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시대 이해의 중요성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어 말라기까지 읽으면 구약시대의 내용은 끝이 납니다. 구약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역사를 아브라함부터 말라기까지 따지더라도 1700여년이 넘는 기간이기에 시대적 정황이 시대에 따리 바뀌었음을 생각하고 여러 가지 배경적 요소를 생각하며 성경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때나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 전과 바벨론 70년 포로시기와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머무는 시기 등의 사회, 문화적 변화가 많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마지막 선지서 말라기를 읽고 한 장을 넘기면 마태복음이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읽으며 말리기로부터 마태복음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중간시대 400여년이 있으며 이 기간 동안 일어난 세상의 역사가 성경의 땅과 유대인들의 역사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하며 읽는 성도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읽기 전 먼저 신구약의 중간시대에 일어난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해 주셨던 세상 역사와 유대인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살펴봅시다.
I. 신약시대에 영향을 준 중간시대
신약성경을 읽으며 1세기 당시 사회와 문화의 기본바탕에 헬레니즘 문화가 섞여 있다고 생각하며 성경을 읽는 독자가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혹자는 구약적, 유대적 배경 속에서 신약성경을 일고 그 바탕 위에 깨달은 말씀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 마씀을 살펴보아도 헬라니즘 문화의 영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복음서나 바울의 서신서를 보아도 곳곳에 그 영향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신약성경을 읽는 기본 바탕을 히브리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1세기 당시 사회는 히브리적 사고가 남아 존재했으나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에 의한 헬레니즘 사고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언급하신 ‘교회(에클레시아)’란 단어도 헬라어요 헬라적 배경을 가진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1세기 당시는 족장들의 시대나 사사시대, 왕정시대와는 많이 다른 사회, 문화적, 사상적 차이가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솔로몬 사후 남북으로 나뉜 완정역사는 왕과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김으로 심판을 받게 되면서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앗수르 왕 불(왕하 15:19, 대하 5:26)로 알려진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주전 734년 처음으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간 후,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정복되고 그들의 정책인 혼합정책으로 북이스라엘의 땅은 이방화 되었습니다. 남유다는 주전 605년, 597년 바벨론의 침략과 1, 2차 포로를 통해 유대 땅을 떠나 바벨론으로 가야 했고, 주전 586년 바벨론에게 완전히 점령되어 70년을 포로로 잡혀 바벨론에 머무르며 그들의 문화와 사상에 영향을 받아야 했습니다.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나갈 때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에 의해 약속의 땅에 돌아오게 되었으나 유대인들의 삶은 포로 이전의 삶과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구약성경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을 건설하는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의 삶을 기록하지만,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언급이 없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400여년의 시간 단절이 있는데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자만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400년의 시간도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 예언하게 하셨고 예언하신대로 인류의 역사에 중심에 계시며 이끄셨고, 그 이끄시는 역사는 성경의 배경이 되는 유대 땅에 많은 영향을 끼쳐 많은 변화가 있게 하였습니다. 바벨론과 바사(페르시아)의 통치를 이어 그들을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를 중심한 그의 후계자들은 헬라 제국을 형성하고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하였습니다. 헬라를 이어 등장한 로마는 지중해 주변을 정치적으로 통일하였으나 헬라의 문화는 받아들였고 통치지역에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하였는데 유대 땅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헬라니즘 문화는 자기 나라를 ‘헬라스’라고 부르고 자신들을 ‘헬린’이라 부르던 헬라 사람들로부터 나타납니다. 헬레니즘은 주전 5세기 아테네에서 발달했던 헬라 본토의 사상, 예술, 상업을 말하는데 그 기원은 아테네 사람들입니다. 이 헬라의 문화를 지중해 동부 연안의 사람들이 받아들였고 더욱 발전시켰는데 헬레니즘 문화입니다. 헬레니즘 문화 전파의 중심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헬라 문화를 알게 되었고 심취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냐를 떠나 동방을 정복하며 헬레니즘 사고를 퍼뜨렸고 그 영향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유대 땅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는 주후 7세기 이슬람이 나타나고 아랍이 점령하기까지 약 천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배경이 되는 유대 땅과 유대인들은 그들을 통치하는 나라들에 의해 종교,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시대를 거치며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공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해야 했고, 헬라와 로마의 통치를 받으면서 아람어 대신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습니다. 자신들의 민족 언어인 히브리어는 수 세기 동안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주전 2세기경 구약 성경마저 헬라어로 번역된 70인경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가 통치하였지만 헬라어가 공용어였고 아람어가 함께 쓰였습니다.
2. 바벨론 통치 시대: 포로기의 삶
주전 734년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이해 처음으로 북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간 후, 주전 586년 남 유다의 바벨론 포로까지 발생한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는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지 못했고 생활 또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금하는 음식들을 먹어야 했으며 종교와 문화가 다른 삶에서 오는 유혹을 받아 율례와 계명을 어겨야 했습니다(단 1:5, 8).
여호와 신앙을 성전 중심으로 지켰던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가 금지됨으로 여호와 신앙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었고, 포로지의 이방종교의 사상, 문화의 영향으로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더구나 제국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생활 속에서 히브리어 사용이 점점 줄어들었고, 이와 함께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갔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조상의 신앙으로부터 멀어 지는 무리들 사이에 반목이 생기기 시작했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옳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가 형성되고 파벌이 생기게 됩니다.
