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마틴 루터 | 루터 성경 | 독일 루터 교회 |
마틴 루터가 명실공히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로 나타났을 때 유럽은 여러모로 루터에게 유리한 형편에 놓여있었다.
이들 나라 중 유독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인 독일인들만이 아직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지 못하여 도저히 단합되고 통일된 힘의 집중을 형성할 수 없었다.
이 상처받은 영혼들은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세 원리 곧,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오찌 민음만으로(sola fide)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여 중세의 한 제도 교회와 그 제도 교회에 기초한 신앙의 교리체계를 붕괴시키는 철퇴를 가하였던 것이다.
Ⅰ. 시대배경
15세기 말과 16세기 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생활의 터전을 땅위에 두었기에 기근이나 홍수로 인한 식량의 감소가 생기면 의식주 조차 해결하지 못해 구걸하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
이런 그림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두려운 심판을 피해 구원받는 길을 찾고자 했다.
또한 교회는 죄인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철저히 의무화하였다.
II. 루터의 생애
1. 루터의 출생과 초기교육
루터는 1484년 11월 10일 인구 4,000명에 달하는 평범한 농촌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광부생활 7년만에 만스펠트의 번성하는 구리 광산의 소유주가 되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 이어서 그곳의 시의원이 되는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
1497년 그가 14살이 되었을 때 막데부르그의 공동생활 형제단으로 들어갔으니 이 형제단은 네덜란드 개혁 운동의 하나인 근대적 경건(devotio modana)이라는 평신도 분파에 속해 있었다.
이 시기에 루터는 신앙적으로도 상당히 충실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동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루터는 이 대학에서 논변이나 대중토론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날카롭게 사물을 투시하는 지적 분석력을 함양하였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루터가 수도사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라 그 보단 훨씬 전이었으나 아직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2. 루터의 회심
수도사가 되기를 서원한 후 그가 22살 되던 해인 1505년 7윌 17일 에르프르트의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어거스틴파 은둔 수도원(the black cloister of the Augustinian hermits)에 들어갔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간지 2년도 채 못되어 신추에 서품(1507년 3월)되고 첫번째 미사를 집례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단순히 기도나 금식, 궁핍, 탐욕의 흉내만 내었던 것이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그것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루터는 인간이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 . .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7-39)는 결단코 문자적으로 완벽하게 지켜질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루터의 관심을 고행이나 금욕에서부터 성경으로 돌리게 했다.
한편으로 루터는 독일 신비주의 영성 신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구원을 그리스도의 은혜에 초점을 맞춤으로 그의 길고 긴 고통과 불안한 양심을 치유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 의로우신 하나님, 벌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다.
원죄로 영원히 저주받은 비참한 죄인들이 십계명의 율법을 통한 온갖 재난으로 압박 당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단 말인가?
그 후에 나는 의인이 믿음을 뜻하는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그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우리는 소위 "수동적인" 의를 받는다.
Ⅲ. 루터의 면죄부 논쟁
1517년 가을 어느 한 날, 요한 테첼이란 순회 설교자가 그를 호위하는 무장군대를 거느리고 독일에 나타났다.
교황 레오에겐 교회의 성직을 고액에 파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었다.
독일의 대부호 푸거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이 알베르트 대신 교황청에 막대한 돈을 지불하였다.
논제는 라틴어로 쓰여졌지만 곧바로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 전역에 퍼져나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추기경이자 도미니크 수도회 원장인 카예탄이 멀리 독일에 나타나 루터에게 말하기를 "나는 뉘우친다"(revoco)라는 말 한마디만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교서 접수후 60일 이내에 루터는 교황청에 출두하여 자신의 모든 잘못을 모든 인정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루터는 불태워 버렸다.
황제를 위시하여 선제후, 영주, 주교, 대도시의 대표자들과 질문을 받게 되었다.
루터는 간신히 하루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인문주의자들이 빈정대는 말, 곧 종교개혁은 한 수도사와 한 수녀의 연합으로 끝났다는 것은
끊임없는 편지답장, 계속되는 강의와 설교, 교회지도 등이 그를 여전히 바쁘게 했다.
그의 동역자가 임종 직전 "선생님, 선생님께서 평생에 가르치신 교리와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서 돌아가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루터는 육신이 연약한 중에도 온 힘을 다해 큰소기로 "오! 아멘"하고 말하였다.
그의 수제자이자 후계자인 멜랑히톤은 루터의 죽음을 표현하기를 "아! 마부는 갔다. 이스라엘의 마차가 사라졌다"는 말을 하였다.
IV. 루터의 사상
1. 오직 성경으로
루터에 의하면 기독교인에 대한 최고이며 최종의 권위는 단연 성경이다.
어떻게 성경이 그리스도에게만 정향되어졌다고 믿을 수 있는가?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해석은 성경 각부분에 대한 신학적 비판이 허용되었고 "성경은 자기 자신의 비판가"(Scriptura sacra sui ipsius critica)가 되어 성경 안에서도 참된 성경이라는 가치 구별이 생기고 말았다.
