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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기독교 박해

예림의집 2013. 3. 12. 05:06

로마의 기독교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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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레옹 제롬 -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

고대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은 원인이 "무신론과 식인풍습, 근친상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이 핍박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의 수호신이라고 믿고 있던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곧 로마 제국의 안녕을 위협하는 반 국가적인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자연히 로마의 재난이 발생할 때 마다 기독교인은 비난의 대상의 되었으며, 사자들의 밥이 되었다. 이와같은 박해의 시작은 네로 황제때부터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 두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초대 교회 박해는 크게 황제의 고의에 의하여 시작된 1차 박해기간(약 A.D.64-96), 지엽적,국부적으로 진행된 2차 박해기간(약 A.D.98-249)그리고 전국적으로 박해가 진행된 3차 박해기간 (A.D.250-313)으로 대별할 수 있다.

Ⅰ. 제 1차 박해기간(A.D.64-96)

1. 네로황제 이전


네로 황제 이전 기독교의 박해는 간헐적이고 부분적이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던 시기에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되어진 사건 , 글라우디오 황제(A.D.41-54)때에는 행18:2에 언급된 로마인의 추방 사건과 고관 아우루스 플라우티우스의 아내인 폼포니아 그래시나라는 한 여인이 외래미신(기독교를 가리킴. henry bettenson ,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이라는 죄목으로 피소되어 재판을 받은 사건등이 있었다.

2. 네로 황제 박해


네로 황제가 재임하던 주후 64년에 발생한 대화제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분기점이 되었다. 그가 통치하던 주후 64년 네로는 로마에 발생한 대화제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후 극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반들에게 기독교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수에토니우스(syetibius)가 기독교인들이 형벌을 받은 원인을 기술하면서 " 새롭고 사악한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체인 그리스도인들 "이라는 표현속에서 찾아볼수 있다. 또한 타키투스도 기독교를 가리켜 "매우 위험한 미신 " 이라고 표현했다

타키투스는 그의 연대기에서 네로는 광적인 그의 잔학성을 충죽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고 또한. 유세비우스도 네로의 '극단적인 광기' 때문에 그의 생모와 아내 , 수천명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짐승의 가죽으로 싸서 개들에 의해 찢기우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 혹은 화형이 되어, 해진후 밤을 밝히는 일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네로는 그 광경을 위해 자신의 정원들의 개방하고 자신은 기수의 복장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아니면 마차를 몰고 다녔고 그동안 서커스에스는 쇼가 공연되었다. 그러므로 가혹하고 본보기적인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범죄자들이라 할지라도 사람들 사이에 동정심이 생긴 것은 사실상 그 일이 공중의 선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광적인 잔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 타기투스의 연대기 중에서)

2. 도미티안 황제 박해


도미티안 황제는 모든 면에서 네로의 전철을 밝았다고 한다. 유세비우스는 네로와 도미티안의 박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는 로마에서 상당히 많은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을 부당하게 살해했고.....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 일에 있어 네로의 후계자가 되었고 " 또한 터툴리안도 도미티안이 네로와 " 동일한 일"을 행하려 했으며 " 잔인성에 있어서 실질적인 네로의 후계자였다"고 말한다. 도미티안 자신의 아내였던 도미틸라를 유배시키는 한편, 그의 집정관이었던 자신의 조카 플라비우스 클렌멘스와 그의 두 아들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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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ert Schmaltz - Faithful Unto Death

Ⅱ. 2차 박해 기간 (A.D 98-249)

2차 박해 기간(트리얀 황제 A.D98-117 ,안토니우스 피우스 A.D.138-161)동안에는 박해는 지역에 따라 국부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그에게는 신앙을 부인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 특징이라고 할수 있다.

1. 트라얀 황제치하의 박해


트리얀의 칙령에서는 네로와 같이 임의적인 박해를 가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칙령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 첫째는 의도적인 색출은 금한다는 것과 둘째는 익명의 고소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 그리고 셋째는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현재 아니라면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칙령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는 어는 정도 완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 잡아들이기 " 위한 수색은 금지되었다.

