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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교회의 반석이 된 사람

예림의집 2018. 1. 3. 13:52

베드로: 교회의 반석이 된 사람


매일 밤 그 눈빛이 너무나 생생해서 쉽게 잠들 수 없었습니다. "에이, 설마요. 다른 살마들은 몰라도 전는 결코 아니에요. 주님!" 저는 '나의 주님'께 그렇게 단언했었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스로도 한 치의 의심을 하지 않았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할 리도 없지만, 그런 상황이 된다면 기꺼이 그분 곁을 지키다 마지막을 함께하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어요. 하긴,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이후 분위기가 하수상하기는 했습니다. 더구나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행동들은 제자들 사이에서도 큰 술렁임을 가져왔죠.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치시며 장사판을 다 엎으셨던 일도, 성전 건물을 향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낳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서싯발 날리는 예언을 하신 일도, 그걸 본 서기관과 제사장, 바리새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일각이 위태로워 보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이 누구신가요?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보이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 권능자를 사람이 어찌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잠시도 함께 기도할 수 없었느냐?"는 예수님의 탄식을 마지막가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당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럽니다. 그래도 너는 우리보다 낫다. 그 밤에 우린 다 도망갔는데 너는 예수님을 따라갔잖니, 마지막까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제자잖니. 하지만 그들은 모릅니다. 그 가까이에서, 그 마지막 순간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작은 여종들과 스쳐 지나가는 행인의 질문에도 벌벌 떨며 저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맹세까지 했죠.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새벽 미명, 닭 울음 소리에 비로소 정신이 퍼뜩 났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이리 되리라 이미 말슴하셨는데, 그때 나는 왜 그 말씀을 더 깊이 새겨두지 않았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은 운명론적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내 안의 깊은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오직 메시아의 '영광'만을 함께하려 했던 욕심을 보시고 미리 마음을 살피라고 경고하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그럴 수 있다, 그러니 깨어 있거라. 항상 동해하시는 하나님을 붙잡거라. 그런 조언이 아니었을가요? 그러나 저는 바보스럽게도 목소리만 높였던 것입니다. 걱정 마세요, 주님. 저 의리 하나로 살고 죽는 베드로란 말입니다.

혹시 경험해보신 적 있나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나를 향한 가장 측은한 눈빛을 직면하는 것. 그건 경멸도 혐오도 아니었습니다. '애처로움'이었습니다. 너를 어쩌지? 이제 홀로 남아 스승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우왕좌왕 흔들리는 사람들과 버텨내야 하는 날들... 아 너를 어쩌면 좋지? 여전히 사랑이 담긴 그 눈빛에, 저는 통곡을 하고야 말았던 겁니다. 차라리 분노의 눈빛이었다면, 실망과 좌절의 눈빛이었다면, 그랬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잠 못 이루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였습니다. 부활하신 그분이 영광 가운데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도, 놀랍고 기쁜 일인데도, 저는 예수님께 말을 걸기는커녕 처다보지도 못했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만지며 놀라워한 순간에도 저는 주님의 옷자락조차 건드릴 용기가 나질 않았죠.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가 늘 하던 고기잡이에 몰두했던 까닭도 그러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요? 제가 다 마쳤는 걸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그렇게 자신 있게 고백했던 당시늬 예수님은, 멋지고 위엄 있고 강한 카리스마를 소유한 분이었으니까요. 결국 저는 상황에 취했던 것이지 예수께서 어떤 모습으로 계셔도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모실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중심을 못 잡는 인간이 무슨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습니까? 어불성설이지요. 그저 하던 일이나 하는 게 맞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패배자 같은 일상을 살던 저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힌 뒤에야, 저는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그냥 물속으로 뛰어들어 그분을 맞았지만, 그래도 얼굴을 독바로 뵐 수는 없었지요. 예수께서 호숫가에 준비해놓으신 떡과 생선을 먹으면서도 저는 애꿏은 숯불만 뒤적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게 무슨 말씀이지? 의아한 마음에 그제야 저는 주님의 얼굴을 응시했습니다. 그 밤 이후 첫 눈만춤이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슬픔과 애처로움을 담은 눈빛이 아닌, 허용과 기대가 담긴 생기 있는 눈빛이었습니다.

