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실천신학

기독교교육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예림의집 2013. 3. 28. 14:44

기독교교육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교회 교육에서 역사의식을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할까? 첫째로는 역사라는 말 자체에 기본적 관심을 두어야 하겠다. 둘째로는 교회에서 교육을 실행하는 사역자들이 교회 교육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1. 기독교에서 시간 이해의 특별함

*먼저 역사라는 말 자체에 주목해 보기로 하자. 우선 우리는 역사와 기독교가 상당히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기독교가 역사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희랍 문명은 인류의 기적이라 할 만한 학문과 성취를 이루었지만 유독 역사에 있어서만은 연대기적 역사 이외에 시간의 흐름과 병행하는 일관적 관점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렇다 할 사관을 갖지 못하고 그저 날짜가 흐름에 따라 사건을 기록하는 정도의 역사를 기록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의 흐름은 그와는 다르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들어오셔서 통치하시는 의식을 깊이 가졌기 때문에, 시간에 대하여는 특별한 관점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이 역사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나름의 사관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사관이 본격적 사관이란 면에서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졌는지는 검증해 보아야 하지만, 당시의 헬레니즘과 비교하면 시간과 역사에 대한 현격히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명기 역사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청종이라는 일관된 관점을 가졌고, 역대기 역사서는 성전 건축이라는 일관된 관점을 가졌다. 인문학적으로 보면 형이상학적 한원으로 보일 수 있지만 분명한 사관이다.

 

*구약 성경에 이미 나타나는 시간 이해와 역사 이해는 어거스틴에게서 특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거스틴은 기억은 나의 영혼이라고 하면서 시간의 흔적이 나 자신을 형성시킨다고 하였으며, 과거의 흔적은 다시 미래에로 나아가는 힘이 된다고 보아서, 시간은 과학적 의미로 흘러가면 그만이 아니라, 사람에게 남은 흔적이 된다. 그래서 후대의 시간론 철학자들은 이러한 어거스틴의 시간 이해를 의식의 흐름으로서의 시간 이해라고 말한다. 시간은 의식의 흐름이요, 역사는 그 흐름의 연장이며, 그 연장 가운데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이 어거스틴 신국에서 보여주는 시간론이다. 특별히 어거스틴은 그것으로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다. 시간은 영원의 표징과 같은 것이다. 단지 연대기적으로 파악되는 시간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일 뿐이지만, 예수께서 오셔서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결정적 시간은 다른 시간의 흐름에 방향을 주는 특별한 시간이다. 그것은 영원으로부터 온다. 이것을 우리는 카이로스라 부르며 결정적 시간, 시간에 방향을 주는 시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으로부터 다시 예수님에게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바로 그런 시간의 방향을 정하는 시간과 함께 우리에게 오셨고, 바로 그 시간의 방향을 정하는 그것이 사관이 된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밋밋하게 흘러가는 역사, 죄를 탈피하지 못하는 역사에서 구출하는 역사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교육의 역사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방향을 얻은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시간과 역사가 기독교에 있어서 특별하다는 것에 관한 기술이었다. 이제부터는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방향을 입은 역사가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 기록할 차례이다.

 

2. 구약 시대 교육의 역사

-여기에서는 구약 시대 교육의 역사를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보려 한다. 하나는 앞서 보여준 바대로 헬레니즘과는 달리 시간을 중시했던 것과 연계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구약 시대 역사의 원형으로서 ‘쉐마 이스라엘’에 대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이스라엘은 공간과 함께 시간을 성화하려고 하는 일정의 방향을 보여준다. 일련의 삶에는 늘 절기가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삶의 단계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메주자르 두어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성화된 공간으로 두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테필린은 시간과 공간을 차치하는 인간을 성화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미간에 그리고 손목에 쉐마 말씀의 상자를 착용하였다. 이것은 한편 이스라엘 교육의 시청각적 특성을 보게도 하는 내용이다.

