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 데이비드 와 한스 에게드
(Christian David and Hans Egede)
크리스챤 데이비드 역시 모라비안 교회 설립의 최대 공헌자 중 한 사람이다. 1690년 로마 카톨릭 가정의 아들로 모라비아 지방에서 출생한 그는 독실한 카톨릭교인 이었지만, 진정한 기독교의 진리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기술을 익히기 위해 집을 떠나 도제로 들어갔는데, 그 주인이 그를 복음적인 신앙으로 인도하였다. 20세가 되어서야 그는 성경 속에서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27세 때 아내 안나의 권유로 개종하여 평신도 순회 전도자가 되었다. 전도 여행 중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는 것을 목격하고, 1722년 진젠도르프를 만난 후 힘을 모아 헤른후트를 설립하기로 했다. 그 후 그는 온 유럽을 돌아다니며 종교적 피난자들을 모아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로 이끌어 왔다. 그런 중에서도 그는 선교사역에 대한 소망을 갖고, 1733년 두명의 모라비안 교도와 함께 그린란드로 파송되었다. 그들이 파송되기 2년 전, 그린란드의 선교사인 한스 에게드가 선교 사업을 그만두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진젠도르프가 서둘러 데이비드를 리더로 한 자원자들을 파송하게 된 것이다. 그 소문은 거짓으로 판명이 났고, 그린란드에 도착한 세 명의 선교사를 에게드는 탐탁치 않게 여겼다. 우선 환영을 했지만, 불편한 감정이 일어나곤 했다. 노르웨이 원주민인 에게드와 새로 도착한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도착하기 10여년 전부터 선교사역을 해 왔던 에게드는 1686년 태어나 독실한 루터교 가정에서 자라나, 경건주의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어릴 때부터 그린란드에 건너가 살고 있는 기독교인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에게드는, 그린란드 교회가 쇠퇴하고 교인들이 이방신앙에 빠져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없이 그린란드로 자원하여 가게 되었다. 가족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으나 곧 아내가 소명을 갖게 되어, 4명의 아이와 함께 그린란드로 가게 된다. 그린란드로 가는 험한 길에서의 사고, 오랜 여정 등으로 갈등을 겪기도 하였지만, 3년 후인 1721년 그린란드에 도착하였다. 도착 후 언어소통의 어려움, 에스키모와의 생활습관의 차이, 기독교신앙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도 없었던 상황 등은 그를 절망에 빠지게 하였지만, 그는 가정 심방을 통해 선교사역의 기초를 놓았다. 직접 사역은 언어의 문제로 오랜 시간 후에 가능하였는데, 초기부터 그가 사용한 효과적인 접촉점은 음악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선교사역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 그는 에스키모들에게 잘못된 문화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미신적인 의식을 없앨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면으로 인해 그는 비교적 쉬운 상대인 어린이 사역에 집중하였다. 그러던 중 그린란드 사역을 강력하게 지지해 주던 프레데릭 4세가 서거하고, 크리스챤 4세가 왕위에 오른 후 그린란드에서의 상업적 활동을 철수하기에 이르렀고, 이 와중에 에게드의 사역도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진젠도르프의 귀에까지 들어가, 3명의 선교사가 추가로 파송되게 된 것이다.
모라비안 선교사들과 에게드는 복음화 방법에 대한 입장차가 뚜렷했다. 에게드는 정통교리를 강조하는 루터교 신자이고, 모라비안들은 감성적인 부분이 보다 강하였다. 사상적 차이점과 사역초기의 갈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서로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역을 감당했다. 언어공부, 사역 등을 위해 선배 선교사였던 에게드는 아낌없이 이들을 도왔다. 1733년 새로 즉위한 덴마크 왕이 그린란드 선교사역을 계속 후원할 것을 결정하였고, 이 소식을 전했던 사람을 통해 에스키모들 사이에 천연두가 유행하게 된다. 천연두로 어려움을 당하는 에스키모인들에게 에게드는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천연두가 휩쓴 이후 주민들은 에게드의 헌신적인 사랑에 대해 깊은 감사를 갖게 되고, 복음에 대한 수용력도 높아졌다.
이 사이에 데이비드와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선교기지를 정착키시고 선교사역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다. 1738년 큰 부흥이 일어나 1년 동안 수백명의 에스키모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질투가 난 에게드는 “씨는 내가 뿌리고 거두기는 당신들의 차지이군요”라고 말했다. 이것은 선교방법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모라비안들의 신비주의적 요소가 에스키모인들에게 적합했던 것이다. 큰 부흥으로 인해 헤른후트 공동체가 크게 성장하였다.
에게드는 천연두 질병을 고치던 시기에 병을 얻어 죽는데, 죽기 전까지 그는 그린란드 선교를 책임지는 감독자가 되어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기도 하였다. 대를 이어 에게드의 아들 폴은 디스코 만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계속 감당했는데, 사람들이 몰려올 정도로 설교를 잘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는 선교에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그린란드 선교사역에 매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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