이방 종교의 요소인 점성술과 신비주의는 포로지 유대인의 삶 속에 서서히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도 처음에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통적 유대의 가르침 속에 묻어 들어 온 이방사상은 결국 이방신앙의 입장에서 정통적 유대의 가르침을 재해석하는 신비주의자들이 나타나게 만들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빛의 세력과 어두움의 세력 사이에 싸움이 계속되는 곳이 우주’라는 페르시아인들의 견해를 받아들였고, 귀신과 천사에 대혹되어 이방 귀신의 세력을 인정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배성들의 생활에 직접 임재하시기 보다 배후에서 활동하는 강력한 힘이라 생각하게 되는 변질된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3. 바사(페르시야)의 통치시대: 포로귀환 후의 삶
포로시대에 포로지에서 받은 이방의 영향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유대 땅에 살면서도 백성들 사이에 계속 영향을 끼쳤는데 심지어 종교지도자인 레위인들과 제사장이 영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1차 포로귀환 하여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성전을 재건했습니다(다리오 6년 아달월 3일, 주전 516년, 스 6:15). 그러나 그 후 58년이 지난 2차 포로귀한 때까지도(아닥사스다 7년 제 5월 1일, 주전 458년, 스 7:8-9) 이방 문화의 영향은 계속되었습니다(스 9:1-3). 에스라는 성전 앞에 엎드려 죄를 자복하며 울며 회개하게 하였고(스 9:1-15) 많은 백성이 모여 심히 함께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이후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이방인 아내와 그 소생까지 내어 보내기로 약속하고 3개월을 조사한 후(스 10:3, 10-12, 16-44) 가족과 이별하는 아픔을 감수하며 신앙을 개혁하였습니다(스 10:1-44). 에스라를 통해 이방 풍습을 벗어버리고 바로 잡기는 했지만 이방 문화와 사상의 영향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습니다.
1차 포로귀한 후 우요곡절 속에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져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회복 되었고, 2차 포로귀한 후 에스라를 통해 신앙의 회복은 이루었지만, 아직 예루살렘 성의 성벽이 건축되지 않아 정결한 땅으로 구분되지 모했습니다. 페르시아 수산궁에 거하며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으로 섬기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훼파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일 동안 금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느 1:4-11). 이후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이 도움을 얻어 3차 포로귀환 하는 지도자로 유대 땅으로 왔고(아닥사스다 20년, 주전 444년) 느헤미야의 지도를 통해 52일 만에 성벽은 재건되었습니다(아닥사스다 20년, 엘룰월 5일, 주전 444년). 성벽을 재건한 후 모인 유대인들은 에스라를 통해 율법을 듣고 회개했고(느 8:1-12), 초막절을 규례대로 지켰으며(느 8:13-18),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기로 맹세하고 언약을 갱신하고(느 9:1-3, 38), 백성들의 1/10을 예루살렘에 이주시키고(느 11:1), 이스라엘 안에 있는 이방인을 분리했습니다(느 13:1-3).
느헤미야는 정한 기한의 유대 총독 임기를 마치고 바사(페르시아)로 돌아가고(느 2:6) 느헤미야가 돌아간 후 유대인들이 다시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느 13:4-5). 느헤미야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아닥사스다 32년, 느 13:4-5) 개혁을 단행했습니다(느 13:4-28). 느헤미야는 도비야를 쫓아냈고(느 13:4-9), 안식일을 거룩하게 철저히 지키도록 성문을 닫았으며(느 13:15-22), 이방 여인과 통혼한 사람을 책망하고 쫓아냈습니다(느 13:23-28). 이 느헤미야의 개혁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기록의 마지막입니다. 이후 신구약 중간시대가 이어지는데 성경은 침묵합니다.
3.1. 헬라통치 시대
바사(페르시아) 제국 이후에 등장하는 나라는 알렉산더가 이끄는 헬라·마게도니아 제국입니다. 주전 359년 필립 2세(Philip II)는 젊은 나이에 마케도니아의 새 왕으로 등장합니다. 필립 2세는 헬라의 한 도시국가인 데베와의 싸움에서 포로가 됩니다. 그러나 에파미논다스에게 전쟁의 여러 전술과 전법을 배웠고 응용하여 후에 헬라의 도시국가들을 외교와 무력으로 통일합니다. 필립 2세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모든 헬라의 도시국가들의 대표들을 고린도에 모아 신헤드리오(Synhedrion)이란 회의를 열고 헬라 연합의 대표로 선출됩니다. 그는 ‘아티크 헬라어(attic, 고대 아테네에서 사용한 헬라어)’를 국가의 공식 언어로 채택했고 헬라 반도의 모든 주민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 언어는 ‘코니네 헬라어(koine, 공통적 이란 뜻)’라 불렀습니다.