"그럼요, 당연하죠.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걸 주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답답함과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가득 담아 소리쳤습니다. 그 모습에 빙그레 웃으시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이렇게 묻기도 전에 예수님은 제게 똑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더 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이건 뭐지 싶어 근심 어린 마음에서 세번째 답을 내뱉다가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 예수께서는 내 마음을 이렇게 꿰뚫어 보신거구나. 구분을 세 번 부인했던 나의 후회와 자기혐오와 절망감을 이렇게 치유해주시는구나. 그렇지만, 어떻게, 나는, 이 성질 급하고 제 말도 책임지지 못하는 한심한 나는, 감히 주님의 양을 먹일 수 있을까?


더 묻지 못했지만 오순절 날 성령 체험을 하고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도, 주님의 양들을 먹이는 일도, 나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흥분도, 그가 영광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시던 모습도의 증인됨도, 무엇보다 곧 온시다는 그 약속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백이십 명 남짓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다 믿어졌고, 여전히 마음 안에 떨림과 감격이 남아 있었지만, 그냥 우리는 조용히 이루어질 일을 앉아서 기도하며 기다리려고만 했습니다. 하늘 위에 강권하여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모든 것이 다 한 번에 완성될 것을 믿었서요. 

하지만 그날, 다락방에 모였던 모두가 똑같이 경험한 성령의 임재는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가능성과 능력을 알려주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 이런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만, 그렇게 초자연적인 모습으로 임했던 하나님의 영은 그러나 각 사람에게는 인격적으로 다르게 다가오셨습니다. 누군가는 불에 덴 듯 뜨거웠다고 하고, 누구는 온몸을 막 두드리는 듯한 격렬한 체험이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나에게 오신 성령님은 마치 어머니의 손길 같았습니다. 되는 일 하나도 없고, 자꾸 실패하고 넘어지고, 그래서 살 기운조차 없이 축 늘어진 어깨로 귀가한 다 큰 아들을, 그저 말없이 꼭 안아주시는 그런 따뜻한 품 같았습니다.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감히 주님을 배반할 일 따위는 없다고 장담했던 그 순간도, 그리고 그 배신의 밤에도, 저는 하나님의 영과 동행하기를 간구하지 않았던 겁니다. 나 자신을 너무 믿었던 거죠. 비록 다혈질이기는 하지만 나 베드로는 의리의 사나이니까요. 설마 내가, 그것도 3년간 모셨던 나의 스승님을? 내가 나만 맹신했기에 생긴 일이었던 겁니다. 어찌 인간이 "하나님의 영" 없이 완전하고 온전하게 선한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첫 설교는 요엘서를 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을 할 것이요 너히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누구든지 주이ㅡ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 그것 말입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에 얻게 되는 영생도 구언입니다마는, 지금 이 순간을 지옥처럼 살아보았던 저는 비로소 '구원의 현재성'에 대해서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담긴 비밀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분은 인간의 유한한 몸을 입고도 하나님의 영과 동행한다면 언제나 선과 의와 사랑을 선택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첫 열매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믿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 육화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힘과 용기와 사랑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삶으로 죽음으로 부활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죠. 바로 그분이 우리를 형제라 자매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 이름은 부르기에는 가장 짧은 이르입니다만 가장 길고 깊고 심오한 메시지를 담은 이름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본을 보이시고 완성하신 그 삶을 따라서, 우리는 현재에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의, 그리고 딸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이 삶이 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육체에 그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에 취해 이렇게 설교를 마치고 나자 그 자리에서 3천 명이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이렇게 저는 교회가 되었죠. 언젠가 예수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모이는 두세 사람, 거기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요(마 18:20). 그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모두는 그렇게 교회가 되어갔습니다. 따르던 선생님도 계시지 않고, 제도적 힘도 없었지만, 우리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니까요. 미듬의 반석, 저를 '게바'라고 부르셨던 걸 기억합니다. 그 반석의 의미를 이제는 제가 삶으로 살아낼 차례입니다.


저의 생각.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완악한 살마과, 마음이 상하여 자기를 포기한 사람. 온유하고 부드러운 하나님의 영은 결코 폭력적으로 사람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늘 마음을 문을 드드리시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날의 일은 어쩌면 교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성품, 의리,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을 믿었기에 그리 당당하게 호언장담했을 태니가요. 하지만 예수께서 "네가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는 말슴을 하셨을 때에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이후로 계속 기도했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동행해주십사. 하여 내가 약하거나 악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강함과 선함을 주시라고요. 결국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이지 싶습니다. 나를 믿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나의 의지를 강하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삶. 이를 위해 항상 깨어, 쉬지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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