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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기적을 불러오는 성탄절

예림의집 2010. 12. 23. 14:55

성탄절이 되면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러 퍼지고 성탄 장식으로 들떠 있는 분위기가 된다. 누구나 성탄절이 되면 선물을 기대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구영신의 시간과 맞물려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어 있다. 올 한 해도 시각장애인들에게 잔치를 베풀고자 준비하는 필자도 분주하게 움직이게 된다. 그러나 성탄절은 어려운 이웃과 고통 받는 환자들, 감옥에서 추운 겨울을 나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날인가? 진정 이 땅에 평화와 하늘의 기쁨이 되는 날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성경을 대하다 보면 과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온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날인가? 물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귀중한 날이다. 그런데 사실은 로마가 국교로 정해지면서 다른 날은 몰라도 예수님의 탄생일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신앙고백적인 기준을 만든 것이 아니라 국교를 정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날이라는 사실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신앙인마저도 모르고 있다.

 

헬라적인 문화와 로마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성탄절은 사실은 로마가 태양신을 숭배하던 날인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지정해 버린 것이 현재 크리스마스, 성탄절이 된 것이다. 이미 오랜 전통으로 인해 온 세계 사람들이 이 날을 맞이하여 기뻐하고 행복해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 부정할 수 없는 날이 되어버린 성탄절은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날인가? 물론 이 날마저 없었다면 온 세계 사람들이 기독교 문화를 접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모든 절기 중에 온 세계 사람들이 함께 만끽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은 없을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교회 단위로 행해지기 때문에 여기에 속할 수 없을 것이다. 신자든 비신자든 성탄절이 되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빌미로 사람들은 흥분과 기대 속에 이 날에 눈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데이트를 즐기기를 원하고 있다. 또한 모임을 갖고 선물을 나누며 파티를 열고 기뻐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 어느 누구도 싫어할 수 없는 좋은 날임을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원하는 성탄절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성탄절의 본질과 원형이 무엇인지 모르면 성탄절은 사람들을 위한 날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탄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체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구속사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무슨 의미일까? 마태복음 1장 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고 기록된 말씀은 헬라어 문법으로 현재진행미래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이 딱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일어났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이 된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상으로 딱 한번 태어난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나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는 부인하거나 그것을 반박하는 내용들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지만 예수의 탄생은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믿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인 예수의 탄생이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까지 계속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람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이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로써 원형과 본질을 찾는 것이 성탄절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현재 성탄절보다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만을 언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이 땅의 기뻐하심을 입은 평화가 되는 것이다. 즉 사람들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됨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과 평화가 되는 것이다. 평화라는 단어인 에이레네, 샬롬이란 단어가 단순히 전쟁도 없고 아픔과 고통이 없는 시점을 의미하고 있는데 성경의 본질과 원형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사람의 몸에 있는 팔이나 다리에 팔과 다리 사이에 연결된 관절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팔과 다리 아래 위를 하나님과 성도들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연상시켜 본다면 그렇게 연결되어져 잘 움직이는 상태가 바로 평화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의 의미를 알려주는 본질과 원형이다. 성탄절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수난절과 고난주간, 부활절, 추수감사절 등등 교회의 모든 절기는 바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으로 연합된 것을 기념하고 영광을 돌리며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 안에 가득 차 있는데 이런 본질과 원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마치 공중에 붕 떠있는 한국교회, 그리고 세계교회가 하나님의 본질과 원형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모습 때문에 주님께서 한심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내 안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날 수 있는 것일까? 진정 마리아처럼 순결한 신부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경험하는 성령 충만의 사건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가?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가 바로 내가 되어 내 안에서 아기 예수를 잉태하여 출산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내 안에 터지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을 믿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예수가 태어난 곳이 바로 짐승들이 머무는 장소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편 49편 12절과 20절이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는 말씀을 비추어 본다면 사람은 무엇인가? 그래서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한 12지신을 갖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아무리 존귀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말해도 짐승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짐승들이 머무는 곳에 아기 예수가 탄생하였는데 과거 필자가 교회학교에서 마굿간의 합창이란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다. 소는 베이스, 말은 테너, 암탉은 소프라노 고양이는 엘토, 돼지는 먹 따는 잡소리로 등장시켜 흉내를 내면 설교했더니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며 성탄절의 정신을 배웠다.

 

동방박사들이 세 가지 선물을 아기 예수에게 전달하는 과정도 하나의 장면으로 보면 안 된다. 바로 우리들이 동방박사가 되어야 한다. 황금을 바친 것은 위로부터 공급되는 하나님의 생명,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됨을 감사하는 마음을 바친 것이다. 즉 빛이신 아기 예수가 잉태되었기 때문에 내 안에서 이제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 하는 표시다. 이런 의미를 찾고자 주석을 찾고 다른 의미를 깨달으려고 책을 뒤졌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황금은 왕권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왕 같은 제사장의 길을 들어선 것으로 주님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된 것이 바로 왕권을 회복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 군림하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유향은 리바노스 향나무에서 채취되는 향으로 라바르(히브리어)라는 단어는 ‘기름으로 에워싸이다’라는 근본적인 으로서 ‘사랑에 열중하다, 빼앗아가다, 지혜롭다, 기름에 튀겨 과자를 만들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내 안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메시아인 아기 예수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또한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에 열중하게 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빼앗아가도록 유향을 바치는 것이라면 과거 동방박사가 바친 것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아기 예수 탄생으로 인해 지금 내 마음을 빼앗아 갈 만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지혜롭게 되었다는 중요한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내 안에 아기예수 탄생되어 오로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게 됨을 감사함을 전달하는 것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사람들 속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되는 것이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마태복음 2:11과 요한계시록 18:13에 두 군데만 나오는 것처럼 계속 이어져 오는 전통을 전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몰약이란 ‘스뤼리나’라는 단어는 뒤론(향유, 고약) 단어와 동의어로서 히브리어로는 ‘모르’라는 단어인데 방울져서 증류된 것을 사용하는 의약품으로 치료제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니고데모가 무덤에다 장사지낼 때 몰약과 침향을 바르고 난 뒤 세마포로 감싼 장면이 나온다.

 

아기 예수가 내 안에 탄생함으로 인해 썩어지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상처 난 것이 치료되어 깨끗함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예수와 함께 무덤 속에 장사할 때 몰약으로 뒤덮여 있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따라서 동방박사들이 바친 것은 과거의 전설로만 치부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과거에 바쳐야 할 예물이었으며 지금도 바쳐야 하며 앞으로 계속 바쳐야 하는 예물이라는 뜻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도 놀라운 기적이 아닌가? 그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만 종결짓지 말고 계속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무한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바탕을 일궈야 한다.

 

 세계 각 사람 마음속에 아기 예수가 탄생되는 그 날까지 기적은 계속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 사건을 일어난 것을 내 안에서 일어난 성탄절을 다시 회상하면서 축하해야 할 것이다. 성탄절의 놀라운 기적은 과거에도 일어났지만 지금도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는 기적을 맛봐야 할 것이다. 과거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 탄생한 것만을 축하하고 기뻐하지 말고 현재 지금도 사람 내면속에 일어나고 있다는 기적을 계속 이어져 앞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도록 산파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에 모세가 탄생할 때도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도 아기들이 죽음이 당하는 핍박의 사건들을 상기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