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사역†/사역 나눔터

찬송은 그 이름에 합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림의집 2018. 6. 27. 18:41

찬송은 그 이름에 합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입버릇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대견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를 위해서라는 이 성숙한 고백을 하기까지 나에게는 참으로 엄청난 내적 갈등과 아픔이 있었는데 다른 분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쉽게 고백하는 것 같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합니다. 

내가 주님께 깨어지기까지의 고통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입으로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세상 관료들이나 부모, 형제를 위해 하는 것만큼도 사랑과 정성과 열정이 깃들어 있지 않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일하는 모습만 보아서는 누구를 위해 하는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혹시 표현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헌신하는 것을 뉘라서 감히 이러 쿵, 저러 쿵 평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지체들의 행실에 대해 우리가 서로 권면할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합당한 자세와 그 기준에 대해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서 이 시간에는 죄송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권면하려고 합니다. 역대 상 16장 28,29절을 봅니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이 말씀 가운데 우리는 분명히 찬송을 비롯한 모든 섬김의 기준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 이라는 것입니다. 합당이라는 말의 뜻은 '딱 알맞다'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권위에 꼭 맞는 찬송과 헌신을 하라는 뜻입니다. 옛날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 가끔 TV를 통해 대통령의 해외 나들이 때에 행정부에서 주관하는 환송 및 환영 행사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거의 없는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대단했습니다. 

심지어 김포공항에서부터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에 차량 한 대도 세워놓지 못하게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짓들이 과연 그 이름에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나 아무튼 권위 좋아하는 사람들의 촌극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모습은 하나님을 섬기는 나에게 큰 도전과 무언의 메세지를 남겨 주었습니다. 때로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권위일망정 그것을 세워주기 위해 몸부림치는 신하들의 모습을 보며 명색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나의 불성실과 무책임한 모습이 너무나 초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때도 있었습니다.

 

앞에 서서 찬양을 인도하다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찬송 중에 껌을 씹고 있는 사람,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찬양하고 있는데 옆 사람과 잡담이나 늘어놓는 사람, 매 주마다 등산복 차림으로 나와 예배가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는 사람들, 심지어 화장실에서나 신을법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들어오는 사람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하나님을 그저 인자하신, 좋으신, 편안한 하나님으로만 제한하고 자신의 편의에 맞추어 주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최소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의 매너도 없이 하나님을 만왕의 왕 운운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힐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성도들에게 찬송을 시켜놓고 설교 노트나 뒤적거리는 목사님들, 찬송 중에 히히덕거리며 지난 주간에 어떻게 지냈느냐고 옆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철없는 어른들. 이 모두가 구약시대 같으면 아론의 두 아들들처럼 성소 입구에서 불을 받아 죽어야 마땅한 모습들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찬송의 내용을 보면 대단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독재자도 그 백성으로부터 이런 찬송은 받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최대의 존칭어, 최고의 수식어. 아! 그런데 찬송하는 그 모습이란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을 송축하는 모습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 모습에서 부터 세상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틀린 사람들"이라고요.

 

요즘은 거의 모든 교회에 찬양단이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성가대가 없어지고 찬양단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교회가 점점 늘어 가고 있습니다. 제가 부산 해운대쪽에 파송되어 갔을 때입니다. 이미 그 곳에는 찬양단이 있었습니다. 제법 규모가 있고 이름이 알려진 찬양단이었습니다. 다른 교회에 초청되어 가기도 하고 여러 번 자체 발표회도 하는 그런 찬양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찬양단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미리 그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어서 숙지했지만 그 문제로 인해서 그 교회서 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담임 목사님이 발견한 그들의 문제는 차츰 그들이 외형적인 것, 의식적인 것, 의무적인 찬양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각오를 하고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가 기억납니다. 첫날 그들 앞에선 나에게 총무가 일어서더니 그 찬양단의 회칙 등을 말해주더군요, 그 뜻은 자신들이 여지 것 해 왔던 전통에 따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듣고 연습을 마쳤습니다. 

주일날이 되었습니다. 10시 50분 예배를 위해 10시까지 모두 모여 연습과 기도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엇는데, 정시가 되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조금 지나서야 세 명의 자매가 와서 주섬주섬 세팅을 하기 시작합니다. 10:20분이 되서야 마이크 세팅소리, 드럼 조율 소리, 스텐드를 이리 저리 옮기느라 분주합니다. 20명의 찬양단원이 준비가 되었을 때는 10:40분이었습니다.