2. 하드리안 통치의 박해


하드리안은 125년경 아시아의 총독 미누시우스 푼다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독교인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하드라인의 칙령은 비기독교인들로부터 근거없는 모함을 받는 것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합당한 법적 절차가 있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며 , 그 재판도 분명한 증인과 증거들이 확보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박해


'명상록의 저자'이며 스토아 철학의 대변자인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참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으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나왔다.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박해의 강도가 점점 심해졌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갖은 고문과 박해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강화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레릴우스 황제치하에 폴리갑이 서머나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 총독은 그에게 ' 맹세하시오. 그러면 당신풀어 주겠소. 그리스도를 비난하시오.'라고 재촉했다.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다. ' 나는 86년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왕 그리스도를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이윽고 화형을 위해 마련된 도구들이 그에게 정착되었다. 그들은 그를 큰 못으로 말뚝에 고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분께서는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하니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에 ,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않는 축복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여기 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될 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 성자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폴리갑에 이어 165년 대표적인 변증가 저스틴도 순교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통치기간인 177년 심한 박해가 고울지방에서 일어았으며 이후 250년까지 박해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그후 막시미누스 통치 3년후에 간헐적으로 진행된 박해이후 평화가 잠시 도래하였다. 박해가 중단된 기간은 복음전파를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 3세기 50년동안 수천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공동체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50년에 데시우스 황제가 들어서면서 3차박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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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e Jacques Van bree - Le Tigre Arrive aux Deux Martyrs

Ⅲ. 3차 박해기간 (A.D.249-313)

제 3차 박해기간 동안에는 부분적으로 일어난 2차 박해와는 달리 제국 전역에서 진행되었다. 전국적인 박해가 발생한 것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중에서 주요한 원인 5가지를 든다면 (1)기독교의 급속한 성장 (2) 제국의 경제 및 도덕의 쇠퇴 (3) 로마제국 창립 1000주년의 임박 (4) 교회는 국가내에 국가이며, 따라서 로마제국의 위협적 존재라는 로마 지도자들의 견해 (5) 로마의 쇠퇴가 로마신들이 기독교의 성장을 싫어했기 때문에 내린벌이라는 견해를 들수 있다.

1.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250년부터 251년 사이 데시우스 황제 아래서 기독교가 그 때까지 직면했던 박해 가운데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250년 데시우스 황제는 지방관료와 행정관들에게 정해진 날에 필요한 장소에서 제사를 총괄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제사를 드린 사람들에게 제사 증명서인 리벨루스를 발급하였다. 데시우스의 명령앞에 교인들은 순응, 타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 로마 교회 감독 코르넬리우스,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 안디옥의 감독 바빌라스가 순교했다. 그러나 데시우스의 극심한 박해는 다행히 오래가지 못했다. 제국을 통치한 뒤 2년이 못되어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고 갈루스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데시우스의 전사후 잠시 박해가 중단되었지만 갈루스가 들어서면서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갈루스도 황제의 자리에 오른지 2년이 채 못되어 제거되고, 발레리안이 아들 갈리에누스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기독교인에 대한 발레리안의 태도는 이례적일 만큼 우호적이었지만 그의 통치 말엽에 257년부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의 재산을 몰수 하고 목숨까지도 빼았았다. 발레리안의 박해때에 프리스쿠스, 말쿠스 그리고 알렉산더 세 사람이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다.발레리안이 죽은후 그의 갈리에누스가 황위를 승계하였다.그는 말씀의 사역자들이 자유로이 직무를 수행해도 좋다는 칙령을 발표한 후 43년간 평화가 따랐다.이 기간은 전에 찾아 볼 수 없을 만큽 기독교는 성장했으며,아름다운 교회가 건축되었다. 뿐만아니라 영향력있고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동시에 경제,군대,사회적 조적이 놀랍게 발전했다.

2.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데시우스와 발레리안의 시대가 지난 뒤 이미 권력을 획득하고 있었던 디오클레티안이 황제가 되면서 박해는 또 다시 시작되었다. 그의 통치 초기 교회는 매우 급속이 성장하였다. 그러나 시벨레를 섬기는 이교도이자 기독교를 미워한 그의 모친 영향을 받아 교회에 박해를 가해기 시작했다. 전국에 칙령을 내려 교회들을 부수고 성경을 불태우며 신자들의 직책들을 박탈하고, 교회 성직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어떻게 해서든 제물로 드리게 했다. 디오클레티안의 박해는 제 3차 박해 기간 동안 가장 길고 무시한 박해였다. 이 기간동안에도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했다. 니코메디아에 교회를 박해하는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자,훌륭한 가문 출신이며 직위도 존경을 받던 사람이 " 거룩한 열정과 뜨거운 믿음으로 인해 분기하여" 나붙은 칙령을 떼어내어 조각내 버렀다. 그일은 모든사람에게 알려졌으며 " 대담한 행동"을 한 그 사람은 영혼이 떠나는 순간까지 평정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디오클레니안의 박해는 305년 황제직을 사임한 후 잠시 중단되었으나 곧 재개되어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 있을때까지 계속되었다.

