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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쫓으라

예림의집 2011. 4. 18. 08:05

     제  목 :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쫓으라 
     자료원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교육부
     구  절 : 사 50:4-9 약 2:14-18 약 2:27-35
    

    * 제목의 후반부는 KCM에서 편리상 붙였습니다.

    오순절 후 열 일곱째 주일

    <주석>

    제 1주제 : 이사야 50:4-10
    이사야 40-55장(그리고 34-35장도 포함하여)은 흔히 제 2이사야(Second Isaiah)라고 하는 한 익명의 예언자의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는 바벧론 포로 기간 중 그러니까 포로 생활이 끝나기직전인 주전 540년 경에 살았던 인 물로 짐작된다. 예루살렘이사야(주전 760-690년 경)는 남왕국, 곧 유다 왕국의 일련의 예언자들 가운데 최초의 예언자요 또한 가장 위대한 예언자였다. 제2이사야는 아마 이 계열에서는 너댓째 세대에 속하는 예언자였을것이 다.

    4-11절은 가끔 "세째 종의 노래"(the third servant song)라는명칭으로 불려지며, 그 외에 "종의 노래"로는 이 사야 42:1-4,49:1-6 그리고 52:13-53:12이 있다. 이 노래들은 모두 다 여호와의 "종"을 언급하고 있으며, 마지막 두 노래에서는 이 종의 과거의 고난 내지는 핍박, 그리고 그의 대망(待望)하는바 신원(神寃)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이 종은 누구인가? 42:1-4에 나오는종은 바사고레스인 것 같다(참조: 45:1). 그러나, 40-48장의다른 곳에서는 그 종이 야곱(이스라엘) 또는 포로들을 상징하는것 같다. 그러나, 49-55장에서는 그 종은 보다 개인적인 어느 한 인물인 것 같이 생각되며, 어쩌면 예언자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50:4-9에서는 저자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고 있는것이 틀림없다.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그가 선포하는메시지가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의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그의 귀를 "깨우치신다"는 것이다(50:4, 참조:렘 1:9). 그의 사명 은 "곤핍한 자를 말로 도와 주는 것"이다.
    짐작컨대, 이 곤핍한 자란 지치고 낙심한 포로들인 것 같다. 5-7절에서 그는 그의 예언의 선포로 인해 받은 수모 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물러서지 않는 끈질김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참조:렘 1:18, 15:20). 그 이전의 다른 선지자들도 역시 그들이 "평화"와 "부드러운 일들"과 환상을 예언하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핍박을 당 했던 것이다. 예언자들이 고분고분 응하지않을 때, 그런 자들은 예언자들을 모반자(謀反者)나 원수로 여기고 또 그 렇게 다루었다(예:암 7:10-12, 마 23:37).
    제2이사야가 주로 장차 다가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있는만큼, 그런 무리들이 공격적으로 나왔다고 해 서 놀라운 일은못 된다. 혹 포로들 가운데에는 장차 이방인들의 구원에 관한 그의 메시지를 못마땅하게 여긴 자들 도 있었을 것으로 보다(42:6,49:5-6. 참조:욘 4:2). 어쩌면 그들은 자기 연민에 빠지기를 좋아했는지 모른다(시 137 편). 아니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위험보다는 차라리 애굽의 보호를 더 좋아했듯이, 일부 포로민들은 바벧론에서 나가라는 이사야의 외침(48:20)을 달가와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예레미야처럼 이사야서의 이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이 압제자들에 대해 신원해 주시고 그들을 정죄하실 것을 의뢰하고 있다(50:7-9, 11, 렘 11:20, 17:18, 18:19-23). 시편 기자들과 마찬

    가지로 제 2이사야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을 위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권능 에 대한 깊은확신을 나타내고 있다. 10-11절은 자못 풍자적이다. 즉, 그 예언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 의 눈에는 "빛이 없는"자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종인 그 선지자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자기네들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는 자들이다. 그 댓가로 그들은 "내[하나님 자신의] 손에"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참조:9절 하반절).

