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제2장 궁극적 전제로서의 하나님(God as the Ultimate Presupposition)

예림의집 2014. 10. 20. 20:48

 제2장 궁극적 전제로서의 하나님(God as the Ultimate Presupposition)


전제주의적 변증학은 이성적 추론이나 증거 제시로 상대방과 직접 맞대응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모든 불신자가 가지고 있는 전제가 무엇인지 밝히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직접적인 논쟁이 아니라 간접적인 논쟁을 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이성적 추론이나 논리나 증거는 가지고 있는 전제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사실 전제라는 것은 인간이면 다 갖고 있는 것이다. 전제란 단지 선입관(prejudice)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대화를 시작하기 전이나 실험을 하기 전에 인위적으로 내세우는 가설(hypothesis)과 같은 것도 아니다. 전제란 인간의 사고 체계(system), 신념(commitment), 궁극적 ‘준거점(reference point)’, 세계관(world view)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근원 혹은 우주의 근원을 논한다고 할 때, 믿는 자의 전제는 바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것

이며, 믿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진화론적인 원인이나 우연(chance)이 바로 그의 전제 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전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자연을 볼 때나 성경을 해석할 때나 인간을 볼 때나 인간복제 문제를 다룰 때나 그 어떤 창조에 관한 시실을 해석할 때 그 전제에 근거하여 해석하며 그 전제와 불일치하는 것은 과감히 버리게 된다. 그러나 진화론적 전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자료를 갖고서라도 자신의 전제를 근거로 또한 그 전제와 부합되는 해석을 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전제는 자신이 의식하든 하지 않던 간에 사실(fact)이나 경험을 해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이러한 하나의 전제는 독립되어 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전제들로 구성된 어떤 체계를 이루어 작용하기도 한다.

전제라고 할 때 어떤 닫힌 시스템(system)을 연상할 수 있다. 열린 시스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제를 불합리하고 독선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열린 시스템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받고 싶지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싶어서이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그의 시스템은 생명과 같음을 의미한다.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것이다 닫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열린 것이다. 자율적 인간에게는 닫힌 것처럼 느끼겠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처럼 느낄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우리의 출발점이요 근거라는 것보다 더 자유롭고 의미 있는 것은 없다. 진리가 자유하게 하는 것이지 마음대로 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불신자에게 기독교를 변증할 때 이러한 전제를 제쳐 두고 피상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혹 생각하기를 이런 전제는 믿지 않는자와 논쟁할 때는 배제되어야하고 어떤 논리나 사실, 경험, 증거, 이성 등을 근거로 중립적 입장에서 논해야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립적 사실, 중립적 증거, 중립적 경험, 중립적 논리, 중립적 이성은 없다. 혹 그러한 것들이 중립적이라 믿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갖고 있는 전제들의 시스템에서 그런 신념을 갖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제를 말할 때 단순히 어떤 초월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모든 자들이 세계관이나 신념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전제를 부끄러워하거나 우리의 지식, 논리, 경험, 증명과는 거리가 먼 어떤

신앙적인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다. 불신자의 세계관은 달리 기독교 세계관에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 바로 하나님의 계시이다 또한 우리가 믿는 전제는 어떤 가설과 같은 것도 아니요, 시간적으로 앞서는 것도 아니다. 반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신교의 원리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 작용은 하나님의 자의식적(自意識的. self-conscious) 인식 작용을 전제하였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를 주장함에 있어서 우리가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바는 단지 하나님의 자의식적 인식 작용이 인간의 인식 작용보다 심리학적으로 또는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숙고하는 바는 사물을 해석함에 있어서 궁극적인 열쇠를 쥔 궁극적 참조 근거가 도대체 무엇이냐 히는 문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 단지 긍정적으로 알고 있느냐 부정적으로 알고 있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전제(presupposition)를 내세운다고 해서 이성이나 경험이나 증거를 무시한 채 맹목적 믿음을 내세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제라는 것은 이성, 경험, 논리, 증거, 역사, 철학, 과학 등 모든 인간의 활동을 의미 있게 하고 이치에 맞도록 해주는 틀(frame-work)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계관(world-view)이나 준거점(reference-point)과 같은 전제는 본인이 인지하고 느끼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정신적 경험이나 지식의 활동이 있었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없으면 처음부터 정신적 활동이 불가능하다. 마치 물고기가 물이 있어야 헤엄을 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적 활동은 그것을 가능하게 히는 체계나 틀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들을 이어주는 체계나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적 혹은 지식적 활동은 불가능하다. 흑 자신은 복잡한 세계관이 준거점이나 전제 같은 것이 없고 그냥 평범하게 살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평범함은 궤변주의(Sophi sm)에서 주장하는 ‘무관심(apatheia)’이나 스토아학파(Stoicism)가 주장하는 ‘평정심(ataraxia)’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이 일종의 세계관이요 전제이다. 사실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이기적인 세계관이요 전제이다.