*특히 시간과 관련된 부분들을 간략하게 이야기하여 보자. 절기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은 안식일이었고, 그와 함께 안식일과 희년의 개념은 역사를 특별하게 여기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축제의 절기로서 중요했던 것은 출애굽을 기념하고 보리수확을 했던 유월절, 계명 받은 것을 기념하고 밀 수확을 마무리 지었던 오순절, 광야생활을 회고하고 과수 수확을 하였던 초막절이 3대 절기이다. 이 절기는 말하자면 가장 절실한 삶의 재료로서의 실물 수확에 역사적 구원사건을 결부시키는 방식이었다. 이 절기를 가족적으로 지킬 뿐만 아니라, 민족적 절기로 지킴으로써 이런 시간적 특성을 가벼이 여기지 아니하였다. 개인적으로는 태어나면 기념식수를 하고, 8일째는 하례를 하며, 장자의 경우 장자 대속 예식이 있었고, 젖을 뗄 때에는 이유식을 하고 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는데, 이 모든 예식은 한 사람에게서 시간의 흐름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둘째, 쉐마 이스라엘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중심적 교육의 표징이며,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생각할 수 없었다. 쉐마는 단지 말로 끝나지 않으며, 생활로서 보여주어야 하는 그 무엇이었다. 살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부모와 자녀가 늘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각성하게 하는 정신이었다. 바로 이런 정신을 기어이 전달하도록 하기 위하여 시청각적 효과를 사용한 것도 이 교육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3. 구원 교육의 연속성

*이제는 구약 시대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제대로 방향을 잡은 신약 시대 이후 구원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가 서로 다르도록 하는 요인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스스로 구원이 되셨고, 또한 구원을 가르치셨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혜 끼치신 일을 구원하는 은혜교육이라는 관점으로 지속시켜 가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가 롬 7:24-25에서 언급한바 그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사망의 몸을 벗어나는 길을 얻으며, 그것을 배우고 또한 가르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한 유럽 및 아시아의 정신적 쇼크를 말할 수 있겠다. 은혜는 결국 기독교적 세계관의 핵심적 내용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새 세계를 말하는 것이며, 마가복음 10장 등에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말씀으로 실제 제자들을 가르치는 장면에까지 우리는 도달할 수 있다. 이 섬김은 총체적 구원을 이 땅과도 결부시키는 것으로서 산상복음 등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섬김은 총체적 구원을 이 땅과도 결부시키는 것으로서 산상복음 등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현대적으로는 우리의 도덕적 삶과 경건한 신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이끌어내는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가르치시려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였고, 이 이야기는 비유라는 특출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진 의미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당시의 여러 조류들과 비교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두 가지 비교되는 조류가 있다. 우선 당시 주류 사회는 종교적으로 거의 파탄 상태였다. 예수님 이전 오리엔트 지역은 일종의 영적 공황상태를 거쳐 왔다. 희랍 문명은 찬란했지만, 그들은 철학과 학문에 힘을 기울였지, 자신의 영혼을 맡길 흐름을 제대로 얻어내지 못했다. 별로 종교적이지 못하거나, 신비주의에 빠져 버리거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더라도 신앙의 단계로 나가지는 못했다. 이 상태는 고대적 의미의 자유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로마는 법과 군사력에 탁월했지만, 그 현실 이상에로 나가는 것은 어려웠다. 로마 황제를 구원자 소테르로 인정하는 것은 공식 행사에서는 가능했겠지만 내면에서는 불가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내면을 정화시킬 철학적 노력들을 하였다. 바울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세네카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로마 최고의 가문에서 스토아철학에 침잠한 제일의 석학이었고 벼슬도 재상급 이었다. 그의 문장은 오늘도 찬탄을 받는다. 그러나 세네카는 결국 황제 네로에 의하여 사사되었다. 그는 그 사실조차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으나,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주체적으로 열어간 바울과 비교하면 정말 형편없는 것이었다. 그의 사색은 매우 수동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적 임팩트를 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예수님 당시의 정치 문화적 상황이었다.

