다(여기에서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할렐루야'<Hallelujah>가 나왔다). 경쟁이 '심해진다는 이유' 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좀 자제해야 하지만, 그러나 너무 자주 이 영역에서 뒤쳐져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는 우리의 예배에서 우리가 좀 더 거룩한 손해를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나는 솔직히 이런 나 자신에게 심한 가책을 느낀다. 단지 내 인격 탓으로 돌릴 수도 있지만, 깊이 내려가면 내가 알기에 이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다. 가끔은 경배에 더 대단한 자유를 희미하게 보게 된다. 내가 열다섯 살이었던 어느 날 밤, 우리는 평소대로 금요일 밤 청년 모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배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 하나님은 정말 새로운 방법으로 나의 마음을 붙들고 계셨고, 나는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폭발하는 것 같았다. 나는 기를 쓰고 어떻게 해서든 이 예배를 끝냈지만, 노래만으로는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정말 결코 춤을 추는 정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고, 더구나 그렇게 행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던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예배가 계속되는 동안에 점점 열광적으로 되자, 나는 신발을 신는 것도 잊고서 교회 밖으로 서둘러 나왔고, 10분 동안 주차장 주위를 달렸다. 내 모습은 틀림 없이 바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에 나는 조금도 내 모습을 신경 쓸 수 없었다. 나는 나를 보았던 사람들이 이것을 모두 얼마나 이상하게 쳐다보든지 상관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오직 그분 앞에만 있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한 것처럼 "거리낌없는 행동의 결과는 결코 우리의 예측대로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그렇게 그분과 교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기쁨 속에 자신을 드리는 일을 이상하게 여긴다. 나는 더욱 이런 시간들을 열망한다. 나는 거리낌없는 경배가 극단적인 방식으로 흘러 넘쳐서 내 마음이 예수님으로 그렇게 타 버리는 계절이 있기를 기대한다.

 

때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열정적이기를 원하시는지 기억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탕자 이야기는 하나님의 열정적인 마음을 그린 최고의 그림이 되어야 한다. 고집불통의 아들을 집으로 반갑게 맞는 아버지는 그 자체로도 대단하지만, 그 아버지가 아들을 환영하는 방식은 훨씬 더 감동적이다. 이 부유하고 고귀한 아버지는 모든 지위를 잊고서,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고 자기의 아들을 향해 달려간다. 이것은 그의 위치에 걸맞는 행동이 아니었다. 달려가야 할 어떤 일이 있으면, 그는 항상 종을 보내 그 일을 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아들에게로 달려갈 때, 우리는 거리낌없는 엄청난 사랑의 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이와 똑같이 거리낌없이 무척이나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반응은 열정적이고 천한 예배이다. 윌리암 베클레이는 언젠가 이렇게 적었다.

  "사랑은 대체로 정확한 계산을 하려고 멈추지 않는다. 사랑은 상대적으로 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적은가를 산출하고자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과 같은 엄청난 종류의 사랑은 가진 것을 모두 주며, 결코 비용을 계산하지 않는다. 계산은 어느 쪽으로도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최근 맨체스터에서 대형 소울 서바이버 사역을 마쳣다. 그곳에서 우리는 전심을 다한 예배와 헌신을 드린 감동적인 경우들을 많이 보았다. 재정적으로 상당한 비용이 들었고, 헌금은 그 비용의 일부를 메울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젊은 부인이 우리에게 4,521,02 파운드의 이상하게도 정확한 금액이 적힌 수표를 건네주었다. 이 일로 깊이 감동했을 뿐 아니라, 또 우리는 묘한 충격을 받았다. 이 얼마나 신기한 금액인가! 우리는 후에 그녀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로 자신의 건물 조합 계정에서 남은 잔액을 전부 인출한 사실을 알았다.