사람이면 반드시 나름의 어떤 세계관 혹은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세계관 혹은 전제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며 또한 가능하게 했다면 이치에 맞게 하는 것이냐 아니냐를 문제 삼아야 한다. 반틸의 변증학의 핵심은 기독교 세계관이 유일하게 인간의 경험과 지식을 가능하게 하며 이치에 맞게 하는 세계관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역으로 그 외의 세계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을 궁극적 전제로 삼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행 17:28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며 인간 모두가 하나님을 힘입어 살고 있음을 말씀한다. 또한 롬 1:20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말씀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인간을 포함하여)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알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알고 있고 의존하고 있는데도 자신은 의존하지도 않고 또한 알지도 못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실 자신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했을 때 그 ‘모른다’는 생각도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제주의적 변증학에서 말하는 전제는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 무엇을 미리 품고 있는 가설이나 선입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그의 계시와 속성과 창조를 의미한다. 전제주의적 변증학이 성경적 방법론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가 하나님의 일관성(coherence)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일관성에 부합되지 않는 세계관 혹은 전제는 어떤 경험이 나 지식 혹은 사실들(facts)이나 원리들(Iaws)을 이치에 맞게 설명하거나 해석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자연 세계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도 창조하셨다. 정신세계는 합리적 질서, 논리적 질서, 개념적 질서, 도덕적 질서, 법적 질서, 심리적 질서, 영적 질서 모든 것이 포함된 세계이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려고 의도하고, 무슨 판단을 하려고 해도 하나님 이 창조하신 정신세계의 일관성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우연(chance) 혹은 우유성(contingency)

에 의존해야 하는데 우연은 질서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어떤 일관성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의사소통도 불가능하고, 사실들에 대한 해석도 불가능하고, 자신의 논리의 흐름도 끊긴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기능하지도 않고 이치에 맞지도 않게 된다!(It doesn’t make a sense!) 반틸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 전제에서부터 시작하는 변증학이 유일하게 합리적(rational)이며 지성적(intelligible) 이며 개혁 주의 전통에 부합된다고 강조한다. 반틸은 다음과 같이 전제주의적 변증학을 설명한다.

 

변증학의 개혁주의 방법론은 하나님을 전제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이성과 사실에 조화됨(accord)을 증명하기 전에 그 이성이 어떤 이성이며 그 사실이 어떤 사실인지를 물어야 한다. <중략> 이성과 사실은 하나님과 그의 우주 다스림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서로 온전히 연결될 수 없다.

 

여기 이성이 어떤 이성이며 사실이 어떤 사실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이성과 사실 이 가능하게 되며 이치에 맞게 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면 각자 이성을 가지고 시실에 대한 지식을 얻고 해석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성과 사실이 서로 온전히 연결 되어야만 인식이 가능하다. 이러한 연결은 인간이 처음 이은 것이 아니라 먼저 연결이 되어 있기에 지식이나 경험이나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성과 사실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은 보편적인 원리와 특수적인 사실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실(fact)을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하면 이성은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우주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그가 놓으신 질서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하고 그것들에 대한 설명도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을 전제한다는 것은 흔히들 오해하듯이 어떤 가정(hypothesis) 이나 선험주의(priorism)나 맹신주의(fideism)가 아니다. 그것은 극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근본적인 일이다 예를 들어, 지구는 그냥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중력과 태양과 달을 비롯한 항성들과의 인력에 의해서 창공에 떠 있는 것이다. 지구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중력과 인력을 전제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가설에 불과하고 맹신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몰상식한주장이다. 또한 이러한 중력과 인력이 우연히 발생되었다는 주장도 비합리적이고 몰상식한 것이지만 우연히 발생되었다고 해도 그 중력과 인력은 전제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경험과