 

*이 시대가 어떤 종교적 필요 가운데 부딪혀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이 때 하나의 종교적 흐름으로서 시대 전체에 영향을 미친 사조로 영지주의를 들 수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교차하는 시기에 유대적 기독교적 영지주의 경향이 모두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유대교와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구원을 주는 지식에 대한 갈망은 팽배하였다. 그런데 이 영지주의의 영적 갈망은 지나치게 신비주의와 이원론 및 비전주의에 경도하여 역시 그 시대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또한 이 땅의 일상적 생활을 일반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그들은 자멸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 쇼크는 바로 이런 정치 문화와 종교적 지형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바울에게서 보는 그대로 예수님은 모종의 인간적 성취가 아니라 신적 은혜로서 다가왔다. 이미 이야기하였던 바울과 그 당시 로마 제일의 성공한 석한 세네카를 비교해 보면 예수님의 의미는 바로 드러난다. 과연 어떤 신이 나를 만져줄 것인가? 예수께서는 거기에 응답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영적 공황을 메워줄 것이었다. 예수님의 복음이 율법을 넘어서 간다는 것은 좀 더 확장 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사 전체를 넘어선 하나님의 은혜로 삶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교육도 또한 바로 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교육의 관점은 구원교육이었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알리는 것으로서 산상복음은 그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말씀이었다. 그리하여 그 시대에 사람들은 예수께 나아가기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요컨대 예수의 구원교육은 세상살이로 구원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환상으로 돌리고 전혀 다른 실체의 세계에 모든 것을 거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과 종말까지 미치는 그리스도를 통한 통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사도들과 사도 시대의 교회들로 이어졌고, 이것이야말로 예수님 시대의 사도성이었다. 이 사도성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이어져 가는지 좀 이야기하여야 하겠다. 우선 예수님에 대하여 말한다면, 예수님 스스로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비유에 담으셨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그 이후의 복음 사역을 맡기셨다. 그러면 사도들에게서는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사도행전에서 성령 강림은 부활 후 가장 큰 사건으로 일어났고, 성령강림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을 보다 강화하였다. 이 시대 사도들이 세운 교회들은 아직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이미 교리나 찬양을 낳음으로써, 오히려 나중에 성경이 기록될 때 반영되기도 하였다. 빌 2:6-11의 영광송은 그 중 하나이다. 문장 상으로는 여러 장르가 동원되기는 했겠지만, 그 내용은 짧은 글에 핵심적인 내용을 담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이미 교회는 기독교 세계관을 담은 교리적 내용이 주된 가르침이었다.

 

*바울 사도를 매개로 사도들의 교육적 의미를 찾아보자면, 우선 바울 서신은 전반적으로 교리를 밝히는 내용들이다. 일례로 로마서는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거듭남 사건에 대한 다 각도의 해명으로 되어 있다. 조직신학에서의 보편적인 구도라 여기는 교의와 윤리의 연속적 제시도 바울신학의 중요한 특성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13장까지가 교의를 다루고 그 뒤 남은 부분이 윤리를 다루는 등이다. 로마서 12장으로부터 윤리를 다룬다고 본다. 이미 성경 자체에서 교리적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사도 이후 시대에로 이어졌다. 제대로 된 글 하나 볼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정리된 교리를 공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이 교리 교육이라는 특성에서 다른 특징들도 볼 수 있다. 이 교리는 새 신자를 맞아 드리려는 것이었고, 또한 타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것이기도 해서, 개종 및 선교의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바울은 범세계적인 선교에 매진하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회심이 중요하다고 보고 변화를 목표로 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도 역설하였다. 골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런 구절은 명확하게 가르침에 대한 언급을 하고, 가르침의 목표가 사람을 변화시켜 세우려는 데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계속되는 초대교회의 교육은 교리교육이라는 기본과 살갑게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흔적에서 오는 역동성이 견인하였다. 실로 사람들은 주기도문 달랑 하나 가지고도 평생 주님을 묵상하며 살 수 있는 예수께로의 귀의가 참으로 절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