필립은 주전 336년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20세가 되었을 때 암살됩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주전 334년 필립을 이어 왕이 된 후 내부 반란을 진압한 후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를 정복합니다. 그는 다르다넬스 해협(터키의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는 해협)을 넘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첫 전쟁을 벌여 승리한 후 소아시아를 손에 넣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소아시아와 지금의 터키 전역을 차지한 후 페르시아와의 두 번째 전투를 이수스(Issus, 터키의 동남쪽에 있는 평야)에서 벌였고 승리하여 팔레스타인, 애굽을 장악하게 됩니다. 겨울을 애굽에서 보낸 알렉산더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기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와 세 번째 큰 전투를 벌였는데 승리하여 오늘날 아프카니스탄과 서 파키스탄으로 알려진 지역을 정복합니다. 이수스 전투 후 섬나라 두로를 정복하기 위해 시간을 들였지만 파죽지세로 페르시아를 물리친 알렉산더는 계속하여 인도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주전 323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죽게 됩니다. 알렉산더가 다스리던 헬라는 안티고누스(Antigonus)에 의해 잠시 통치되지만 주전 301년 입수스(Ip년) 전토에서 안티고누스가 죽은 후, 4명의 장군들에 의해 분할 통치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기 때(고레스 3년, 주전 536) 힛데겔 강가에서 3주간의 금식기도 중 헬라 제국에 대한 이상을 받았습니다(단 10:1-6) 다니엘은 하나님께로부터 이상을 받아 다니엘 11장에 기록합니다. 다니엘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헬라 제국이 강력한 정복전쟁이 시작되고, 알렉산더가 젊은 나이에 죽은 후 그의 제국은 4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통치되며, 팔레스타인과 애굽을 차지한 남방의 프톨레미 왕조와 시리아 지역을 위시한 북방 셀류커스 왕조 사이에 전쟁이 있으며,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가 유대 민족을 억압하고 마침내 비참한 최후를 당할 것을 기록합니다.
3.1.1. 알렉산더 대제의 통치와 분열
알렉산더는 주전 356년 마게도니아의 펠라에서 필립 2세와 올림피아 사이에서 왕족으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 아테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헬라의 문화를 기이 사랑하게 된다. 알렉산더는 아버지 필립이 주전 338년 아테네와 테베의 반란을 진압할 때 18살의 나이로 참여해 전쟁터를 누비며 두각을 나타냈다. 주전 336년 알렉산더가 20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 필립이 암살되었고,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새 왕으로 등극하며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이 과정에서 테베를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헬라 문화를 깊이 사랑한 알렉산더는 헬레니즘 사상을 널리 전하기 위해 동방원정 길에 오른다. 주전 334년 봄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르다넬스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진격하여 그래니커스 강가에서 바사(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친다. 이 승리로 사데와 에베소, 밀레도 등이 알렉산더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계속하여 주전 333년 부르기아의 수도인 골디엄을 차지했고, 수리아와 팔레스틴으로 가는 좁은 길목이 있는 길리기아를 정복하기 위해 이수스 평야에서 다리오의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친다. 이 전쟁으로 주전 332년 알렉산더는 수리아, 팔레스타인, 애굽 등지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는데, 섬나라 두로의 페니키아인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신경을 꺼야 했다. 그는 애굽의 나일강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두로를 대신할 상업중심지로 도시를 만들고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했다.
겨울을 애굽에서 보낸 후 계속하여 주전 331년 알렉산더는 다시 동방으로 진격하여 시리아 사막을 가로지르며 페르시아군을 물리쳤고 다리우스 3세를 아벨라 전투에서 격파한 후 수사, 바빌론, 엑바타나 등지를 점령하였고, 주전 330년 페르시아만 부근의 도시로부터 북쪽과 동쪽으로 진격하였고, 주전 329년 힌두 쿠쉬 산맥을 가로질러 아프카니스탄을 지나 백트리아와 소그디아나 지역을 점령했다. 주전 327년 후반 인더스강 가까이에서 승리했지만 큰 피해를 입은 후 엑바타나로 돌아왔다. 그는 아라비아 정복을 위한 준비를 하던 중 말라리아 병에 걸려 주전 323년 3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그의 제국은 잠시 안티고누스가 통치하였으나 안티고누스가 죽은 후 4명의 장군에 의해 분할 통치된다. 카산더는 원래의 헬라 지역인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지역을, 리시마쿠스는 소아시아 지역을, 프톨레미는 애굽과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남부지역을, 셀류커스는 북부 수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하여 통째했다. 유대인이 사는 팔레스타인은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커스 왕조에 의해 차례로 통치를 받는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했다고 한다.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던 알렉산더는 그를 맞이하러 나온 대제사장 시몬의 두건에 쓰여진 하나님의 이름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했다고 하는데 이전에 그는 꿈에서 그 두건을 보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그 후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유대인들에게 자기 지역을 다스리는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허락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코엘레-시리아(Coele-Syria)에 편입했고 안드로마코스를 총독은 임명했는데 그는 사마리아에 살았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유대인에게 특권을 준 것을 시기하는 사마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의 지블 불태워 그를 죽였다. 알렉산더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마케도니아 사람들을 이주시켰고 성을 재건하여 극장과 거대한 공공건물 등을 건축하고 헬라 문명의 전초기지를 만들었다. 사마리아가 앗수르의 정책에 의해 이방인과 혼혈되어 이방화된 후 다시 알렉산더에 의해 철저하게 이방화된다.