    제 2주제 : 야고보서 2:14-18 루터가 야고보서를 "그 따위 지푸라기의 서신"(that strawepistle)이라고 경멸스럽게 못박아버린 것은, 주로 2:14-26의 믿음과 행함의 논의에 대한 그의 반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마루터의 이러한 입장은 가톨릭 교회의 지나친 면들, 특히 면죄부의 판매(나중에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폐지됨)의 거부와 그리고유대교의 율법의 행위와 하나님 및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에대한 혼동에 기인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믿음 혹 신념(pistis, 피스티스)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경건에 대해 야고보는 반기를 들고 있다. 그러 한 경건을 옹호하는 자들은 "평안이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말만 지껄여 대면서 값싼 영적 축복들 을 시여(施與)하였으며, 자기들의 희생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르는 필요한 도움에 응하지 못한 것을 그것으로 떼우 려 하였다. 야고보는 적절하게도 그러한믿음이란 "죽은"것이라 하여 배격하고 있다(2:17). 요한이나 바울이나 예 수님이었더라도 야고보의 생각에 맞장구를 치셨을 것이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ergo,에르고)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바울에 게 있어 은혜와 믿음은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한편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사랑이야말로 가장 큰영적 은사다. 참된 믿음 은 사랑으로 "역사"(energoumene, 에네르구메네)한다(갈 5:6). 칼 바르트가 마태복음 7:21누가복음6:46을 주 석하면서 말한 것처럼, 다만 "주여, 주여"하고 말하는것이나 사도신조를 외우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gumnoi 귐노이)..."(15절), "옷을초라하게 입고"(ill-clad)라는 번역도 가능하긴 하나 그 원의(原意)를 약화시키고 만다. 문제는 어떤 외양(外樣)이 아니라 추위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16절).

    꼭 같은 단어가 마태복음 25장의 대심판 장면에도 사용에도 있는데, 거기서는 단순히 "벗었을 때"라고 번역되어 있다. 야고보서 2장에서나 마태복음 25장에서나 다 같이 문제는 곤궁한 자들에게 반응을 보이느냐 그렇지 않느 냐는 것이다. 마태복음 25:44에 보면, 굶주리고 목마르고 외롭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갖힌 이웃들을 외면하는 자 들이 심판주이신 그 임금을 일컬어 열심히"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다(참조:마 7:21). 그러나, 그 따위 경건이 그들 을 구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16절). 이러한"축복"을 선포하는 소위 크리스천들은 도움을 구하는 자들이 꺼져버리기를 열망하고 있다. "평안히"란 말은 관헌들을 불러 오기전에 이 어려운 자들이 어디론가 사라지 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암시해 준다. 어쨌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은 하나님이나

    남들이나 또는 춥고 배고픈 그들 자신에게 떠맡겨져 있다. "(그것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글자 그대로의 뜻 은 "(그것이)무슨 도움(ophlos, 오펠로스)이 되리요?"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 있어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못 된다. 혹은 그 의미는2:14에 나타난 뜻인지도 모른다.-그러한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자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왈가왈부할 것 없이 분명히 중요한 것은 행동인 것이다(참조:막 8:36, 눅 6:33-35, 롬 2:13,고전 3:14, 갈 6:7-9).

    곤궁한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척만 하는 가짜들은 실상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나 진배없다. 은사가 어디 한 가지 뿐인가? 믿음의 은사를 가진 자가 있는가 하면, 행위의 은사를 받은자도 있지 않은가?(18절). 야고보는 이렇게 믿음과 행위가 따로노는 것은 헛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만일 진정한 믿음이라면,그 믿음은 믿음을 가진 자가 행하는 바 행위에서 나타나야 하는법이다. 믿음은 우리의 입술로 고백되어야 하나 동시에 우리의생활 속 에서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복음서 주제 : 마가복음 8:27-38
    본문에는 세 개의 주요 전승 단위들이 있다. 예수께서 메시야라고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27-30)과, 예수님의 첫 "수난 선언"과 베드로의 반응(31-33), 그리고 자기 부인(否認)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관한 일련의 말씀들, 이렇게 세 개의 전승 단위가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시는 노중(路中)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자기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다. 예수님을 그리 스도라고 증거하고 있는 신약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이것은 이상한 질문같이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때까지 자기 자신을 메시야나그리스도로 선포하신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제자들은 아직도 그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였다(막 4:41). 그런데, 베드로가 새로발견한 사실을 선언하다! 어떤 이들은 그를 세례 요한이라 생각하였고 (8:28), 또 어떤 이들은 "맨 먼저" 올 것으로 기대되던 위대한 회개의 설교자 엘리야라고들 했다(막 9:11-12). 또, 더러는그가 (다른)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다가올 심판과 구원을 선포했었다.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가타부타는 말씀 대신, 제자들에게 "자기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신 다. 이 말씀은 사실상 메시야로서의자기 정체를 비밀로 하라는 경계나 다름 없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비밀이 예수님 자신이 의도하신 바라고 주장하나(시바이쩌), 어떤 주석가들은 이 "메시야 비밀"을 마가의 편집사적인 수 법으로 돌리고 있다(브레데 [Wrede]).

