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3-28).
믿음은 곧 삶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적이지 못하고 마음이 추하고 왜곡되어 있음은 모른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 삶 안에 들어오심의 사건이고 그로 인해 삶이 이전과 전혀 다르게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있는데 삶이 없다면,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라 할 수 없다. 믿음으로 들어가면서 삶이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진행된다.
믿음 안으로 들어가면서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이전에 제대로 자신을 알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병들었는데 병든 것을 알지 못했고, 어리석은데 스스로 지혜롭게 여겼고, 삶이 고장 났는데 그런대로 괜찮다고 여긴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이다. 주님은 빛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셔서 빛을 비추심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 우리는 어둠이고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 착각하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낮아짐, 이 자각이 구원의 출발을 가져온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바 ‘무지(無知)의 지(知)’가 구원의 시작이다. 팔복의 말씀에서 말한 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쓸데 있다. 병자가 되지 않으면 고침을 받지 않으려 한다. 구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족하던 삶에서 탄식하고 불만을 의식하는 삶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희망으로 들어가는 것은 절망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는 진정한 삶이 없었고 그런데도 착각하고 자신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주님이 빛으로 오셨고 그 빛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된다. 여기서 구원이 시작된다.
거짓을 버리고 진실하게 살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외식하는 자라고 한다. 그들은 진리를 아는 자들이고 진리를 실천하는 자들이고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이다. 그런데 주님이 보실 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은 빛이 왔지만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 빛을 배척했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의인이라 여겼고 그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진리의 말씀을 미워했다. 진리는 그들의 허위와 거짓을 드러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에고만을 사랑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세상의 욕망을 추구했다. 그들은 정의를 가르쳤지만 단지 외형뿐이었고 내면은 온갖 불의로 가득했다. 겉과 속이 달랐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보인 것과 그들의 실상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보고 그들을 칭찬했지만 내면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 앞에서 그들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의인이 아니라 악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움의 대상들이었다.
진리는 불편한 것이다. 진리를 허위를 폭로한다. 허위에 살던 옛사람은 진리 앞에서 당혹하게 된다. 진리의 빛이 올 때 우리의 삶은 크게 위기에 처한다. 우리 안에 깊은 이중성, 위선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의 빛 앞에 살기보다 사람들의 칭찬에 목말라하고 사람들의 비난에 크게 흔들린다. 사람들이 판단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외양에 신경을 쓰고 있다. 겉모습을 치장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지 진정한 내면을 가꾸려 하지 않는다. 주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올 때 우리의 위선은 드러나고 우리는 헛된 삶이 폭로된다.
외양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아첨하고 사람들의 아첨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 삶에 유익이 있다. 외모가 초라하면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지 못함이 사실이고 이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오늘날 세상은 더욱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의 우리에 대한 평가에 민감해지기 쉽다. 오늘날 세상을 따르게 되면 위선자가 되기 십상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의 평가에서 자유롭게 되고 그래서 더 이상 외양을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다.
진실함이 빛의 열매이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감추는 표정을 짓고 사는 것은 우리의 어둠이다. 내면이 아름답지 못한데 겉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마음에는 미움이 가득한데 겉으로는 사랑하는 척하는 거짓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이다. 참되게 믿는 이들은 진실하다. 세상 사람들은 내면에 있는 욕망과 분노와 미움을 은폐하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을 칭찬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이 위선을 크게 미워하신다.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낫다. 우리의 부끄러운 실상을 감추고 사람들에게 다른 인상을 주려고 힘쓰지 말라.
외양에서 내면으로 돌이키라
문제는 우리의 외양이 아니라 실제이다. 우리의 내면은 어떤가? 인간의 인간 됨은 외양이 아니라 내면이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다. 육체의 아름다움과 건강함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과 건강함이다. 오늘날 이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왜 그렇게 돈이 중요하게 되었는가? 내면이 아니라 외양이 중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돈으로 외양은 꾸밀 수 있다. 그러나 돈을 추구하면 점점 내면은 추하게 바뀐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했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 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5-28).”
바리새인의 겉은 깨끗하고 화려하나 속은 더럽고 추했던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지만 율법의 정신은 부정하고 율법의 형식만을 고수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 23:23).” 여기에 가치의 전도가 있다. 내면의 가치 대신에 물질적인 외적인 가치가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차지한 것이다.
오늘날 돈이 신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물질적인 평안과 안락이 지배하고 있고 선과 정의를 향한 추구가 사라졌다. 동물적인 욕망이 삶을 추하게 만들고 있다.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으로 꾸미고 살지만 마음에는 온갖 미움과 다툼과 분노가 가득하다. 삶을 세워주는 율법이 없는 것이다. 부요함이 아니라 정의가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복은 돈을 많이 벌어 내가 원하는 인생을 마음껏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명하는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과 영광이 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인해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인가? 가치의 전복이다.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믿음의 가치관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전에는 외적인 아름다움과 행복을 추구했다면 이제 주님의 빛이 비치면서 우리의 삶이 빛으로의 삶, 선한 삶, 정의로운 삶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 세상의 지혜와 십자가의 지혜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세상의 지혜의 목적은 부와 권력과 명예와 쾌락이라면 십자가의 지혜의 목적은 세상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 선과 의와 진실을 얻음이다. 부끄러운 것은 돈이 없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선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이다. 여전히 세상의 욕망과 이기심을 떨쳐 버리지 못함이다.
탁월하게 살라
우리는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다른 차원에서 산다. 세상에서 탁월함을 드러내는 것은 세상과 가치관을 뒤집어야 가능하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칭찬하고 비난하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것에 따라 탁월하게 되려 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능가할 수 없다.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은밀한 중에 우리의 감추어진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의 평가 앞에 늘 서 있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한 행위는 진실하지 못하다. 사람들의 비판과 칭찬에 대해 자유롭게 되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 합당하게 살 수 있다. 위선적인 것은 당연하지 않다. 진실함이 없는 관계는 청산되어야 한다.
물질적인 행복, 육체의 만족이 전부가 된 시대에서 선과 정의를 추구하고 율법에 복종하면서 사는 삶이 탁월성의 표이다. 고난을 각오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결과가 있는 것처럼 여겨져도 불의와 악을 허용할 일이 아니다. 진실하게 산다고 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대로 행하는 것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우리는 선한 길, 의의 길, 율법에 순종함으로 세상과 다른 삶의 높이는 보여주어야 한다. 탁월하게 용기 있고 정의롭고 깨끗하고 선해야 한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이 세상은 참으로 기이한 곳이어서,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도 우리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철저히 배척당한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는 까닭은 문화의 대세를 이루는 방향과 정반대 쪽 길로 가기 때문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윌리엄 윌리몬,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진실하고 정의롭게 삽시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거짓을 드러내시고 진실함과 정의의 새 삶을 나타내 보이셨는데 우리도 주님처럼 진실하고 의로운 삶을 힘써 추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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