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긍휼과 보호의 대상으로서의 이주 노동자
3.1.1. 원어적 고찰32)
오늘날의 이주 노동자와 가장 가까운 성경의 표현은 ‘나그네’이다. 나그네는 히브리어로 רג(게르) 인데, 이는 자기 혈족과 종족을 떠나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의 보호에 의존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רג는 나그네 외에도, 이방인(foreigner), 외국인(alien), 객(stranger), 체류자(sojourner) 등으로 번역되기도 했는데 실제적인 의미상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아무튼 이들은 그 나라에서 혈연 관계로 자기 몫의 땅도, 법적 권리도 없는 사람이다. 사회적 약자로 억압과 압박의 대상이던 사람들이었다.
성경에서는 창세기 15:13에 하나님께서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라고 말씀하신 곳에서 처음으로 이 개념이 나타난다. 이 말은 또, 아브라함이 헤브론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헷 족속에게 자기 아내 사라의 무덤을 위해 땅을 팔 것을 청할 때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나그네라고 한 말이기도 하다.(창23:4) 야곱의 온 식구들이 애굽으로 이주함으로 이스라엘은 רג의 삶을 살게 되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왕에 의해 오랜 압제를 경험한다. 그리고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도망하여 이드로의 사위가 되었는데, 그가 아내 십보라를 통해 첫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게르솜’ 즉,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רג 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2. 나그네를 사랑할 근거로서 이스라엘의 애굽 생활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그네였던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 백성 중에 거하고 있는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고 보호할 것을 명령하셨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출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 (출 23:9)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19:33, 34)
3.1.3. 나그네를 사랑할 근거로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는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그네를 사랑하고 보호해야 할 근거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친히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신 10:18)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 146:9)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말 3:5)
3.1.4. 나그네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은 당시 사회의 최 약자로서 항상 가난과 억압에 노출되어 있는 외국인 나그네의 생존권을 보호하시기 위해 세세한 관심을 보이고 계신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궁핍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방인들을 항상 도와주라고 명하셨다. 심지어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에 대한 수입중 일부를 이들을 위해 줄 것을 명령하고 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4:28, 29)
또한 하나님은 이들이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추수할 때에 땅에 떨어진 것은 거두지 말고 남겨둘 것을 명령하셨다. 예수님의 조상이 된 보아스의 아내 미디안 사람 룻도 외국인 이주 노동자로서 이삭 줍기를 통해 연명해 갈 수 있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19:9-10)
3.1.5. 동일하게 법을 적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이들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법률의 보호를 받기 어려웠다. 이는 오늘날에도 비슷한데,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형벌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히 할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라“ (레 24:22)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레 24:16)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나그네된 자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특별히 보호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즉 사회적인 약자와 소외계층을 우선적 긍휼의 대상으로 여기시고,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그들을 우선적인 긍휼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사랑과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회적 약자를 영접하고 돌보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보는 것과 같은 일임을 분명히 하셨다.
오늘날 한국 땅에 있는 사회적 약자이며, 본국을 떠나있는 나그네는 바로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많은 교회는 이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오랫동안 단일 민족, 단일 문화권에서만 생활해 오고 외세에 폐쇄적인 태도를 굳게 견지해 온 우리 나라 사람들과, 그 토양 위에서 자라난 한국 교회가 이주 노동자들을 반갑게 맞아들이기는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고, 또 명령하신 명령을 좇아 이주 노동자들을 사회의 약자로서 우선적으로 섬기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것이다.
3.2. 복음 증거 대상으로서의 이주 노동자
이주 노동자들을 마땅히 우선적으로 섬기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 책임이 있지만 그들은 단지 우리의 긍휼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마땅한 우리의 복음 증거의 대상이다. 여기서는 성경이 외국인 이주 노동자 선교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신구약 전반에 걸쳐 간략히 살펴보겠다.
3.2.1. 구약에서의 이주노동자 선교
외국인에 대한 선교는 성경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로 창 12:1-3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직접적인 말씀가운데 잘 나타난다. 여기서 모든 족속은 70개의 나라들이 기록된 창세기 10장의 세계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33) 사실 아브라함의 삶 자체가 이주 노동자로서의 삶이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선교적 사명을 주셨고, 이방인들에게 복의 통로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셨다.