3.1.2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하의 유대인
프톨레미 왕조는 주전 323년 프톨레미 1세(Ptolemy I)가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정하고 아테네 못지않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되도록 노력하며 애굽, 팔레스타인, 수리아 남부지역, 그리고 현재 터키의 동남부지역의 약간을 통치했다. 유대는 프톨레미 1세가 주전 320년 예루살렘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 주전 198년까지 프톨레미 왕들의 통치를 받았다. 프톨레미 왕조는 유대교를 관대하게 대했다. 이에 유대는 대제사장의 지도하에 자치권을 행사하며 살았고,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의 구레네 지역과 특히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여 살았다. 헬라도시에 이주하여 사는 유대인들은 당시의 공용어인 코이네 헬라어를 자기들의 언어로 채택했다. 이들은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전할 때 코이네 헬라어를 사용하였고 헬레니즘 문학 형태와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에 맞는 방법으로 전도하였다. 공용어인 코이네 헬라어이 사용과 이방인들과의 빈번한 접촉은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과 생활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프톨레미 왕조는 알렉산드리아를 아테네와 버금가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되도록 하기 위해 바로의 등대를 세우고 도서관을 만들어 당시 많은 문학작품들을 수집하고 소장하였고 미술과 문학활동이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하게 했다. 프톨레미 왕조의 헬레니즘 문학정책의 성과 중의 하나가 ‘70인역(Septuagint)’의 바간이다. 70인역은 히브리어 성경을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프톨레미 2세(필라텔푸스)의 후원으로 주전 3세기경 이루어졌다. 이 번역 작업으로 지중해 연안의 지식인들은 70인역을 통해 구약성경을 알게 되었다. 70인역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의 사상과 어휘를 연결시켜 주는 고리 역할을 했는데 번역 동기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당시 위대한 기록을 헬라어로 보존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프톨레미 6세 때 레온토폴리스에 오니아스 4세에 의해 우대인 성전이 세워진다. 오니아스 4세는 셀류커스 왕인 안티오쿠스 4세가 주전 174년에 야손의 뇌물을 받고 대제사장직을 줄 때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나게 한 오니아스 3세의 아들로 사독계열의 제사장이다. 오니아스 4세는 주전 164년 알키무스가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에 임명되던 해 애굽으로 이주하였다. 애굽의 레온토폴리스에 세워진 유대인 성전에서 오니아스 4세 이후 사독계열의 대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의식이 금지되기 까지 23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사독계열의 제사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의 레온폴리스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분리주의자들의 거처로 인식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필로(Philo)처럼 정기적으로 ‘조상의 성전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3.1.3. 셀류커스 왕조의 통치하의 유대인
셀류커스 왕조는 주전 312년 셀류커스 1세가 수도를 안디옥에 두고 북부수리아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치함으로 시작 했다. 셀류커스 왕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은 안티오쿠스 3세였는데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기 위해 프톨레미 왕조와 자주 충돌하였다. 마침내 안티오쿠스 3세는 프톨레미 5세를 팔레스타인의 상요단강 부근의 파네이온에서 물리침으로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차지하게 되어 유대는 주전 198-164년까지 셀류커스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된다.
프톨레미 왕조는 유대교와 유대인의 관습과 전토에 관대했던 반면, 셀류커스 왕조는 유대와 유대인들에게 헬레니즘 문화를 강력하게 전파하려고 했다. 한편 유대가 셀류커스의 통치에 들어 rs지 얼마 되지 않아 셀류커스의 안티오쿠스 3세는 에게해 지역으로 진군하던 로마의 ‘루키우스 스키피오’ 장군에게 주전 190-188년 소아시아의 마그네시아에서 대패한다. 스키피오 장군은 안티오쿠스 3세의 아들 안티오쿠스 4세를 볼모로 로마로 잡아가고, 아파미아 평화조약을 맺어 서부 소아시아의 좋은 여토을 빼앗고 엄청난 배상금을 12년 분할로 지불하도록 했다.
셀류커스 4세는 아버지 안티오쿠스 3세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그는 재무장관 헬리오도루스를 시켜 팔레스타인을 두루 다니며 강제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후에 셀류커스 4세는 자신이 임명한 헬리오도루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동생인 안티오쿠스 4세가 왕이 된다. 안티오쿠스 4세는 사독계 대제사장인 오니아스 3세의 동생 야손이 많은 돈과 유대를 더욱 빨리 헬레니즘화 하겠다는 약속을 하였기에 그를 대제사장에 임명해 주었다. 이후 주전 171년 메넬리우스는 사독 계열이 아닌데도 왕에 더 많은 돈을 제공학 야손 대신 대제사장에 임명된다. 이후 예루살렘에는 사독계 대제사장이 사라지게 되었고 대제사장의 자리가 돈을 주고 사는 자리가 되었다.
프롤레미 6세는 안티오쿠스 4세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했고, 안티오쿠스 4세는 주전 170년 프톨레미 6세를 공격한다. 프톨레미 6세는 포로로 잡혔으나 프톨레미 왕국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안티오쿠스 4세가 왕위를 회복시켜 준다고 하며 화친을 청하자 충성한다고 맹세하며 조약을 맺는다(왕위를 회복하고 난 프톨레미 6세는 다시 대항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애굽에서 수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을 들려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성ㅅ에 들어가 분향단과 등대를 파괴했다.
