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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골산 칼럼 제1203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귀중한 가치는?

예림의집 2009. 10. 20. 07:35
창골산 칼럼 제1203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귀중한 가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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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귀중한 가치는?

    열왕기상 18장 20절부터 시작되는 갈멜 산 예배의 기적은 마치 영화의 드라마틱한 내용의 사건으로 많은 기독교인들로부터 귀감이 되는 말씀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 말씀이 예배의 기준이 되는 내용을 갖고 있지 않지만 예배가 무엇인지 그리고 예배의 귀중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바알선지자 450명과 앗세라 선지자 400명 합이 850명이 규합된 예배라고 한다면 규모가 아주 어마어마하고 거창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면 엘리야의 예배 규모도 작아 아주 초라하기까지 한, 볼 품 없는 예배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예배당을 휘황찬란하게 지어 파이프 오르간까지 갖춘 대규모의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개척교회 중에 겨우 부부만 나오거나 교인 한 명만이 드려지는 예배라고 한다면 비교할 수 있을까?

 

   현실 차원에서 이렇게 비교할 수 있겠지만 그런 내용보다는 바알과 앗세라의 예배는 규모가 거대하고 조직적이며 예배 내용적으로 본다면 너무나 알차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에 반면 엘리야의 예배는 조직은 거의 없고 규모도 너무 작아 초라하며 그 어느 누구에게의 도움도 없는 예배라는 사실이다.

 

   이방선지자의 예배는 눈에 보이는 예배, 즉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예배, 눈의 감각을 동원하여 즐겁게 하며 눈으로 나타나는 기적을 행하는 예배라는 사실이다. 그에 반면 엘리야의 예배도 눈에 보여주는 예배로 눈의 감각을 동원하여 즐겁게 하며 눈으로 나타나는 기적을 행하는 예배로 착각할 만큼 행동으로 옮기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36절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의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을 듣는 차원의 예배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기도가 끝난 후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핥는 역사가 일어나 마치 기적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의 사건을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존재하심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에 불과하다. 지난 번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 눈에 보여주시는 기적이나 사건을 통해 일순간에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그 뒤에 계속 존재하심을 일깨워주시는 말씀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이 예배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면 더욱 은혜가 되고 놀라운 감동의 예배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열왕기 상 18장의 사건을 놓고 예배를 논한다면 나 혼자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아무리 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작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도 나 홀로 예배드리는 마음가짐과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예배론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예배의 방법을 추구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행하는 예배의 모범이 우리들에게 예배의 가치를 알리고 있으며 정신과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엘리야처럼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예배드리지 말라. 예배 속에 불이 임해야 하며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이 다 태워지는 역사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느낌을 느끼게 하는 뜨거운 불일 수 있지만 우리들이 밥을 먹으면 위장에서 칼로리를 만들기 위해서 음식이 태워지는 것처럼 자신의 내면에 영적인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 불이 태워져야 하고 내 속에 숨어있는 짐승의 속성을 태우는 사건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번제물, 나무, 돌, 흙이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주일날 가족이 함께 가고 친구가 함께 가며 이웃이 함께 드리는 예배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나 홀로 드리는 예배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예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드리는 예배는 누구와 함께 드려질 수 없다. 누구를 동원하여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께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나 홀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홀로 영광 드리는 예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는 것이 예배의 귀중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이니라.”는 말씀을 되씹어보고 되씹어 보라.

 

   아무리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 수십 만 명이 드리는 교회와 예배당에 현혹되지 마라. 그것을 바라는 마귀사탄 전략에 빠지지 말고 나 홀로 예배를 드리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오직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십자가상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번제물로 드려지는 모습과 같이 나 홀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렇다고 구약처럼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12:1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가장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합당한 예배가 결코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가장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배라는 의미가 너무나 많이 분포되어 있다. 신약 요한복음 4장에서 언급하고 예배는 프로스퀴네인(proskunei/n) 단어는 프로스(proj 하나님을 향하여) 퀴네인(kunei/n 입을 맞추다)의 합성어로 하나님의 얼굴과 내 얼굴이 겹쳐서 키스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이루기 위해서 서로 얼굴이 덮는 차원이 바로 예배의 본질임을 깨달아야 한다.

 

   예배는 내 자신의 내면 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보여주며 이렇게 변하고 있으며 자라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주님의 뜻대로 장성한 분량에 자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가장 합당한 예배임을 성경 속에 널리 퍼져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처럼 불이 임하여 자신들의 번제가 태워져야 하고 자기들의 신으로부터 반응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자신들의 몸을 해하면서까지 몸부림을 치고 제단을 붕괴하면서까지 속된 말로 지랄발광을 했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너무나 치밀하게 조직적이며 거대한 규모의 제사였지만 불이 임하며 신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흔적도 요동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다가 진동이 오고 입신에 들어가며 계시가 임하는 차원이 절대로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차원의 내용에 사건이 아닌데도 그런 것을 추구하는 예배가 신령한 줄 착각하고 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그런 내용이 아니다. 원어적으로 규명한다면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임을 메시아 예수께서 절대적으로 표명했다.(요 4:24) 그런데도 이상한 예배 현상이 신령한 것으로 감정에 북 받혀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로 곡해하고 있다.

 

   과거 내가 드렸던 예배 가운데 조직적이며 대단 규모로 드린 예배 중 이방인 선지자들이 드린 예배와 흡사했다고 자책감을 가지거나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또한 엘리야처럼 조직적이지 않고 규모가 거대하지 않게 나 홀로 예배드린 것이 구원이나 천국출입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예배는 구원받은 존재로서 마땅히 해야 되는 구원결과에 따른 행위이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완성으로 치닫고 있는 모습임을 반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행위로 자신 신앙생활의 우월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영웅 심리에 의해 육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지 말라.

 

   이방선지자처럼 제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웃들이 있다면 지적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깨우쳐 나 홀로 예배하는 삶을 나누어야 한다. 주님의 얼굴과 내 얼굴이 서로 덮어져 주님의 얼굴로 바꿔지는 역사가 바로 기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칼  럼  필  자

이준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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