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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적 예배(광의적 예배)

예림의집 2010. 3. 21. 08:15

설교 제목: 성격적 예배(광의적 예배)

설교 본문: 사도행전 2장 42-47절

암송 요절: 사도행전 2장 47절

 

여러분 지난주에 이어서 예배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작은 의미의 협의적인 행위로서의 예배를 가리킨다면 오늘 제가 말하는 예배는 조금 더 넓은 의미의 광의적인 삶으로서의 예배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예배를 새롭게 하여야 하느냐? 예배는 곧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대부분이 예배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행위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그 자체가 복음의 증언이며 신앙의 내용을 좌우하고 신학적 생각과 신앙적 윤리를 형성하는 도가니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바르게 드린다는 것은 바른 신앙과 바른 생활을 한다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생활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공부도 중요하지만 이것은 예배 속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예배는 성경공부보다 더 중요하며 교회의 기관조직보다 더 중요합니다. 나아가 온 세계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고, 그가 우리 삶의 주관자이심을 인식하고 경배하며, 그를 찬양하는 예배가 가능할 때 우리의 선교도 그 목적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우리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 즉, 우선 청년부가 인도하는 오후찬양예배를 더 찬양예배답게 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 청년예배가 더욱 예배다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고무적인 것은 매주 미리 모여서 준비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볼 때 너무나도 아름답고 바른 예배 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기에 저는 매우 기쁩니다.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가끔 드리는 "헌신예배" 하면 의례히 외부강사를 초청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강사를 초청해서 설교 듣는 것 이외에는 기껏해야 특송 하나를 하고 헌신예배를 다 드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헌신은 문자 그대로 몸을 바치는 것인데 그렇게 예배를 드려서는 아무것도 바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옛날에는 헌신예배를 드릴 때 모든 회원이 이름을 부르면 일어서서 성경요절이라도 한 절 외우고 헌신을 표시했는데, 이제는 회원자체마저도 모두 참석하지 못하는 헌신예배가 될 때도 많습니다. 우리 청년부 헌신예배가 있다면, 정말로 헌신예배 다운 예배를 준비해 봅시다. 헌신의 뜻을 잘 살려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합시다. 우리의 삶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우리의 각자의 달란트를 표현하여 드려 봅시다. 시도 좋고, 노래도 좋고, 몸짓도 좋고, 정말 여러 가지 맛있는 과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려 봅시다.

 

우리 청년부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예배만큼은 좀 더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합시다. 이 노력은 오로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눈을 크게 뜨고 한국의 기독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기독교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사도 바울과 제자들을 통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나갔고 소아시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이후에 세기를 거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렇게 복음이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기독교는 그 지역의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되었습니다. 예배도 자연히 나라마다 민족마다 문화마다 각기 다르게 발전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다양성을 추구한 결과 서로 공통점이 점점 결여되고 예배의 기독교적 원칙이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경우는 미국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해 주었기 때문에 거의 미국교회의 예배와 비슷한 형태를 띠게 되었고, 그 미국교회의 예배 중에서도 아주 일부분의 예배전통을 우리 한국교회가 배우게 된 것이어서 상당히 편협한 부분이 많습니다.

지금 세계교회는, 특별히 우리보다 앞서서 복음을 받아들였던 나라의 교회들은 예배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해주었던 미국교회도 신앙고백을 새로 쓰고 예배형식도 상당히 많이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새롭게 하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드려온 예배가 성서적으로 기독교예배의 원형에 비추어볼 때 상당한 부분 너무 외길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비추어 봐서 예배를 성경적 원칙에 가까이 가도록 새롭게 구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할 때 결국 성경적 원칙에 따라 개혁을 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생각했고 이 원칙은 지금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것만을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교회, 우리 청년부의 현재 예배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진보하는 예배여야 합니다.

예배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는 것은 진보합니다. 변화합니다. 예배드리는 자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더 성경적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답게 해야 하는 지를 고민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더욱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정된, 변함이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생명이 없는 예배입니다. 날마다 생동감 있는 예배여야 하고, 날마다 새로운 감동과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물론 예배의 틀을 급격히 수정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각자 한 사람은 모든 예배가 새로운 예배이어야 합니다.