두 번째로, 민수기에서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이방민족에도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발견된다. 그것은 도피성 제도를 통해 알수 있다.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민 35:15)
도피성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 도피성이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타국인과 나그네들에게도 열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주노동자들도 피할 곳이 있으며 구원을 얻을 길이 있는 것이다.34)
세 번째로, 외국인 이주 노동자에 대한 직접적 복음 전파의 명령이 구약에도 등장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우거하는 타국인들도 듣고 배우고 행하게 하라는 명령이다. 즉,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에 함께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포함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신 31:12,13)
네 번째로,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 보면 외국에서 온 이방인 역시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응답해 달라고 함으로써 선교적 의미가 다분히 담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저희가 주의 광대한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왕상 8:41-43)
솔로몬이 이러한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진영에 거하는 외국인에 대해서 관용하며 그들을 선대하고 가르치고 배우게 하여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이며 이 일은 솔로몬 개인의 일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일임을 말하는 것이다.35) 예수께서도 인용하셨던 말씀처럼 성전은 만민(萬民, all nations)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만민이 나아와 주님을 경배하며 주의 영광을 찬미하는 선교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다섯 번째로, 시편에서도 이방인들에게 여호와를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노래하고 있다. 시편에서 역시 여호와께서는 만백성들 앞에서 그분의 이름이 구속주와 의의 통치자로 높이 들려지기 원하셨다.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이스라엘 안팎에 거하는 모든 외국인들까지도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고 경배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여섯 번째로,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여호와 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 (사 14:1)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사 56:6,7)
일곱 번째로, 미가서 4장은 많은 민족들이 여호와의 산에 몰려들 것임을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의 선교가 주로 그러하듯이 와서 보라는 형태의 구심적 선교 형태가 드러나고 있다. 이주 노동자가 복음이 있는 곳으로 와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구약에서 나타난 이주 노동자 선교의 성경적 기초를 살펴보았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종교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민족과 나라들을 위한 종교로서 모든 민족과 열방에 전파되어야 할 종교이다. 특히 구약의 선교가 주로 구심적인 선교의 측면이 강하였다는 점에서 이주 노동자 선교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36)
3.2.2. 신약에서의 이주노동자 선교
신약은 구약보다 더 빈번하게 이방인에 대한 선교가 다루어지고 있다. 먼저 누가복음 7:1-10에 나타나는 백부장과 그의 종에 관한 사건이다. 백부장은 종을 보내 예수님께 병고쳐주실 것을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방인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셨다. 즉,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인이나 복음 안에서는 차별이 없음을 잘 드러내 준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만이 선민이라는 사상이 팽배해 있던 곳에서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이방인의 믿음을 부각시키신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마태복음 5:21에 나타난 예수님과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수로보니게 여인 하나가 예수께 나아와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예수는 그 대답을 차갑게 거절하셨다. 그리고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여호와의 구원의 계획 속에 있다는 유대인의 보편적인 생각을 반영한 것이었다.37) 그러나 이 여인이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잡으려는 믿음을 보이자 예수는 그의 구하는 것을 들어주셨다. 역시, 이방인도 주님이 사랑하시며 구원의 대상이 됨을 반증해 주고 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도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라고 하심으로 모든 족속이 복음을 들어야 마땅한 대상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 모든 족속은 지역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종족의 개념으로 이주 노동자로 와 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임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위임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이주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사도행전은 이주 노동자 선교의 중요성을 가장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땅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고 말씀하신 후 얼마후 오순절 사건에서 성령세례를 받고 베드로는 능력있는 설교를 하였다. 이때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되어 나중에 그들의 본향으로 가서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타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부르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행 2:9-10)
이주 노동자로 와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복음을 듣고난 후 성령 충만한 새 사람이 되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동족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
빌립은 또 예루살렘을 방문한 에디오피아 사람 내시에게 성령의 이끌림을 따라 복음을 전하여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은 에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중간지점, 즉 유대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즉, 본국에서 이방인 선교를 하게된 것이다.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이방 선교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요한 한 측면으로 자국 내에 머물고 있는 이방인 나그네에 대하여 주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하며, 그들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3.3. 선교 메카니즘을 통해서 본 이주 노동자 선교
