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또 보고 들으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요한계시록 5:11-12).
능력과 부와 힘과 지혜와 존귀와 영광과 찬송이 누구에게 있는가? 세상의 권력자인가? 그 권력에 의해 죽임당한 어린 양인가? 하늘의 비전은 우리에게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영광을 보여준다. 죽임당한 어린 양이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거리끼는 십자가에 하늘의 영광이 빛난다. 그리고 죽임당한 어린 양께만 경배하고 그분의 뒤를 따라 기꺼이 죽임당하는 주의 성도들은 주의 영광과 존귀에 동참한다. 강한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어린 양을 따름으로 죽임당할 자들이 누구인가?
오늘날 성도는 이 선택 앞에 서 있다.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죽임당한 어린양 편에 서서 십자가의 형벌을 감내할 것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로마제국과 유다의 종교권력은 얼마나 강하고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의 무리는 얼마나 무력한가? 주를 따르는 자들은 강한 다수 편에 서지 않고 약한 소수 편에 선다. 그리고 그 강한 다수를 향해 그들이 자랑하는 제국의 멸망과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를 선포한다.
약한 소수자들이 감히 견고한 체제를 전복하려 들다니! 이들의 죽임당함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함으로 세상 권력에 죽임당하셨듯이 오늘도 진정한 주의 교회는 세상에 맞서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함으로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 죽임당한 어린 양의 표지가 있는지로 참 교회를 알게 된다. 싸움과 미움받음과 고난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다.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교회들은 다 의심스럽다. 어떻게 죽임당한 어린 양을 따르면서 세상으로부터 영광과 칭송을 받을 것인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받을 대접은 영광이 아니라 죽임당함이다.
이런 교회가 죽임당한 어린 양이 받은 영광과 존귀에 처한다.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교회들은 우리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와 의심의 대상이다. 세상과 구별되어 세상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여 세상의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교회들은 죽임당한 어린양 편에 서기보다 그를 죽인 세상 편에 서서 세상 영광을 받아 누리며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착각한다.
이제 교회의 길은 오직 한 길이다. 죽임당하여 영광과 존귀에 이르신 어린 양을 높이고 그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의 비밀이다. 죽임당함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 죽임당한 어린 양이 세상을 다스린다. 그만이 인을 떼기에 합당하다. 그의 피로 구속받아 거룩한 교회가 그의 죽임당함에 동참할 때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는다. 이것은 관념적 추상적 진리가 아니다. 교회가 생명을 회복할 유일한 대안이다.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추종함은 교회의 부끄러움이고 치명적 위기이다. 이제 죽임당한 어린 양의 뒤를 따라 그와 함께 죽을 자들은 어디 있는가?
'ε♡з하나님께로..ε♡з > 성경,말씀,설교,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 성숙의 비결 (0) | 2020.05.26 |
---|---|
약해도, 서툴러도.. (0) | 2020.05.24 |
부르심에 합당한 삶 (0) | 2020.05.20 |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은 서머나 교회 (0) | 2020.05.18 |
2020. 05. 17 - 율법을 읽고 실천하라 (0) | 2020.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