    그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을 가르치신다 (31절). 조금도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드러내 놓고(명백하게-역주)" 이 말씀을 하셨다 (8:32). 분명히 그의 고난과 죽음은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박하고 나선다. 그러나 그 때, 예수님은 도리어 베드로를 나무라시면서 사실상 그를 사탄과 동일시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은 기필코 일어나야만 하는것이다.

    그런 후에 예수께서는 무리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그를 "따라오려거든"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를 지고 좇으라고 하신다(8:34).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좇을 것을 요구하 신바 있다(예:막 10:21, 마 8:19-22, 눅 9:97-62, 12:33-34, 14:16-33). 만일십자가(stauros, 스타우로스)가 "지팡이 "(hrabdos, 라브도스, 막6:8)를 대치하게 되었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표현은 후대의 기독교적인 수정일 가 능성이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재산을 간직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안전하게 조처를 취함"으로써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지 목숨을잃어버릴 것이라고 하셨다. 만일 사람이 가장 큰 보배인 영생 을잃어버린다면, 세상을 얻는다 한들 그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ophelei, 오펠레이)는 말씀이다(36-37절, 참조: 마 13:44-46).

    여기서는 남들에 대한 반응보다는 자기 자신의 부인에 강조점이있다(참조:약 2:14-16). 그런데, 자기를 기꺼이 부 인하지 않는대서야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겠는가? 예수님과 그의 말씀은 다름아닌 바로 "이 세대"의 사자(使者)요 메시지다. 머잖아 인자(=예수님 자신?)가 오셔서 각자 예수님과 그의말씀에 반응을 보인 정도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38절).

    설교를 위한 해석

    제 1주제 : 이사야 50:4-10
    본문의 "주석"은 왜 기쁜 소식이 불쾌감을 일으켜야만 하느냐는 매력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환멸감이 팽배해 있는"포로적인" 상황에서는 언제나 기쁜 소식이 의혹과 미심쩍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이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은 흥미로운 괴짜가 아니면 위 험천만한 과격주의자로 치부되기 일쑤다.

    제 2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의 정체에 대해 어떤 학설을 주장하든, 결국 이 "종"은-한 사람이든 또는 여러 사람 이든-어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신실한 자(들)을 대표하는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증거없이 자기 자신을 방치하시는 법이 없다. 환언하면, 항상 증거는 어디서든 구현된다. 심지어는 고레스에게서도 증거가 구현되었음을 명심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도 바로 이러한 "종" 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신실성 곧 교회가 세상의 눈에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종으로서의 교회의 사명의 성격은 무엇인가? 한편으로 그 것은모세와 같은 종, 다시 말해서 백성들을 "본향"으 로 인도하면서백성과 여호와의 사이에 서는 종이 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궁극적인 종, 즉 구원을 위해 스스 로 종이 되신 하나님 자신의성육(成肉)이신 예수님과 같은 종이 되는 것이다(이사야 50:4-9는 씨리즈 A의 "고 난 주일"의 "구약" 본문이기도 한 점에 주목할것). 이사야 42:1-7이 이 사명을 폭넓고 설득력있게 요약해 주고, 이사야 52:13이하가 그 사명의 구속적인 깊이를 보여 준다고한다면, 본문의 "노래"는 "말씀의 종"이 되는 것으로서 의 그 사명을 묘사하고 있다.