이제까지의 한국 교회가 취한 선교의 방식은 주로 타 문화권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방식이었다. 한국인 중에서 선교에 헌신한 사람을 훈련시켜 해외로 파송하고 교회는 그 선교사를 후원회 주는 정도였다.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들이 있긴 했지만 주로 서구권에서 온 사람들이었기에 우리가 그들에게 긍휼을 베푼다거나 선교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였다. 외국인은 언제나 부유하고, 강하고, 뛰어난 사람들인 것으로 여겨져 왔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풍토에서 국내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는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난 것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였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입국하였고, 또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로 헌신한 수많은 다국적 선교 자원들도 입국해서 한국인과 연합으로 선교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계기로 구심적 선교 방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것이 이후 90년대부터 입국하기 시작한 외국인 이주 노동자에게까지 적용되었다. 국내에서 하는 이러한 사역도 선교라는 인식이 점차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성클러(Bengt Sunkler)는 구약성경에서 주요한 선교 전략은 이스라엘이 빛을 비추어서 이방을 이스라엘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이지만, 신약성경에 와서는 외부를 향해 나아가는 외향적인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고, 화란의 신학자 요하네스 블라우(Johannes Blauw)는 위의 사상을 이어서 구약의 힘을 구심력(Centripetal), 신약의 힘을 원심력(Centrifugal)적 선교라고 불렀다.38) 그러나 랄프 윈터(Ralph Winter)는 위의 두 가지 선교의 메카니즘이 구약과 신약에 골고루 드러날 뿐만 아니라 교회사를 통해서 본 모든 시대에 항상 작용해 왔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선교 메카니즘을 통해서 볼 때 이주노동자 사역은 구심적 선교라 할 수 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실 때의 ‘땅끝’은 흔히 이해되어지는 것처럼 장소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본다. 그렇게 본다면 이 땅에 와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바로 복음을 들어야 할 ‘땅 끝’이 된다. 비록 몽골인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땅에 자발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구심적인 선교라 볼 수 있지만, 그것이 한국 교회가 이들을 수동적으로 대해도 좋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도리어 더 적극적으로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가서’ 몽골인 이주 노동자들을 제자 삼아, 세례를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들어 재한 몽골인 이주 노동자 선교를 ‘구심적 구조 안에서의 원심적 선교’라고 말하기도 한다.39)
다음은 랄프윈터(Ralph Winter)가 제시한 신구약과 교회사에 나타난 선교의 메카니즘을 요약한 것이다.40)
메카니즘 |
구약 |
신약 |
초대교회에서 1800년까지 |
현대 선교 시대 |
자발적으로 감 원심적 (팽창적)
|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감 -소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부근의 다른 나라들에 전파함 -바리새인들이 바다와 육지를 건너감 |
-사마리아에서의 예수님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감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여행들 -바벨론,로마,구브로 등에 거주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증거 |
-성 패트릭이 아이랜드로 감 -켈트족 유랑민이 영국과 유럽으로 감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들이 중국, 인도, 일본, 미국으로 감 -모라비안 교도들이 미국으로 감 |
-윌리암 캐리와 제1세대 선교사들 -허드슨 테일러와 제2세대 선교사들 -제3세대부터 현재까지 -현지 거류 선교사들 |
비자발적으로 감 원심적 (팽창적)
|
-애굽에 종으로 팔린 요셉이 바로에게 증거함 -나오미가 기근 때문에 룻에게 증거함 -내키지 않아 하는 선교사 요나 -히브리 소녀가 나아만의 집에 잡혀감 -바벨론에 포로로 간 히브리인들이 자기들을 잡아간 사람들에게 증거함 |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아 거룩한 땅에서 나와 로마 제국 전역과 그 너머까지 가지 않을 수 없게 됨
|
-울리파스(Ulifas)가 고트족에게 종으로 팔림 -추방된 아리아족 감독들이 고트지역으로 감 -바이킹들에게 잡혀 간 그리스도인들이 바이킹을 개종시킴 -이주자들과 청교도들이 미대륙으로 추방되어 인디언들에게 선교함
|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세계에 파병되었던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돌아와서 150개의 선교단체를 시작함 -우간다 그리스도인들이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으로 도피함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북쪽보다 덜 기독교화된 남쪽으로 피난하고, 후에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등에 근로자로 나감 |
자발적으로 옴 구심적 (흡인적)
|
-수리아 사람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궁정으로 찾아 옴 -룻이 모압에서 유대로 가기로 선택함 |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음 -고넬료가 베드로를 부르러 보냄 -마케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도움을 청함 |
-고트족이 기독교화된 로마를 침략하여 기독교 신앙에 대해 더 알게됨 -바이킹이 기독교화된 유럽에 침략하여 그 접촉을 통해 궁극적으로 신앙을 갖게됨 |
-기독교화된 서구에 세계 각국의 방문객들, 유학생들, 사업가들이 유입됨 -이주근로자들
|
비자발적으로 옴 구심적 (흡인적) |
-이방인들이 고레스 대제에 의해 이스라엘에 정착함 |
-로마 군대가 ‘이방인들의 갈릴리’ 지역을 점령하고 침투함 |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노예들을 데려옴 |
-공산주의에서 피해 나온 난민들 -보트피플, 쿠바인들이 강제로 추방됨 |
3.4. 소결론
본 장을 통해서 이주 노동자 사역은 나그네를 보호하고 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여러 예를 통해 살펴보았다. 또한 선교학적으로도 ‘가라’는 원심적 선교 메카니즘뿐 아니라, ‘오라’는 구심점 메카니즘 역시 신구약과 교회사를 통해 이어져 내려오는 무시되어서는 안되는 선교의 중요한 흐름임을 살펴 보았다.
그러므로 재한 몽골인 이주 노동자 사역은 나그네와 소외된 자를 사랑하고 섬기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귀한 사역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재한 몽골 이주 노동자 선교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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