지식이 가능하고 설명되기 위해서는 뭔가를 전제해야 한다. 그 전제가 성경의 하나님이시냐 그 외 다른 세계관이냐 이것을 판단하는 것이 전제주의적 변증학의 핵심이다.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겉으로 나타나는 대형적(macro-) 형태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micro-) 구조나 요소들도 함께 창조하셨다 에를 들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겉으로 보이는 형태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신경조직이나 장기나 혈관이나 DNA 구조까지 다 창조하셨다. 그렇지 않으셨다면 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작은(micro-) 구조만 아니라 아담의 생각과 논리와 심리와 도덕성과 판단 등 모든 정신적 특질이나 체계도 하나님이 다 기능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질서 체계가 없이는 아담은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은 원본(archetype) 이요 인간의 생각은 사본(ectype)이라 할 수 있다. 원본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사본은 사본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원본을 인정할 때 사본의 의미와 가치가 바로 주어질 수 있다 사본이 원본을 떠나 독립 되었고 스스로 권위(authority)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또한 존재론적으로도 심각한 문제이다. 사본인 인간이 원본인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의존해야한다는 것은 종교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무의미와 자멸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존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위격(person) 이시다. 따라서 하나님 을 전제하는 것은 인격적, 윤리적 특색을 지니게 된다. 세계관 혹은 전제를 다루는 것은 사변적으로 개념을 논하고 철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다루는 것이요 인격체(person)를 다루는 문제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분명히 보여 알게 되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부인하는 것은 개념이나 논리나 과학이나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요 진리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피조 된 인간은 그의 존재(existence)에서 하나님 을 의존하듯이 지식이나 심리적 판단이나 도덕성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계시)을 의존하지 않으면 인간은 참된 사고를 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생각(하나님의 계시)이 없으면 인간의 사고는 이해 불가능하고 의미가 주어질 수 없다. 인간의 사고는 ‘일관적 합리성(coherent rationality)’을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합리성은 인간이 자신이 사고(thought)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어야 자신의 사고가 일관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진행 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사고는 순수하게 중립적 이지 도 않고 철저히 독립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혹은 인식론적으로 일관적 합리성을 의존하게끔 되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존재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고 이치에 맞지도 않게 된다.

 

위에서 반틸이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 없이는 이성과 사실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 생각하는 존재가 우연히 발생된 것이 아닌 것처럼 어떤 사실(fact)을 생각할 때 그 사실과 생각하는 주체 사이에서만 그 사실의 의미가 결정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과 다른 사실들과의 관계성도 생각해야 한다. 그 관계성은 그 사실들이나 주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또한 사실들과 주체 사이에서 결정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이 사실로 나타남에 있어서 그 사실을 설명하는 보편성(the universal)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래야 사실과 사실의 관계가 설명되고 그 사실들과 주체 사이의 관계도 설명된다. 이 보편성은 하나님이 친히 창조 세계에 두신 것이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이 궁극적 합리성(Rationality)이시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듯 추상적 개념의 합리성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아니다. 합리성의 기준과 원천과 근거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합리성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따라야 할 합리성이 따로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합리적 이 되시기 위해 그 합리성에 의존해야하며 그 합리성이 하나님보다 상위 존재가 될 것이며 자연히 하나님은 궁극적이시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궁극적 합리성이어야 한다. 궁극적 합리성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역시 그의 합리성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들 사이의 대화 소통이 가능하고 이해가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합리성을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전제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이성이나 논리나 과학이 우리의 전제를 합리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합리성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그에 관한 전제가 합리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가 오히려 이성과 논리와 과학 등을 합리적으로 만들어 주고 가능하게 해 준다. 왜냐하면 그 전제는 모든 사실들을 지으시고 가능하게 하시고 궁극적 합리성이신 하나님에게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궁극적 합리성이심을 부정하는 불신자들도 논리를 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자신의 논리로 하나님을 부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자신의 논리적 합리적 사고는 사실 하나님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고 심지어 하나님을 부정하는 논리도 하나님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합리적 사고를 하는데 그 하나님을 부인히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 이 말은 하나님은 단지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뜻도 아니요 사랑이라는 추상적 개념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뜻도 아니다. 사랑의 궁극적 기준과 근거와 정수(essence)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도 그 사랑을 배워야 하고 그 사랑을 따라야 하고 그 사랑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 아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피조 세계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지향하고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불신자도 사랑을 좋아하고 또한 사랑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치에 맞지 않는다. 궁극적 사랑이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사랑만 모방하는 것은 솔직하지 않은 것이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왜 사랑이 좋은지, 왜 사랑을 추구해야 하는지, 왜 사랑을 추구하게 되는지도 모르고 사랑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선(good) 이시다 부자 청년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예수님께 여쭈었을 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분이시나라(마 19: 17)" 말씀하신다. 여기 “선한”이란 헬라어 형용사는 ‘선’이라는 명사로도 쓰인다. 그러면 “어찌하여 선을 내게 묻느냐 오직 한분만이 선이시다”로 번역할 수 있다. 마태와는 달리 마가와 누가는 “선한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물음에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는 답으로 기록하고 있다. 부자 청년은 자기 나름대로 ‘선’에 대한 지식과 기준이 있었다. 스스로‘선’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청년이 갖고 있는 ‘선’을 먼저 거부하신다. 예수님은 심지어 자신이 ‘선’이 아니라 오직 한분 하나님만 ‘선’이시라고 말씀한다. 자신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라 선의 기준과 정수(essence)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말씀을 히는 것이다. 간접적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선이심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이면 누구나 이 부자 청년처럼 나름대로의 ‘선’에 대한 개념과 기준과 내용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선’에 하나님도 부합되셔야 하는 것처럼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은 일종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하나님 자신이 궁극적 선(good) 이시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이 부합하셔야 하는 선이 따로 있다면 그 선이 하나님보다 더 궁극적이며 진짜 신(神)이어야 한다. 물론 이 세상에 인간들이 판단할 수 있는 선의 모습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선이다. 그러 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good) 되심을 거부할 경우에는 그러한 선은 이치에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선의 진정한 의미와 내용도 모르고 선을 행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단지 선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일종의 모방을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공의(justice) 혹은 의(righteousness)이시다. 욥은 특별한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많은 고난을 당했다. 세 명의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욥은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고난을 당한다고 변론했다. 친구들은 어찌 전능하신 분이 공의를 굽게 하겠느냐며 욥을 핀잔했다. 이러한 논쟁 후에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 :4)"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전능성(38:18, 31; 39:9; 40:9), 전지성(38:5, 19, 33, 37), 합리성(38:36), 편재성(38:16; 41:34), 선하심(38:41, 영원성(38:4) 등에 관한 여러 질문들을 하신다. 하나님은 욥에게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40:2)",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40: 8)" 꾸짖으신다. 욥 개인의 의로 하나님의 판단을 부인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단지 욥이 따지고 싶어 하는 공의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하시지 않았다. 사탄이 찾아와서 내가 허락했다는 식의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단지 전능성, 전지성, 편재성, 합리성, 선하심, 영원성 등을 언급하시