 

둘째는 예배의 기본요소를 성경에 따라 회복하여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는 예배를 이런 순서로 드리라는 특정한 제안은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드린 예배의 요소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에 말씀을 보면, 그대로 예배순서는 아니지만 예배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떡을 떼며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복음을 증거 함으로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는 모든 요소가 그대로 예배의 기본요소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예배학자들은 이 본문이 초대교회의 예배원칙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청년회의 모든 활동을 예배로 볼 때 바로 이런 원칙에 따라서 구성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한 마음이 되어 성전에 모이고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셋째, 기도에 힘쓰며 넷째, 하나님께 영광 사람에게 기쁨이 되어 다섯째, 복음이 온 누리에 퍼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경적 예배의 원칙을 늘 마음속에 기억하며 예배를 준비하고 이 예배가 우리에 영향을 주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삶을 변화시켰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런 착한 행실을 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고, 의문을 품게 하고 마침내 교회로 향하는 기적을 일으켰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는 참회의 기도부분입니다.

저희 교회 주일 오전 예배에 있는 참회의 기도 순서는 모든 예배에도 반듯이 있어야 할 순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장 먼저 인식하여야 할 것이 우리 인간의 죄인 됨입니다. 이 죄를 고백하지 않고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려고 할 때는 먼저 죄를 고백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죄의 고백이 우리 한국교회의 예배에서는 아주 빠져 있었습니다. 이 죄의 고백을 한국교회에서 가장 먼저 회복한 교회가 서울의 소망교회입니다.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라 예배를 다시 재조정하면서 먼저 회복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아니 이미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입니다.

 

넷째는 봉헌중보기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보기도는 영어에서 intercession 이라고 하는 기도로서 “예수님을 유일한 한분 중보자”라고 할 때의 중보(中保)와는 다른 뜻입니다. 바로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한 기도는 늘 하면서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는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웃과 사회와 국가와 민족, 그리고 세계를 위해, 여러 가지 고통과 환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순서를 간과해 왔는데 현재도 지구촌 반대쪽에서 얼굴도 모르는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중보에 앞서 봉헌을 먼저 하기 때문에 봉헌기도와 중보기도를 합해서 봉헌중보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중보기도는 목회자가 주로 하지만 특별히 우리 모두가 함께 중보기도를 해야 할 경우에는 함께 하는 형식도 취하게 될 것입니다. 금요 기도회 때 오시면 기도의 순서 중에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보 기도는 작게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크게는 전 세계의 인류의 평화와 안녕, 그리고 복음화를 위한 기도에까지 그 범위가 다양합니다.

 

다섯째는 광고순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광고순서는 예배의 요소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국 교회의 대부분은 광고를 예배 순서에 넣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배가 끝나면 성도들이 집중력을 잃고 각자 바쁘고, 부산하게 움직여 전달에 어려움이 있음으로 예배 순서에 넣어 중요한 내용들을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종전처럼 예배의 한 부분이지만 제 생각으로는 예배를 마친 후에 성도의 교제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흠향하실 예배를 드릴까 고민하십시오. 이것이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청년 예배만큼은 날마다 실험정신이 스며있는 예배였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잘 하고 계십니다. 매주 토요일 모여 예배를 준비하는 모습이 너무나 감사하고 자랑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한 가지 더 제한한다면 정형화된 똑 같은 예배를 드리지 말고 예배 순서도 바꾸어 보고, 새로운 것도 시도해 보고, 성경에 비추어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준비해 보십시오. 그리고 단지 함께 드리는 예배에만 국한되지 말고 우리의 생활을 예배답게 가꾸어 보십시오. 그 중 우리의 이 예배가 한 순서가 되게 하십시오. 우리의 삶 자체가 날마다 진보하고, 말씀에 따라 살고, 우리의 죄를 날마다 회개하고,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과, 이웃과, 나라와, 세계를 위해 기도하며 헌신하는 삶이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