3. 갈레리우스 황제 박해


디오클레티안 사위 갈레리우스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도 박해가 발생하였다. 사정없이 교회를 핍박하던 갈레리우스는 8년이 되던해부터 박해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그의 중병때문이었다. 그의 몸에는 종양이 생기며, 창자속이 곪게 되었으며 그의 몸에는 지독한 악취가 나게 되었다. 투병이 계속되면서 갈레리우스 황제는 자신이 경건한 사람들을 대적하여 범한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제는 먼저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되었다.드디어 갈레리우스 자신의 병이 기독교를 핍박했기 때문에 왔다는 기독교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즉시 기독교 박해를 중지하라는 관용의 칙령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관용의 칙령가운데에는 기독교인들은 서들러 교회를 재건하여 예배를 드리며 제국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갈레리우스의 황제를 기점으로 박해는 약간 완화되었으나 기독교인들의 박해가 완전히 종식된 것은 콘스탄틴 황제에 와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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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도레 - 크리스찬의 순교

Ⅳ.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공인

콘스탄틴은 A.D288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가 죽은후 그의 부하들이 콘스탄틴을 후계자로 임명한후 제국에는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콘스탄틴은 맥시미안의 딸 파우스타와 결혼하여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시켰다.312년 콘스탄틴은 "이교적 마술을 의지"하고 있던 막센티우스를 로마의 권좌에서 축출하기 위해 위해 이탈리아로 행진했다. 밀리안 전투 하루전 대낮에 콘스탄틴은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하늘에서 승리의 십자가 표시를 보았고 그 위에는 " 이 표지를 정복하라"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이 승리의 표시가 태양신이 보내신 것이라고 확신한 콘스탄틴은 만약 전투에서 이긴다면 태양신의 전사가 되겠다고 서약앴다. 다음날 콘스탄틴의 군대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동방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있었다. 305년 디오크레타안이 막시미안과 함께 퇴위한후 갈레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자리에 차지했다. 갈레리우스는 307년에 그의 친구이자 동료 군인인 리키니우스를 일리리아와 마케도니아를 통치할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다. 리키니우스는 정지적인 야심을 갖고 콘스탄틴과 동맹을 맺고 콘스탄틴의 누이를 아내로 맞았다.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란의 칙령(THE EIDCT OF MILAN)이라 알려진 것을 공표했다. 이 밀란의 칙령은 공식적으로 교회에 종교의 자유를 선표한 최최의 선언이었다. 핍박받으며 음성적으로 활동하던 기독교가 밀란의 칙령으로 공식적인 자유를 허용받은 셈이다.

콘스탄틴 대제가 밀란의 칙령을 발표한 결정적인 이유는 전년도에 있었던 밀비안 다리 전튜에서의 승리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공인에서 멈추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 재산권에 대한 구체적인 자유를 보장하였다.아프리카의 총독 아눌리누스에게 보낸 그의 공문에는 "도시나 여러 지방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교회 재산으로서 현재 원로원 의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모든 재산을 모두 돌려주어야 한다 "며 명문화 시켰다. 콘스탄틴의 기독교에 대한 호의는 재산권 보호에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해 황제는 교회 사역자들의 경비를 보조하기 칼타고 감독 카이실리안에게 3000폴리(약 10000달러)를 하사했다. 콘스탄틴은 "심령이 안정되지 못한 몇 사람들이이 위험하게도 교회를 변조하여 백성들을 거룩한 보편교회로부터 빗나가게"하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이 재정적인 문제를 넘어 교리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313년 아눌리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콘스탄틴은 "거룩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가 멸시를 받을 때 국사가 대한한 위험에 처했고, 반대로 이 종교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지켜갈 때 탁월한 축복이 " 말하고 있다.이처럼 콘스탄틴의 기독교에 대한 배려는 단순히 기독교 공인에서 끝나지 않고 로마의 기독교화라는 인상까지 느낄정도로 광범위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콘스탄틴은 점점 더 뚜렷이 기독교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성직자들에게도 면세를 확대해 주었고, 기독교의 주일을 공휴일로 제정했으며, 교회의 절기를 존중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보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콘스탄틴이 자신의 정부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다음 그 도시를 확대해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고 그곳에 건축한 수많은 교회들이다. 파손된 이교사원을 수리하거나 다시 건립하는 것을 금지했고, 기독교인들이 이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막았다. 비록 그가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일련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기독교인이었다.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고무되었던 기독교 붐은 아들들에 와서도 계속되어 기독교인이 기아 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로마에서 가장 우대받으며 군림하는 종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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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emiradzki Henryk - Christian Dirce

박용규, [초대교회사](총신대출판부,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