면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말씀하셨다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음을 고백한다(42:1-2). 그리고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라고 자복하며 회개한다. 또한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의 죄악도 꾸짖으신다. 욥과 같이 이들 역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공의가 궁극적인 것으로 알았다 그 공의에 욥도 부합해야 하고 하나님도 부합되실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욥이나 세 친구가 생각하듯이 궁극적인 공의는 하나님을 떠나서 따로 있지 않다 하나님이 공의이시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전능, 전지, 편재, 합리성, 선하심, 영원성과 독립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함적(自含的, self- contained)’이시다. 모든 것이 자신 안에 포함되어 있다. 합리성, 사랑, 선, 공의, 지식, 지혜, 영원성 등 모두가 하나님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완전한 하나님을 잠시 옆에 제쳐놓고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고 검증한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합리성으로 인해 우리의 이성과 경험과 믿음이 합리적이 되는 것이며, 이성이나 경힘을 처음부터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성이나 경험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합리성을 전제하는 것이요 이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안에 포함되어 있는 선(good)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도덕적 절대성(moral absolute)을 의존하고 도덕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고 도덕적 판단을 한다. 인간 스스로 도덕성을 만들어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도덕적 절대성 때문에 가타부타 도덕적 판단을 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전제하는 것은 맹신주의(fideism)와는 거리가 멀다. 이 전제는 극히 합리적이다. 근거 없이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근거의 ‘절대적 필요성(absolute necessity)’을 내세운다. 어떤 진리 혹은 어떤 사실에 대한 절대적 필요성은 논리나 경험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제(presuppose)하는 것이다 즉 궁극적 출발점이요 기준이요 준거점(reference point)이다 예를 들어, 돌고래가 100미터 거리를 5초에 헤엄쳐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질 때는 돌고래의 1 미터 당 평균 속도, 10 미터 진행시의 가속력, 물의 깊이에 따른 부력, 돌고래의 몸체에 부딪히는 물의 저항 등을 측정하고 예측해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과학적 측정이 아니더라도 직관적으로 가늠하든지 또는 연역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돌고래가 물에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돌고래가 땅에 엎드려져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물이 이 증명이나 판단에 있어서 ‘절대적 필요성’이라는 것이다. 물을 전제하는 것이 맹신적이요 불합리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더욱이 돌고래가 물에서 수영할 때 물이 갑자기 증발해 버린다든지 물이 갑자기 모래가 된다든지 하는 일이 없을 것을 또한 전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의식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그 전제는 ‘절대적 필요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를 한다고 해서 그 전제가 비합리적이고 맹신적이라 할 수 없다. 전제가 아니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은 비합리적 혹은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비판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활동 존재론적, 인식론적, 윤리적 활동에 앞서 이러한 활동들이 이치에 맞고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전제하는 것은 결코 불합리하거나 맹신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필요성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