왕위를 회복한 프톨레미 6세는 다시 안티오쿠스 4세를 대적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부친 안티오쿠스 3세가 로마에게 에게해 지역을 잃은 것을 대신하여 애굽을 셀류커스에 병합하려고 2차로 애굽을 침공했다. 그러나 성공 단계에서 로마의 간섭으로 무산되었다(주전 168년). 이 소식은 유대에 전해졌고 유대인들은 야속 대신 왕이 임명한 대제사장 메넬리우스를 축출하려고 시도했다. 애굽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던 안티오쿠스 4세는 이것을 반역으로 간주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헐고 성전 보물을 약탈했다. 이어 성전법을 폐지하고 유대인의 독특한 종교 예식을 금하였다. 메넬라우스 통치 하에 성전은 시리아의 신 ‘바알 샤멤(Ba'al Shamem: 천상의 주)’과 동일시되는 올림피아의 제우스신 제단으로 바뀌었다. 3년간(주전 167년 기슬레브월에서 주전 164년 기슬레브월까지) ‘멸망의 가증한 것(단 8:13, 9:27, 11:31, 12:11, 막 13:14)’이 성전을 지배하였다.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인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악을 행했다. 그는 이방인들이 성전 안에서 온갖 방종과 향락을 일삼게 하였고 성전 경내에서 창녀들과 놀아나고 부녀자들을 농락하였다(마카비하 6장 3-4).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을 높여 ‘에피파네스(Epiphanes: 신이 현현했다)’라 부르게 하였는데 스스로 신보다 크다 하여 자신을 섬기게 했다(단 11:37). 안티오쿠스 4세는 내장이 썩어 들어가 앓다가 허무하게 죽게 된다.
4. 마카비 통치의 시대
안티오쿠스 4세가 내린 칙령에 대해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복종하기를 거절해 순교를 택해 죽기도 했고 군사를 일으켜 셀류커스 왕조에 대항하기도 했다. ‘모데인’에 살던 하스몬 가문의 늙으 제사장 맛다다아는 우상을 세우고 제물을 드리라는 관리들을 죽이고 제단을 부순 후 다섯 명의 아들(요한, 시몬, 유다 마카비, 엘리아살, 요나단)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투쟁을 시작했다. 맛다디아는 셀류쿠스와 전쟁을 하기 위해 유대 산지로 들어가 게릴라식 전투를 했다. 천재적인 전법을 쓰는 아들 유다 마카비의 지도하에 셀류커스 군대와 곳곳에서 승리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다. 맛다디아는 혁명 초기인 주전 166년 1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프라테스 강 넘어 읽은 영토를 되찾기 위한 계획을 세운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 지역에 군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안티오쿠스 4세는 맛다디아를 이어 지도자가 된 유다 마카비(뜻: 쇠망치), 또한 그와 함께한 유대 반란군들과 타협했다. 그가 내린 유대교 종교 예식에 대한 금지 칙령은 폐기되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한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가 제단 위에 세웠던 가증스런 우상을 부수어 제거하고, 성소에는 예전과 같이 높은 성병을 쌓았으며, 성전을 율법의 규례대로 정화한 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제사를 드렸다(주전 164년 기슬레브월 25일). 안티오쿠스는 이 소식을 들은 후 병석에 누웠고 자신이 한 일을 뉘우치고 죽었다. 이후 성전을 정화한 것을 기념하여 ‘하누카(Hanukkah, 봉헌)’라는 이름의 ‘빛의 절기’를 8일 동안 지켰는데 신약성경에서 ‘수전절(요 10:22-23)로 등장한다.
하스몬 가문의 사람들은 힘으로 얻은 종교의 자유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20여년 이상을 투쟁하는데 셀류커스 제국 내의 내분은 큰 도움이 되었다. 지도가 유다 마카비는 주전 163년 데메드리오 왕을 설득하여 종교적 자유를 달라고 요청하였고 싸움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대제사장 알키무스가 마카비의 승리에 대한 보복으로 60명을 처형하려하자 다시 무장하게 된다(마카비상 7장 13-20). 계속되는 전투 가운데 유다 마카비의 형제인 엘리아살은 주전 163년 ‘벧사카리아스’전투에서 싸우다 코끼리에 압사되어 죽었고 요한은 주전 161년 ‘아닷사’ 전투에서 죽었으며 지도자였던 유다 마카비는 주전 160년 ‘엘리사’ 전투에서 전사했다.
유다 마카비가 죽은 다음 막내인 요나단이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군대를 재정비하여 여러 싸움에서 승리하며 팔레스타인의 북동지역과 요르단 동편 산지를 점령하였다. 이에 셀류커스 왕으로 자처하는 알렉산더 발라스는 요나단을 끌어안기 위해 주전 155년 그에게 대제사장직을 선물했고 주전 150년에는 총독으로 인정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심각한 의심을 갖게 하였다. 대제사장직의 합법적인 계승은 하나님의 율법에 속해 있기 때문이었다. 요나단은 주전 143년 셀류커스 왕조의 반대파 트리포 장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요나단을 이어 지도자가 된 시몬은 맛다디아의 아들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는 셀류커스 왕조와 힘으로 맞서지 않고 외교적으로 문제를 풀었다. 마침내 그는 주전 142년 유대에서 셀류커스 왕조를 완전히 몰아냈다(마카비상 13:41).
5. 하스몬 왕조 시대
주전 142년 셀류커스 왕조를 대항해서 처음으로 사움을 시작했던 제사장 맛다디아의 아들 시몬으로부터 시작하여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되는 주전 63년까지를 하스몬 왕조 시대라 한다. 시몬은 유대로부터 셀류커스의 세력을 몰아내고 유대를 국가로 독립시켰다. 이때 ‘민중회(Popular Assembly)’는 시몬이 자기들 나라의 통치와 군대 통수자가 될 뿐 아니라 ‘신뢰할 만한 선지자가 나타날 때까지 영원토록 제사장’이 되리라고 선포했다. 이 말은 사독 계통의 적당한 후보자가 없는 경우에 시몬이 세습해 내려가는 대제사장직의 창설자로 인정된 것을 의미한다.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인정된 후 그와 그의 자손을 통한 대제사장 직무 담당은 이후 100여년 동안 지속된다.