    이사야서의 종처럼 믿음의 공동체도 말씀을 위탁받았다. 이것은 틀에 박힌 굳어진 말씀이나 무시간적(無時間的) 인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두루마리나 책 속에서 석고처럼 딱딱해진 말씀도아니다. 이것은 수용적(受容的)인 마 음을 지닌 자의 귀에 "아침마다"주어지는 말씀이다. 이것은 하나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라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 항시 주어지는 하나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요(참조:사42:1-7),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방식이다. 종으로서의 교회는 그 말씀을 들을려고 귀를 곤두세우 며, 그 말씀을구현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오직 사람들 안에서만 그 실재성(實在性)과 가견성(可見性)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말씀이 귀에 거슬릴 것은 당연지사다. 아침마다 새롭게 들을 때마다 이 말씀은 시의적절(時宜適切)한 말씀이며 따라서 당황하게 하는 말씀이다. 양약은 입에 쓰고 충고는 귀에 거슬리는 법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치 유(治癒)가 있는 법이다.
    교회의 대적자들이 교회를 모독하고 욕되게 하고 비난하는 것은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까닭인 즉, 신앙의 공동체 는 언제나 세상이 쓰는 것과는 다른 역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영웅심(martyr-complex)과 아울러 모든 진리와 덕(德)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본적인 자만 심과 교만을 조심하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리시니 나를 정죄할 자가 누구뇨"라는 식의 단호하고 때로는 도 전적인 믿음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경직(硬直)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할수 없이 다른 곳에 서 구현(具現)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게 되고 만다. 차라리 겸손이 낫다.-"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말에 순종하 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을 더듬고 희미한 빛조차 없는 자들은 누구나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라"(10 절, 노스[North]의 번역).

    제 2주제 : 야고보서 2:14-18 야고보는 과연 정열적인 설교가다. 그의 예시(例示)는 소름끼칠 정도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는 틀림없이 그 와 비슷한 일일일어나는 것을 본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이 좀체로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실제적인 삶의 자리에서 야고보의 논증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논쟁에서든 서로의 입장이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으며, 격론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야고보가 그의 서 신을 기록할 때의 배경도 그러했던 것 같다. 즉, "나는 믿음이 있노라."와 "나는 행함이 있노라."의 대립이 곧 그 것이다(18절). 이론상으로는그러한 양극화 현상은 불가피해 보이며, 믿음을 중시하는 신학의관점에서 보면 그것을 아주 필수적인 것 같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와 바울은 마치 "양극"(兩極)인양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그러한 양극화의 현상은 우스꽝스러울 뿐더러 비생산적이다("무슨 유익이 있으리 요...?" 14절).
    "나는 믿음이 있노라."는 측(側)에서는 헐벗은 이웃이 "나는 행함이 있노라."는 측이 훨씬 더 많은 덕을 볼 수 있 을 것이라는사실을 깊이 각성해야 한다(참조: 18절). 마찬가지로 "나는 행함이 있노라."는 측은 헐벗은 이웃이 고 작 또 하나의 선행을 걸 못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깊이 각성해야 한다(참조:18절). 양극성은 궁핍한 이웃에게도 그리스도인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한다(14, 16절).

    "행위로 말미암는 의"(works righteousness)의 길을 잘 알고있었을 야고보는 또한 미묘하면서도 비참한 결과 를 낳는 믿음의남용, 곧 "신앙지상주의"(fideism)에 대해 특히 민감했던 것 같다. 야고보는 지적하기를, 귀신들도 외견상으로는 "믿으며" 또한적어도 부들부들 떠는 정도의 예의는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19절). "오직 믿음" 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건져내신 바로그 수렁으로 도로 빠져들어 갈 위험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을 칭의를 위한 행위로 전락시켜버린다. 그렇게 되기 쉽상이다. 행위로 말미암는 의의 횡 포로부터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자유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오직 믿음"(faith alone)이란 말은 무자격(無資格) 한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구원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오직 믿음"이 "믿기만 하시오!"라는 설유조(說喩調)로 바뀌어 버린다면, 그 때에는 믿음은 칭의를 위한 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의뢰심("염려하지 말라....", 마 6:25이하)은 결국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되어버리 며 ("하나님, 당신께서 하시죠!"), 믿음에의 권면은 빈궁한 이웃에 대한 선심공작이 되고 만다("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저 믿기만 하십시오"). 그래봐야 그 불쌍한 헐벗은 이웃은 여전히 도움 을 받지 못한채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어려운 형편에 있는 그 이웃을 우리의 시야에서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 이웃 안에서 믿음과 행 위는 다 같이-서로 보정(補正)하면서-현실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빈궁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진지하고 강렬 하고 믿음 충만하다 하더라도 수만 마디의 말이나 잘 되라는 인사로서는 그의 상태로 호전시킬 수가 없다. 행동 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웃이다. 그는 우리가 잘 되기 위해 이용해 먹어도 좋은 기회는 아니다(즉, 자기의 죄책감을 무마시키기 위한 적절한 방법은 아니란말이다). 그는 우리가 관계를 맺어야 할 한 인간인 것이 다. 여기에 믿음이 요구된다.

