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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반목회 원리

예림의집 2008. 10. 24. 07:07

예수님께서 스스로 “나는 선생이다”고 29번에 결쳐 말씀하셨고 제자들도 복음서 전체에서 계속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혹자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사역보다 가르치는 교사의 사역에 더욱 중점을 두고 공생애를 사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유력하신 선생으로 인정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프라이스(J.M.Price)는 예수님의 교사로서의 적합성을 여섯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진리의 현현, 섬기고자 하는 욕구, 가르침에 대한 신념, 성경에 대한 풍부한 지식, 인간성의 이해, 기술의 통달. 이것을 달리 표현해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현현이시므로 모범이 되는 인격적 가치를 지니셨으며, 성경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교수 방법의 통달을 통해서 생활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에 효과적인 해답을 제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성 이해는 자신의 무릎 아래 앉아 있는 학생이해의 초석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가르치고자 하는 신념과 섬기고자 하는 욕구는 뚜렷한 교육의 주제를 설정하는 바탕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주제이해) 누구에게 가르칠 것인가?(학생이해)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교수방법이해)를 통달하신 권위 있는 교사였습니다.

그리고 상기한3가지 이해를 통해서 교사의 구비조건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삶과 인격 속에서 보여 주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교사의 모본이라는 것이다.

리더십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최상의 결과를 얻도록 적재적소 배치하고 지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교육을 통해서 잘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리더십은 모성적인 리더십과 부성적인 리더십을 포함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장에서 바울은 교사로서의 자신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영적 유모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유모’라는 표현은 뒤이어 나오는 ‘사모하여’,‘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우리의 사랑하는 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유모란 의미는 그저 젖만 내어 먹이는 ‘차용적 의미’가 아니라, 목숨을 나누는 사랑의 교감관계인 것입니다.

교사가 자신의 생명을 준다는 의미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시간과 물질, 정력을 아낌없이 내어놓고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24시간 자녀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돌보는 심정과 달려오는 열차에서 아기를 살리려는 살신성인의 본능에 가까운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끼니마다 만나야 할 유모와 같아야 합니다.

이전에 어떤 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봉사하면서 한 청년이 눈에 띄어서 교사로 추천하였고 개인적으로 제자훈련을 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집에서 두 시간씩 경건의 훈련을 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없이 직장생활에 매여 있는지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이 교사로서의 직책에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중⋅고등부를 지도하면서 여러 교회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암송을 훈련하였지만 번번히 세 달이 못 되어서 실패하였는데 이 선생님은 중등부 2학년 학생들에게 적용하여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까 교사의 학생에 대한 태도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반별친목회‘를 이용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교사들에게 학생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친목회를 하도록 재정을 보조해 주면 어떤 교사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사줍니다. 물론 아이들이 짜장면을 좋아하지만 그 시간에 친교는 안 됩니다. 또 어떤 교사는 수퍼에서 과자를 몽땅 사서 잔디밭에서 학생들과 잡담을 하면서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밀폐된 공간이 아닌 이상 진지한 교제와 대화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교사는 자기집으로 학생들을 초대하여 탕수육을 대접하였습니다. 교사의 집에 초대를 받은 아이들은 우선 어른의 초대여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교사의 방에서 자기들 이름이 적힌 기도목록을 발견하고 기도하라는 교사의 지도가 거짓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교사의 앨범을 보면서 교사의 백일사진에서 고추를 발견한 학생들은 웬지 교사의 은밀한 부분도 아는 친분관계인듯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집에서 먹는 탕수육은 부모가 영업집에서 사주는 것과는 다를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식사하기 전이나 식사 후에 함께 찬양도 하고 대화도 나눌 수 있어서 진지한 결론을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교사는 이렇게 자신의 것을 줄 수 있는 유모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모로서의 교사를 강조하며 동시에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1절에서 아비의 심정을 가진 교사이어야 할 것을 말하고 하고 있습니다. 아비심정을 가진 교사로서 바울이 행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권면하고, 위로하고,경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부성적 직무입니다. ⌜권면⌟이란 자녀나 학생이 무지할 때 곁으로 불러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로⌟는 곁으로 다가가서 부드러운 말로 격려하는 것이며 ⌜경계⌟란 자녀가 그릇될 때 바른 길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기능에 대해 디모데후서 3장16절은 교훈과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함을 지적하는데 우리교회에는 첫째만 있고 나머지 세 가지 기능은 없는 듯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역할은 이러한 책망과 바르게 함을 요구합니다. ’안돼‘를 말하고 ’두드려서 곧게 펴는‘일이 교회에서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교사는 먼저 흠이 없고 학생을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어떤 한 청년이 교회에 갔습니다. 교장 선생님 목사님에게 부탁을 합니다. “저에게 반을 하나 맡겨 주세요. 교사로 봉사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위아래를 봐 보니까 마음에 좀 안 드셨는지 아무튼 거절했습니다. 좀 준비가 덜 되었으니까 나중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강권했습니다.