하스몬 시대를 연 시몬은 국제 정세를 살핀 후 당시 부흥하는 로마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천 므나가 되는 황금 방패를 만들어 로마의 집정관 루기오에세 보내어 동맹을 맺는다. 로마는 ‘유대의 독립을 인정하고 보장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프톨레미왕과 여러 나라에게 보냈고 복사본을 대제사장인 시몬에게 보냈다(마카비상 15장 15-16).
시몬은 나라를 차지하려는 그의 사위인 톨레미와 그의 부하들에게 주전 134년 연회를 베출던 중 살해 당했고 그의 왕위는 아들 힐카누스 1세(주전 134-104)에게 이어졌다. 힐카누스가 통치를 시작한 첫 해 셀류커스왕 안티오쿠스 7세는 힐카누스의 아비 시몬에게 당한 패배를 이유로 그의 제위 4년에 유대를 황폐하게 만들고 예루살렘을 포위 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동안 장막절 절기가 돌아왔고 힐카누스는 안티오쿠스 7세에게 서신을 보내 장막절 절기 동안 전쟁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안티오쿠스는 선뜻 제안을 받아들였고 막대한 예물, 즉 뿔을 도금시킨 황소들과 각종 향료들과 금장과 은장을 보냈다. 이에 사람들은 그를 ‘경건한 왕 안티오쿠스’라고 불렀다. 힐카누스는 안티오쿠스와 화친조약을 맺고 다윗의 무덤에서 3,000 달란트의 돈을 꺼내 안티오쿠스에게 지불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3권 8장 1-4).
힐카누스 1세는 할례를 장려하고 율법을 준수하며, 다윗 왕국의 회복을 목표로 땅을 정복했다. 힐카누스는 안티오쿠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리아 지역의 여러 도시를 차지했다. 이후 이두매를 점령하고 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하고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도록 했다. 이두매 사람들은 유대종교와 유대인의 생활 양식을 받아들였고 이두매는 점점 유대화 되어 갔다. 계속하여 힐키우슨느 세겜, 그리심, 구다를 점령하고 요새화된 사마리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3권 9장 1-3).
이 사건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관계는 더욱 좋지 않은 관계가 되었다. 힐카누스의 아들 아리스코불루스 1세(주전 104-103년)와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 103-76년)는 아버지의 정복 전쟁을 계속 이어 받아 솔로몬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다. 그러나 땅이 넓어지고 누릴 수 있는 권력이 커질수록 부패하여 처음의 뜻을 잊고 자녀들의 이름을 헬라식으로 바꾸고, 왕실도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게 했다. 힐카누스는 로마의 우호 동맹을 체결하고, 이집트의 프톨레미와도 좋은 관계를 맺었다.
힐카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뒤를 이어 왕이 되는데 그는 자신을 왕이라 칭했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2년을 통치하고 죽는다. 그는 어머니를 감금하여 굶어 죽게 했고 동생 안티고누스도 죽였다. 그는 이두래아 사람들과 전쟁하여 좋은 땅을 얻었고, 그 땅 주민에게 할례와 율법을 지킬 것을 강요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3권 11장 1-3).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자 그의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그가 가두어 두었던 그의 형제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형제인 알렉산더 얀네우스를 왕으로 삼고 그의 아내가 되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 103-76년)는 왕이 되어 시리아에 있는 해안 도시를 공격했고 주변의 많은 도시들을 정복했다. 그는 죽기까지 주변 도시를 정복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폭력과 강압 정책을 사용했으며, 하스몬 왕조의 대제사장직 수행에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을 핍박했다. 바리새인들은 셀류커스 왕조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고 얀네우스는 주동자 800명을 십자가 형에 처했다. 그는 안티파스를 이두매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얀네우스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왕권을 아내 알렉산드라에게 물려주었다.
알렉산드라(주전 76-67년)는 그녀의 아들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다른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군대 지휘권을 주었다. 알렉산드라는 힐카누스에 의해 폐지되었던 바리새인의 전승적 규정들을 복귀시켰는데 바리새인들이 그녀의 통치 기간에 권력을 얻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죽자 그의 두 아들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다. 사두개인들의 지지를 받던 차자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형 힐카누스 2세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힐카누스는 조용하며 무능력한 사람이었는데 안티파터란 친구가 있었다. 안티파터는 동생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이 된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유대인들을 선통했고 힐카누스를 설득하여 아라비아 왕 아레타스 3세의 도움을 청해 5만 명의 군대를 지원받아 아리스코불루스의 군대를 무찌르고 성전을 공격해 아리스토불루스를 포위한다. 이에 아리스토불루스는 400달란트를 폼페이 장군이 수리아로 파송한 스카우르스 장군에게 주어 아레타스로 하여금 성전에 대한 포위 공격을 중지하도록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는 하스몬 완조의 정치에 개입하게 된다. 폼페이가 다메섹으로 왔을 때 아리스토불루스는 500달란트 상당의 황금으로 만든 포도나무를 선물했고 힐카누스도 자기 대신 안티파터를 사절로 보냈다. 폼페이는 판단을 유보하고 나바티안 문제를 해결하고 유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하며 그때까지 평화를 유지하라 전했다.