당신은 지금 당장 모든 책들을 구별하고 어느 책이 가장 좋은 책인가를 결정할 입장에 놓여 있다.
2. 오직 믿음과 은혜로
루터에 의하면 "오직 믿음과 은혜"라는 말의 뜻은 사람이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리지 않고, 단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므로 구원을 경험한다.
의의 전가는 다른 말로 법정칭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법정에서 실제로 죄가 있는 자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을 내릴 때 죄인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3. 십자가의 신학
"오직 믿음과 은혜"라는 루터신학을 잘못 이해하면 그리스도인의 선한행위는 전혀 불필요한 것으로 보여지기 쉽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자는 이제 그 자신이 무엇인가를 행하려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멸절시키시고, 자신 안에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하나님의 이끄심에 맡긴다는 의미이다.
이 십자가는 외형적으로 비굴과 무력, 불행과 재앙, 그기고 처참한 곤경을 말해준다.
이 비밀은 무엇인가?
참으로 놀랍고 깊은 진리가 여기 있으니 십자가의 "허약함 속에서 강한 능력이 있고 비굴함 속에서 영광의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은혜로 즐겁게 질 수 있다.
4. 만인제사장 주의
루터에게는 세례받은 모든 성도가 전부 제사장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교회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특수 소명을 받았지만 그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자신들의 직분을 단지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에만 사용해야 한다.
V. 정리
루터의 종교개혁을 평가해 보자면 다른 일반역사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 먼저 긍정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첫째, 신약성경(특히 바울신학)과 어거스틴의 신학이 이미 주장했던 믿음으로 칭의되는 원리의 재발견이다. 셋째, 만인 제사장주의를 주장함으로써 모든 개개인이 제도나 의식의 중개없이 하나님께 단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넷째, 모든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는 성속일원론을 주장함으로써 중세의 성속이원론을 배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제나 수사가 평신도 보다 더 고귀하다는 성직우위론의 주장이 의미가 없게 되었다. 다섯째,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문학의 금자탑이 되었다. 여섯째, 루터는 화목하고 따뜻하며 찬양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몸소 이룸으로써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일곱째,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은 한편으로는 부패했던 카톨릭 교회에 직, 간접 영향을 줌으로써 카톨릭 내부의 갱신과 개혁을 이루게 했다(counter reformation)는 긍정적인 평가들이 있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상대적으로 평가절하했다.
마틴 루터는 부패한 로마 카톨릭의 모순을 비판하고,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구호로 종교개혁을 이끈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원래 로마 카톨릭 사제였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인정하는 등 로마 카톨릭의 교리와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루터는 칭의, 죄사함, 중생, 성화, 영화로 이어지는 구원 중 가장 첫 단계인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를 수 많은 연구와 고통 끝에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교리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내 모든 죄가 씻어진다는 죄사함과 ,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믿음으로 연합해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중생에 대한 명확한 언급도 없습니다.
루터의 가장 큰 실수는 믿음만 강조하다 성화와 행함을 경시하였고,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며 평가절하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성경에서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중요하다고 스스로 판단할 수 없고, 자신의 의견에 맞지 않는다고 성경의 특정부분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마태 4/4 그러나 주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3/3 또 너희는 우리가 섬긴 그리스도의 편지임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베드로후서 1/20~21 먼저 이것을 알지니,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으며, 사도 베드로는 성경의 예언은 사람의 뜻에 따른 사사로운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가 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더니 주께서는 몹시 놀라고 괴로워하기 시작하시더라.
야고보서 2/26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니라.
더군다나 야고보는 베드로 요한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한 중요한 사도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12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한 사도입니다.
누가 6/46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들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요일 2/6 그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가 행하신 대로 자기도 행해야 하느니라.
요일 2/9 그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두움 가운데 있느니라.
왜냐하면 예수님을 구주(주인)로 믿으면서도(영접하였으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 뜻(말씀, 계명) 대로 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거나,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실제로는 미워하면 그 믿음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22 믿음이 어떻게 그 행함과 더불어 작용하였으며,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었음을 네가 보느냐?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저도 선교와 관련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계속 굳건한 믿음을 유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되었다고 믿어도 내 육신의 본성은 계속 나와 죄를 짓고 나를 괴롭게 합니다.
히브리서 11/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고전 4/20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
진리말씀을 확고히 믿으면 그 믿음이 내 앞에서 실체적으로 나타나고, 그 믿음이 실제로 실현되는 것이 보여지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태 7/21 마태 7/21~23 나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되느니라.
에베소서 4/1~3 그러므로 주의 죄수 된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되,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화평의 띠 안에서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도록 열심히 노력하라.
행함의 중요성은 야고보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바울도 강조했습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주리라.
계시록 22/14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 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그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
계시록 22/15 그러나 개들과 마술사들과 음행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누구든지 거짓말을 즐겨 행하는 자는 모두 다 성 밖에 있으리라.
마지막 때 사람들의 믿음이 아니라 행함에 따라 심판하는 이유는 행함이 바로 믿음(씨(말씀)를 심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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