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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어린이

예림의집 2008. 8. 22. 15:16

예수님과 어린이

양 금 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기독교교육학)


들어가는 말

해마다 오월이 되면, 우리는 어김없이 어린이 주일을 맞게 된다. 많은 교회의 강단에서는 '어린이'와 어린이교육에 관한 설교가 선포되고, 교회학교에서는 어린이 주일을 기념하기 위한 연중 행사들로 분주한 시간들을 보내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회에서 어린이 주일은 대부분 어린이들에게만, 혹은 어린이를 키우고 있는 성인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지, 그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대부분의 성인들에게는 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듯 하다.

우리의 교회 안에서 어린이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들이 가끔 성인예배에서 시끄러운 소리로 분위기를 흐리는 순간, 우리를 스치는 생각 속에 그들은 "여기 속해 있으면 안 될 존재"로 분류되는 정도이다. 그들은 말귀를 알아듣지도 못하고, 진지한 대화도 할 수 없고, 우리와는 관심도 틀리고, 단지 우리의 도움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일반적 생각을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갖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이들이 예수께 왔을 때, 그들을 저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화를 내시고 꾸짖은 후, 하늘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셨다(눅18:16). 예수님은 어린이에 대하여 어떠한 이해를 갖고 있었기에 그러한 제자들의 생각을 꾸짖었으며, 또 어떠한 근거에서 '하늘나라'가 어린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였을까? 어린이 주일을 맞으면서 예수님이 어린이에 관하여 말씀하신 내용들 속에 나타난 어린이 이해들을 살펴보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가르침을 찾아보도록 하자.



이 '세대'와 같이 완악하고 무지한 어린이

앞에 언급한 구절로 인하여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이 어린이를 어른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미화시켜서 보고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16-19절(눅7:31-35)에서 어린이를 부정적인 의미로 비유에 사용하고 계시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 노는 어린이에 비유하고 있다. 장터에 노는 아이들의 한 무리가 피리를 불면서 결혼식놀이를 하기를 원하나, 다른 무리의 아이들은 거기에 장단을 맞추어 주지 않는다. 화가 난 아이들은 이번에는 장례식놀이를 하려고 애곡을 하지만, 다른 무리가 거기에 장단을 맞추어 가슴을 쳐 울어주지를 않는다. 그들은 아마도 우리나라 아이들이 소꿉놀이나 의사놀이를 하듯 결혼식과 장례식놀이를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놀이는 틀어져 버렸다. 그들은 아마도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를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정해진 역할을 애당초의 약속대로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아마도 장터에서 이와 같이 노는 한 무리의 어린이들을 관찰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대가 마치 이 어린이들과 같다고 하셨다. 이 세대는 요한이 와서 금식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그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하고, 이제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판하는 세대들이다. 이 세대는 마치 장터의 어린이들처럼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요한이 와서 회개를 외쳤을 때, 그에 냉담했고, 이제 메시아인 예수가 왔으나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완악하고 무지한 세대이다.

예수께서 완악하고 무지한 '이 세대'를 어린이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그가 어린이의 전형적 속성, 즉 무지함과 고집, 그리고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눈치 없이 분위기를 깨는 속성을 아셨다는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예수님이 어린이에 대한 현실 인식 없이 어린이를 무조건 미화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이와 나란히 성서의 다른 구절들에서도 우리는 어린이를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4),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히 5:13)와 같은 구절들은 모두 어린이 시기는 미숙한 상태이고 극복되어야 하는 시기라고 보는 구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근거에서 어린이와 하늘나라를 연결시키고 있는가? 마가복음 10장 13-16절과 누가복음 18장 15-17절에는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자, 제자들이 이를 꾸짖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예수께서 그것을 보시고 분히 여기시며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였다. 사실 예수는 이 말씀에서 왜 어린이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인용할 때마다 어린이의 순수성이나 순결성 혹은 착한 마음씨, 악의 없는 생각들을 나열하면서, 어린이의 그러한 속성 때문에 예수님이 어린이를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선포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내용은 본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만약 우리가 본문에서 어린이적 속성과 관련된 무엇을 찾아볼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어린이는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본문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그야말로 어려서 혼자서 올 수도 없이 누군가가 데리고 와야 올 수 있는 부족한 존재들이다. 바로 그런 존재에게 예수님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즉 현재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현실이 될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약속하셨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히려 성인에 비하여 부족하고 약한 어린이를 들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여기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어린이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다. 어리고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어린이, 성인의 관점에서 계산해 보면 인지능력도 부족하고, 특별한 선행을 하지도 않았으며, 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도 못하는 어린이에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고 있는 것은,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의 선한 품성이나 순결함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계산과는 전혀 무관하게 주어지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에서 우리는 오히려 인간의 계산을 뒤죽박죽 만드시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천국이야기, 즉 천국은 저녁 늦게 온 일꾼들에게도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과 똑같은 삯을 지불하는 주인과 같다고 한 비유(마 20:1-16)에서처럼, 우리의 계산과 논리를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 개념과 서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의 원리가 통하는 곳, 인간적인 계산이 틀려지는 곳, 어린이와 같은 가장 내놓을 것이 없는 자에게 가장 확실하게 약속되는 곳, 그곳이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이로부터 이러한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속성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이 어린이에 관하여 언급하는 많은 경우에(마 18:3; 막 10:15; 눅 18:17) 하나님의 나라가 함께 관련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이와 같이 맞아들이는 자