이때 아리스토불루스는 폼페이가 나바티안을 점령한 후 힐카누스를 도와주리라 생각하고 알렉산드리온 요새를 건설한다. 이 소식을 들은 폼페이는 군대를 모아 진격한다. 이에 아리스토불루스는 항복하고 감옥에 갇힌다. 그러나 강경론자들은 항복하기를 거절하고 폼페이와 맞서서 싸울 것을 천명한 후 성전을 점령하고 로마의 포위에 대히했다. 폼페이는 성을 포위하고 성안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들은 폼페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폼페이는 성전을 포위한지 3개월 만에 함락시켰다. 폼페이는 아리스토불루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성전 책임자에게 성전을 청결케 한 후 하나님께 감사 드릴 것을 지시했고 힐카누스의 대제사장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예루살렘과 성전이 이러한 재난을 당하는 것은 힐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의 다툼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유대는 자유를 상실하고 로마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수리아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어야 했다.
6. 로마통치 시대.
로마는 주전 270년경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강력한 국가가 된다. 이후 주전 262-146까지의 카르타고와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 주전 214-148년 헬라와 4차에 걸친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지중해 일대를 장악한다. 계속하여 주전 64년 수리아 지역을 점령하고 주전 63년 셀류커스 왕조를 합병한 후 주전 30년에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까지 로마의 속주로 만든다. 이때부터 유대 지역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제국의 통치는 주전 59년 줄리우스 시저, 폼페이, 크라수스가 제 1차 삼두정치를 형성한다. 주전 54년 폼페이가 시저와 전쟁을 벌이는 사이 크라수스는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성전의 재물을 약탈한다. 이후 주전 53년 파르티아와의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한 후 줄리우스 시저와 폼페이가 권력 다툼을 한다. 줄이우스 시저는 주전 45-44년 원로원 세력을 물리치고 단독으로 권력을 행사했으나 주전 44년 암살 당하고 시저가 암살 당한 후 주전 43년 안티파터도 죽임을 당한다. 시저의 친구인 안토니는 시저의 대적들을 북부 그리스에서 물리쳤다. 이후 안토니는 안티파터의 두 아들 헤롯과 파사엘을 갈릴리 분봉왕으로 삼았다.
시저가 죽은 후 옥타비안, 안토니, 레피두스가 영토을 분할하여 다스리는 제 2차 삼두정치(주전 43-31)가 시작된다. 옥타비안과 안토니는 레피두스를 실각시킨 후 격렬하게 대립한다. 파르티아 사람들은 주전 40년에 하스몬 사람들이 재집권을 위한 싸움을 일으켰을 때 그들을 도와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침공한다. 헤롯은 맛사다로 피했으나 형 파사엘은 체포된 후 자살했다. 헤롯은 가족을 마사다에 남겨둔채 로마로 갔고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임명을 받는다. 주전 37년 그는 로마 군대를 지원받아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 안티고누스 3세가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왕으로 등극한다.
주전 31년 옥타비안이 안토니와 프톨레미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의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무찌르고 전 로마를 통치한다. 안토니를 지지하던 헤롯은 이때 안토니의 지시대로 나바티안과 싸웠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안토니가 패하자 주전 30년 헤롯은 옥타비안을 만나 자신의 생명과 왕위를 지켜달라고 부탁했고, 옥타비안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 계속하여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게 했다. 옥타비안은 주전 27년 아우수스투스(Augustus, 존엄한자)라는 칭호를 받고 로마의 1대 황제가 된 후 주후 14년까지 로마를 통치한다. 로마인들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작으면서도 문제가 많은 지역으로 생각했다.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정치적으로 변화가 많았던 급변의 시기에 유대 지역은 힐카누스 2세와 안티고누스 2세, 헤롯 대왕이 차례로 다스린다. 힐카누스 2세(주전 63-40)가 로마의 통치시기에 유대 지역을 다스리게 된 것은 로마의 장군 폼페이가 주전 63년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반로마 정책을 폈던 힐카누스 2세의 동생 아리스토불로스 2세를 제거하고 그를 대제사장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폼페이는 이두매 지역 총독이었던 안티파터를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로마를 지지했기에 주전 55년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비공식적 유대의 통치자가 되게 한다. 이후 안티파터는 시저와 폼페이가 싸울 때 폼페이가 패하기까지 폼페이를 도왔으나 폼페이가 패하자 시저에게 충성한다. 주전 47년 시저가 프톨레미와의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안티파터와 힐카누스 2세는 시저를 지지하고 도와준다. 전쟁에서 승리한 지저는 힐카누스에게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했고, 안티파터를 유대 지역 로마 집정관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주전 44년 시저가 암살되고, 주전 43년에는 안티파터가 말리쿠스라는 열심당원에 의해 독살된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이었던 안티고누스(주전 40-37년)는 주전 40년 파르티아 사람들을 끌어들여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그는 자신의 큰 아버지 힐카누스 2세의 귀를 잘라 영원히 제자장이 될 수 없게 만들고 추방한다.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은 가족들을 데리고 맛사다로 피했으나 형 파사엘은 체포된 후 자살했다.