그 젊은 부인의 경우 천한 예배자들의 마음을 잘 설명한다. 완전히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그들은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그분게 자신을 드린다. 그녀는 그 비용을 계산하기 위해 머뭇거리거나 자기 행도으이 찬반 양론을 숙고하느라 며칠을 보내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천해진 순간 '어리석다' 고 말하기도 하겠지만, 그녀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쁘게 드렸다. 하나님은 터무니 없이 기꺼이 드리는 예배자를 사랑하신다.

 

엄청난 예배자의 또 다른 예는 찰스 웨슬리였다. 50년이라는 시간에 하나님이 사랑한 이 천한 영인은 6,500 여 곡의 찬양을 작곡했다. 그의 초기 찬양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첫 기념으로 자곡했는데, <만 입이 내게 있으면>(O For a Thousnad Tongues)이었다. 내가 처음 이 찬송을 들었을 때,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만 사람이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은 실제로 전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다. 결국에는, 우리가 그것보다는 더 큰 만남 속에 모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웨슬리가 정말 상상했던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만 입을 가진 자신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말하고 있엇다. "나는 만 입을 가지기를 원한다. 그러면 만 입의 각각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을 테니까." 어떻게 보면 완전히 미친 것 같지만, 최고로 아름다운 경배의 모습이다.

나는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그 얼리석은 경향을 좀더 갖게 되기를 확신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제물까지 극도로 거의 한계선을 넘는 것이다. 내 삶의 대부분을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왔고, 나이가 들수록 내가 가장 겁내는 일들 중 하나는 그 한계선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삶을 계속해서 굴러가고, 우리는 더 많은 압박과 책임과 혼란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핵심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께 거리낌없는 활기찬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주차장 주위를 달리고 있는가? 아니면, 먼저 신발을 신으려고 머뭇거리다가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아예 그 일을 하지 않기로 작정해 버리는가?

 

예루살렘의 그날로 돌아가 보면, 춤추는 다윗 왕은 완전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으로 타올랐다. 그는 누가 보고 있거나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거나 전혀 신경 스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있는 모근 것으로 경배하며 흠모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누가복음 6장 45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마찬기지로 우리 마음에 쌓아 놓은 것으로 우리도 노래하고 섬기며 살아간다. 다윗 왕이 열광적으로 춤을 춘 이유는 모두 그것 때문이었다. 이것은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아드레날린이나 마약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마음에 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풍성하게 흘러 넘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경배에 가치 있는 교훈을 준다. 미칠 정도로 힘을 넘칠 때, 우리는 이것이 단지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풍성한 것이라고 늘 확신해야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배 인도자들은 이것을 지의해야 한다. 한 때 풍성한 마음에서 나왔던 순수한 행동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대에 섰을 때 너무 쉽게 하나의 공연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하늘 보좌 앞에서 사람들을 인도할 때 슬그머니 기어들어오는 공연의 요소들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찬양할 만큼 충분히 아름답고 존귀하신 영관스러운 분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감동시키려고 애쓰거나 몇몇 찬양으로 '마약'을 주려고 하는 예배 인도자는 정말 필요 없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죄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통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마음으로 알게 된다. 예배 인도자들은 가능한 한 민감하게 주님께 집중해야지 절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따르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하게 인도하지만, 아주 강하게 자기 자신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 자들을 나는 조은 예배 인도자들이라고 자주 정의한다. 당신이 이점을 고려한다면, 모든 관심을 끌고 있는 예배 인도자들을 실재로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좋은 예배 인도자가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자기들의 목표를 이루지 않는다. 이런 위치에 대해 말하는 옛날 찬송이 있다. "우리의 음악으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실 때, 숭배는 자만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곳에는 자만할 여지가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거룩한 곳으로 아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깊이 내려가 아직도 사람들의 관심 집중을 받기 원하는 우리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분을 커져야 하고, 우리는 작아져야 한다. 주님은 더욱 위대해져야 하고, 우리는 더욱 하찮아져야 한다.

오, 하나님, 예배자나 예배 인도자나 마찬가지로 당신과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우리 자신의 지위나 명성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소서. 그곳에서 우리가 경배하며 당신을 그렇게 만나고, 당신의 경이로움과 사랑과 찬양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