“저에게 반을 주세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요? 교장 선생님인 목사님이 꾀를 냈습니다. “그럼 내가 교사로 임명을 하겠다. 하지만 당신한테 반을 주기는 주지만 아이들이 없는 반을 주겠다. 그러니까 당신이 아이들을 데려다가 채워 놓고 가르쳐라” 얼마나 고맙겠어요. “좋습니다. 목사님”

그러고 나갔습니다. 길거리에 나갔더니 꼬마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총각이 가서 불렀죠. “얘들아! 우리 교회에 가자” 그러니까 아이들이 다시 고개를 돌리는 거죠. 다시 구슬치기합니다. 교회에 가자는데 설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죠? “애들아 나도 시켜 줄래?” 그러니까 시켜주는 거예요. 같이 구슬치기를 합니다. 재미있게 놀면서 친해졌어요. 이 청년이 다른 마을로 가서 또 구슬치기를 합니다. 아이들이 청년을 졸졸 따라다니죠. 그렇죠? 애들은 어른 따라다니는 일이 재미있어요. 먹을 것도 사주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하고. 아무튼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애들하고 친해지면서 왔다갔다하다가 교회로 데려왔어요.

그 해에 열네 명을 데리고 가르쳤다고 얘기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가르쳤던 학생들 가운데에 제 기억으로는 11명이 전임 사역자가 되었다라고 번역을 했는데 제 기억으로는 11명이 목사가 됐다 그런 얘기 같아요. 얼마나 선생님이 헌신되었으면 아이들에게 비전을 심어 주고 헌신의 삶을 살게 했을까 하는걸 보게 되죠. 참 재미있는 거 같아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을 키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을 키우면 어느 정도 할까요? 저는 목표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한 어린 아이가 두세 살 됐는데 천재예요. 부모가 글을 읽어 주면 그걸 그냥 깨달아 압니다. 천재죠.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얘기가 좀 달라집니다. 문장을 주는데 그 문장을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얘는 바보인가? 그러면서 그 아이에 대해서 실망을 갖게 되고 주변 사람들이 실망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그걸 느끼죠? 사람 만나기를 싫어합니다. 두려워하죠. 그러니까 말을 더듬게 되었어요. 결국 이 아이는 지진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도 부모님도 실망을 하고 포기를 한 이 아이인데 선생님 한 분이 새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이 여선생님은 보더니 이 아이의 문제점을 발견한 거예요. 이 아이는 전체를 보는 능력은 뛰어난데 하나씩 떼어놓고 보는 것은 잘 못 봅니다. 그래서 그걸 볼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부모를 만나서 얘기합니다. 얘는 사실은 지진아가 아니고 이런 장애가 있습니다. 제가 한번 고쳐 보겠습니다. 그리고 노력을 했습니다.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말을 더듬으니까 이것도 문제가 되죠. 그래서 이 아이한테 자신감을 주면서 아주 쉬운 일을 시켜서 성취감을 갖게 하고 또 격려하고 격려합니다. 한번은 구슬을 다섯 개를 줬다고 그래요. 너 이걸 입안에 넣고 말을 해 봐라. 그래서 몇 달 동안 훈련을 했더니 어눌한 말이 교정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청년은 자라나서 정상적인 자기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 후 선생님은 다른 곳으로 전근 가셨죠. 그래도 고마운 마음이 있으니까 가끔 연락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그 선생님이 쓰러지셨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그리고 어느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이 청년은 마음이 어땠을까요? 내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 때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지 않았을 때 나도 나에게 포기했을 때 나를 다시 세워 주신 그 선생님, 이제는 그 선생님에게 내가 필요한 때가 아니냐 그래서 만사를 제쳐놓고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갔어요. 갔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병원에 들어가려고 그랬더니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자기와 같은 뜻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 700명이나 있었답니다. 어떻게 700명에게 그런 도전을 주죠? 그게 저의 목표입니다. 꼽아야 되는데 몇 명이나 꼽을지 모르겠어요.

자신을 양육해진 선생님과 함께 비전을 나누고 일생을 서로 의지하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귀한 일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700명이 될 때까지 노력을 할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내 전생을 바쳐서 학생에게 도전을 주었을 때 그 학생이 주님 앞에서 훈련된 좋은 사람이 되어지고 그리고 그 학생이 주님 앞에 귀한 사람으로 쓰여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이죠? 그 아이에게 복음을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 아이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교사, 그 사람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유모와 아비 같은 교사(살전 2:7-8, 11)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17년간 저와 함께 청소년교육선교회 교사대학 프로그램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해마다 100여곳의 교회와 단체들이 저를 불러서 이 땅의 교사들을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필요하시면 인테넷 방송 C3TV.Com의 <손종국 목사의 교사대학>의 64개 동영상 강의를 통해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2006년 2월

청소년교육선교회 대표 손 종 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