    복음서 주제 : 마가복음 8:27-35 마가복음의 기사에서는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제자들이 눈을뜨는 과정이 오래고 느리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일 련의 치유 기적들도 묘사되어 있는바, 이러한 기적들은 귀먹고 어눌한 자의치유("오순절 후 열 여섯째 주일", 막 7:31-37)와 벱새다의 소경의 치유(8:22-25)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벱새다가 베드로의 고향이었다는 점과 그리 고 마침내 그 곳의 소경의 눈이 열리자, 베드로 또한 그의 혀가 풀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하고 또렷하게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과학자가 많은 연구와 실험 끝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신비를 펼쳐 줄 열쇠가 될만한 공식을 발견해 내 었을 때, 그것은얼마나 흥분되는 순간일까. 어떤 사람이 이보다 훨씬 더한 영혼의 탐구와 가슴앓이와 숱한 방황 끝에 삶의 의미에 대한 열쇠를발견했을 때, 그것은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인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캐려고 하는 자들이 너무나 적다. 애굽이나 바벧론에서 임시변통으로 안주(安住)하는 것이 언제나 더 쉬운 노릇이다. 현대 석학들과 힌두교 교도사(敎道師)들과 정치가들이 건네 주는의미들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히는 것이 보다 덜 불안하다. 지평선을 끌어내려 우리의 조그만 세계와 우리의 아늑한작은 의미들로 만족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제한하려고 애써도 우리에게 손짓하고또 두려움을 일으키는 에베레스트 산이 지평선 위 로 항상 희미하게 솟아 있는 것을 어찌하랴. 휘몰아치는 바람, 공기 속에 은은히 풍기는 향훈(香薰), 눈동자 속에 어리는 표정-이 모든 것이언제나 신비, 곧 삶과 죽음과 복합적인 인간성과 영혼과 피안(彼岸)의 세계의 신비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랴.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38절) 그리스도를 이 신비에의 열쇠로,차안(此岸)과 피안을 잇는 다리로, 그리고 우리 인 간의 실존 속에 함께 어울어져 계시며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심오한 실재(實在)로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재빨리 원위치로 되돌아가고 마는지!우리는 신비의 실오라기가 우리의 고즈넉한 작은 의미들에 맞추어 풀려지기를 바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응당 그러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하셔야 할 것 이라는 우리 나름의 생각, 모든 일이 어떻게 돌아가야 옳은지에 대한 우리의 바램,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신원(伸寃)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견해-이런 것들에 맞추어 신비가 해결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아니다! 신비에의 열쇠는 우리의 보물함의자물쇠에는 맞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 모양 으로 된 희한한 열쇠다. 그것은 고통과 죽음에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생명이 있다. 아니, 그러고 보니 뭔가 뒤바뀐 듯 싶군! 그러나, 여기에 이 말씀이 있다. "인자가 고난을 받고...죽임을 당하 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 그렇다!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처럼 "기름부음 받은 자" 곧"메시야"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할 뿐만아니라 또한 실로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어머니의 품 속에서 보낸 과거와, 그리 고,현재와 미래를 포괄하는 "인자"인 것이다. 그는 이것들을 포괄할뿐만 아니라 나타내 보인다. 실상, 그는 이 모든 것들의 영광과수치, 강함과 약함, 존경과 멸시, 장엄함과 비참, 고난과 죽음...... 그리고 희망 속에서 바로 그것 들 자체이시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삶과 그리고 삶의궁극적 의미에 왕도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삶 그 자 체와 삶의애매모호성(曖昧模糊性)의 고결함이 있을 뿐이다. 고난과 죽음은우리가 기를 쓰고 피해야 할 운수 사나 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그것들은 인간됨, 그리고 사람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자녀됨의 한부분이요 편린(片鱗)인 것이다. 이 지난(至亂)한 삶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이것이 곧 우리가 따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