로마로 도망갔던 헤롯(주전 37년- 주후 4년)은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임명 받는다. 주전 37년 그는 로마 군대를 지원받아 안티고누스가 다스리던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대의 왕이 된다. 이때 헤롯은 안티고누스와 많은 사두개인들을 처형했다. 헤롯이 자신을 왕위에서 몰아내려는 세력에 대해 행한 행위는 유명하다. 그는 처남이었던 젊은 아리스토불루스를 여리고에 있는 지신의 수영장에서 익사하게 만들었고, 삼촌 요셉을 간통죄로 처형했으며, 힐키누스 2세를 나바티아 사람들과 내통했다고 모함했다. 헤롯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 많은 아내와 자식들을 죽였다. 헤롯은 율법을 여러 차례 어겼다. 그는 헬라의 문화를 끌어드려 예루살렘에 경주와 체육활동을 할 수 있도록 경기장을 만들었다. 주전 22년 아우구스투스(성경에 아구스도)를 존경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자녀들을 로마에 보내 교육을 시킴으로 로마의 영향을 받게 하였다. 반면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주전 20년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다.
7. 다니엘이 본 이상과 중간시대의 역사
구약 성경은 말라기 선지자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400여년의 역사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이 꿈을 꾸게 하시고 다니엘을 통해 그 뜻을 알게 하셨으며, 다니엘의 3주간의 금식기도를 통해 기름부음 받은 자가 나타나기까지의 일들을 기록하게 하셨다. 다니엘서는 세계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니엘 2장에서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이 꾼 한 큰 신상과 뜨인 돌에 대한 꿈(단 2:1-45), 다니엘 7장의 네 가지 짐승에 대한 이상(단 8:1-27), 다니엘 9장의 칠십 이레(단 9:24-27), 다니엘 11장의 북방 왕과 남방 왕 사이에 있는 전쟁에 대한 이상(단 11:1-45)은 당시 바벨론이 지배하던 이후 세계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 보여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다니엘서를 읽는 자는 종말에 대해서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14-16). 이제 다니엘서에 나타난 내용과 앞에서 살펴본 바벨론, 메데와 바사,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시대의 역사를 비교해서 살펴보겠다.
주전 603년 통치 2년이 되는 해 느부갓네살은 꿈에서 머리는 정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종아리는 철인 큰 신상을 보았으나(단 2:31-35) 꿈을 잊어 버렸다. 어느 누구도 꿈을 찾지 못하고 해석도 하지 못할 때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상으로 해석하기를 ‘느브갓네살 왕이 곧 금머리’로(단 2:38) 바벨론을 언급한 것이라 말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바베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렘 41:7)’이라고 말한다. 바벨론은 다니엘 7장에서는 사자로 언급된다(단 7:4).
두 번째 은에 대해서는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라고 해석했는데 바사(페르시아)를 언급한 것이다. 바사는 최초로 은을 화폐 단위로 한 세금정책을 실시한 나라였다. 다니엘 7장에서는 곰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다니엘 8장에서는 수양으로 표현된다. 두 구절에서 곰이 몸 한편을 드는 것과 한 뿔이 다른 뿔보다 긴 것은 메대의 다리오가 잠시 통치하다 바사의 고레스에 의해 합병되어 통치될 것을 의미한다. 고레스는 바사로 통일 왕국을 이룬 후 고백하기를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라 말하며 포로로 끌려왔던 이스라엘 백성을 고향 땅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는 이미 150여년 전 이사야에 의해 이름까지 언급된 인물로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러낸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였다(사 45:1-3).
세 번째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는 헬라를 언급한 것으로 “털이 많은 수염소는 곧 헬라 왕이요”라고 해석한다. 다니엘 7장에서는 표범으로 언급되고 8장에서는 수염소로 등장하여 수양을 쳐서 넘어 뜨리는데 헬라가 바사를 무너뜨릴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염소는 헬라를 상징하는 짐승이었고, 헬라 사람들은 ‘고트족(the goat people: 염소족)’으로 불렸었다. 수염소는 두 눈 tkl에 큰 뿔을 가졌는데 알렉산더 대왕을 가리키며, 다니엘 11장에서는 “한 능력 있는 왕”으로 나타난다(단 11:3). 그런데 이 현저한 뿔리 꺽이고 뿔 넷이 하늘 사방으로 향하여 난 것은 알렉산더 사후 나락 넷으로 나누어질 거을 의미한다(단 11:4).
네 번째 종아리가 철인 나라는 로마를 언급한 것으로 로마는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는 강력한 철처럼 강한 군대를 가졌으며 ‘철의 제국(the iron monarchy of Rom)'으로 불렸다. 다니엘 7장에서는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를 가진” 짐승으로 나타난다(단 7:7). 이 짐승의 머리에 있는 열 뿔은 로마가 망한 후 세상에 일어날 열 왕을 가리키는데(단 7:24) 이 열 뿔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은 뿔은(단 7:8), 장차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를 괴롭히는 적 그리스도로 생각된다(단 7:25-26).
이처럼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신구약의 중간시대에도 다니엘을 통해 예언되었던 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 왕들을 사용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이후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드셨다. 알렉산더를 통해 언어를 통일하게 하심으로 70인역이 번역되어 헬라어를 하는 사람들도 구약성경을 알게 하셨으며 로마시대를 지나며 로마를 통해 로마 전역에 10만 Km의 도로를 만들고 지중해 해상의 무역도 활발하게 하셨다. 이것은 사도 바울께서 복음을 들고 수리아, 소아시아, 마게도니아, 아가야에 복음을 전하고 로마까지 복음이 확장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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