앞에서 살핀 것처럼 예수께서는 어린이의 특정한 속성이나 행위가 어린이를 하늘나라에 속하도록 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고 가르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말씀에 연이어 예수의 또 다른 말씀을 접하게 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5; 눅18:17).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어린이와 같이 받들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한글 성서에서 받들다로 표현되어 있는 이 말은 헬라어 devxhtai로 '맞이해 들이다' 혹은 '영접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는 보통 손님을 맞이해 들인다는 의미로 신약성서에서도 종종 사용되고 있고(막 6:11; 9:27,37),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행 8:14; 11:1).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 나라를 맞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약성서 신학자 베버(H. R. Weber)는 지나간 수세기 동안 많은 성서 해석자들이 이 물음을 가지고 씨름했다고 하였다. '어린아이와 같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이것은 비유로 쓰인 말이기 때문에 하나의 최종적인 해석을 고정시켜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유(메타포)란 의미를 하나로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의미에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베버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맞아들인다"는 말은 아마도 어린이의 존재양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양식을 '객관적 겸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객관적 겸손이란 성인처럼 주관적으로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존재양식 자체가 이미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되어 있는 상태, 즉 '받는자' 혹은 '맞아들이는 자'의 자세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사실 성인적 의미로 보았을 때 어린이는 성인보다 반드시 겸손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린이들은 발달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관점을 취할 능력이 아직 없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는 일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린이는 객관적인 상태가 이미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상태, 즉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자', '맞이해 들이는 자'의 자세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새로 태어난 어린아이를 생각해 보자. 그는 누군가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먹여주는 것, 입혀주는 것, 씻겨주고 재워주는 것 모두 보호자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다. 어린이는 모든 생존에 필요한 것들뿐만 아니라, 사랑과 보호와 교육도 철저히 요청하는 자세로 있는 의존적 존재이다. 그는 엄마의 보호와 사랑과 배려에 철저히 자신을 내어 맡긴다. 거기에는 주저함이나 거부가 있을 수 없고, 선택적인 수용이 있을 수 없으며, 계산이 있을 수 없다.

베버의 '객관적 겸손'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하늘나라를 맞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따라서 어린이가 보호자에게 음식과 보호와 사랑을 요청하고 그것에 철저히 자신을 여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하늘나라를 요청하고 그것에로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고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자들에게만 이미 현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이 뜨이고, 그런 자들만이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을 내어 맡기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린이로부터 배우기

어린이의 객관적 겸손의 상태, 즉 낮아질 수밖에 없는 종속적 상태는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큰지 싸우고 있을 때(막 9:33 이하; 눅 9:46-48), 천국에서 서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고 물었을 때(마 18:1 이하), 예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고 하시고,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 이가 큰 자니라"(눅 9:48)고 하셨다. 어린이는 '너희 중 가장 작은 자'이다. 이 어린 아이 같이 종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자, 참으로 작음을 경험하는 자만이 하늘 나라에서 참으로 큰 자가 된다는 역설적 가르침을 예수는 어린이를 통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그 자체로 우리들의 교사이다. 그들의 객관적 겸손과 의존성 안에서, 그들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르고, '아바'를 외치고, 그들의 빈손을 내 뻗친다. 우리가 어떻게 하늘 나라를 영접할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인지 배우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어린이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