결국 기도도, 준비도, 연습도 없이 예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 기적적인 일이 벌어지더군요. 예배 끝나는 시간까지 실수도 없이 무사히(?) 아름답게 찬양단의 역활을 잘 하더군요. 많은 분들도 찬양에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한 달간 반복 되었습니다.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예배란 성도를 기쁘게 하는 것이 하니라 하나님을 창양하고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목사님과 함께 울며 결단을 내렸습니다. 다음 주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예배가 진행되었고 광고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예배시간 내내 찬양단이 강대상 앞에 서 있습니다. 광고시간에 목사님이 "지금 서있는 이 찬양단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해산합니다. 찬양단을 다시 구성하겠습니다. 기존의 찬양단원들도 찬양단이 되려고 하면 정해진 오디션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성도들이 술렁거렸습니다. 예배가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적어도 우리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통쾌해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대로 그렇게 만만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찬양과 기도와 예배를 그분이 흠향하실 것이라는 교만을 벗어버리십시오. 그분께 합당한 것들만이 그분께 드리워질 것입니다. 그 후 그 교회는 찬양단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놀라운 회개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교회에 제대로 된 예배를 원하셨으면 타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저를 그곳으로 불러 자그마한 발화점을 삼으시고 교회를 갈아 엎으셨겠습니까? 그 때 그 사건은 지금도 부산지역에선 회자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교회를 하나하나 조각내셨고 그 후 회개하게 하시고 치유하시고 더욱 넉넉히 축복해주셨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 제가 그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어서 또 다른 곳으로 파송되어 질 때에 그들의 배웅하는 그 모습들은 나를 맞이할 때와는 사뭇 다른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예배시간에 늦거나, 연습 시간의 늦는 이유는 두 가지 압니다. 그 첫째가 바로 교통체증입니다. 차가 연착 되었다느니, 도로가 미끄러워 막혔다느니.... 여러분 차가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 것이 어제 오늘 일입니까? 요즘은 지하철이 잘 되어 있어서 지하철을 이용하면 절대로 늦을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15년 동안 찬양 사역을 하고 있지만, 교통사고를 당했던 적과 철원의 군부대에 방문할 대 검열 문제로 지체되었던 단 두 번의 경우 외에 집회에 늦은 적이 없습니다. 

수많은 교회와 집회 장소를 다녔지만 지각만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의무이며, 마음에 소원을 품고 기다리는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코리안 타임이란 말은 없어진지 오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만큼은 코리안 타임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왜 이렇게 둔감하십니까? 코리안 타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요. 

두 번째 이유는 밥 때문입니다. 아침밥이 늦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참으로 궁색한 변명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 후 점심식사를 대접합니다. 아침 한 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유 한 잔만으로도 가능합니다. 오히려 아침을 먹지 않는 것이 오전에 찬양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매번 굶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밥이 매번 지각하는데 대한 원인을 제공한다면 그까지 것 굶고 온전히 예배를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계란 후라이 한 개와 우유 한통 후딱 먹고 집을 나서시길 바랍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들지 맙시다. 대통령이 만찬을 베풀어 놓고 신하들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 모습이 과연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하찮은 세상 관료들도 면담 시간에 제대로 맞춰가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거늘 하물며 우리의 입으로 만 왕의 왕이라고 찬송하는 하나님을 이렇게 홀대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사명자"라고 부릅니다. 사실 목사나 선교사만을 하나님께서 사명자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사명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명자라는 명칭의 의미는 과연 무슨 뜻일까요? 한문으로 사용할 사(使)에 목숨 명(命)을 썼는데 이는 곧 "목숨을 걸고 일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즉 육신의 생명을 소멸하면서 주의 일을 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기능을 팔면 되고 시간을 할애하면 되지만 주의 성업을 수종드는 일의 차원은 그렇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생명을 바치고 주의 일은 마치 여가를 즐기듯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름 앞에 사명자라는 수식어가 붙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고 했습니다. 여러분 충성의 의미가 과연 무엇입니까? 충성을 하려면 목숨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현재 교회에 던져지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성경 몇 구절을 소개하며 오늘의 무거운 이야기를 마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 하냐 이제 이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 하겠는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말 1:8). 이제 제발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맙시다. 입으로만 왕이라고 부르지 맙시다. 입으로만 주의 영광 위해서라고 떠들어 대지 맙시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제발 예수님의 탄식을 이제 멈추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