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자기부인(自己否認)

예림의집 2009. 5. 19. 09:06

자기부인(自己否認)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9)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쳤을 때 귀신이 항복하고 물러났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드디어 자기가 그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로 기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것을 왜 불법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이는 자기가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우쭐대는 우리의 모습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단의 꾀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마 16:24, 막 8:34, 눅 9:23)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믿음이 있는 자라면 좋은 일을 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얼마든지 좋은 일을 하고 착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좋은 일을 하고 착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착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좋은 일을 하고 착하게 사는 목적은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며 자기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믿음의 행위는 먹고 마시고 자고 배설하는 것과 같이 의식하지 않는 당연하고 일상적인 행위로 선한 행실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배설하는 것을 특별한 행위로 작심하거나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신자가 철저한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하면서 전 재산을 내어 사회사업을 한다고 할 때 그를 믿음이 좋은 훌륭한 성도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기 이름을 드러낸다면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한 것입니다.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 손도 모르게 하라는 뜻은 남이 모르게 하라는 것 보다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하라는 것이며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하라는 것은 일상적인 삶의 행위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로서, 전도자로서, 또는 성도로서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 선한 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삶이 아니었고 따라서 하나님을 갈구하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는 삶이 아닙니다. 아울러 그의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삶이 아닙니다. 욥기에서 엘리후는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 35:7-8)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좋은 일을 하는 것과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만을 갈구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당연한 일로 이름도 없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름을 남겼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선한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십자가의 강도는 비록 선한 일은 남기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취를 남겼습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고 하신 신명기(6: 6-9) 말씀에 따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23:33) 라는 질책을 받은 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들은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항상 자신의 의를 내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자신을 의롭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눅 18:11-12)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어떤 모양으로나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이름을 나타내기 위한 생각과 뜻과 소원을 버리는 것으로 자기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삶이 바로 이러한 자기 부인의 삶이었습니다. (빌 3:3-9, 고후 11:22) 이것이 곧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상 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 손도 알게 하므로 상패 받기를 즐겨하고 영원한 기념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똑똑하지 못한 멍청한 처신이며 바보 같은 짓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피조물의 본분을 지키는 것으로 과연 내가 나의 것이 아닌 성령의 전답게 사는 것입니다. (고전 6:19) 성도라면 내가 나의 것이 아니므로 내 이름을 광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운데 은밀하게 하는 것이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 6:1)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선지자들 그리고 신약시대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엄청난 일들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업의 대가로 그 이름에 걸맞게 안주하거나 호의호식하지 않았습니다. 시냇가, 광야, 굴속, 감옥 등에서 도피하거나 잡혀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위대한(?) 지도자들은 명성을 광고하고 떨치면서 호화스러운 별장과 최고급 승용차를 굴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을 못할 때 자기 십자가는 당연히 질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날의 선지자나 제자들은 별천지에서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환난과 핍박을 받지 않음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며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은 불의와 타협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마귀의 권세가 허락된 이 세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지구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동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환난과 핍박은 고사하고 오히려 평안을 만끽하며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초대교회 때는 그 사회에서 어떤 기득권도 없었지만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후로는 사회적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당시 기득권내에 존재했던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단은 기득권 안에서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은 아닐까요?  초대 교회의 공동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각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면 과연 화목한 가정과 직장을 이루고 온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질까요? 기득권 안에서 부모, 형제, 처자가 그리고 모든 이웃이 ‘좋은 게 좋은 것’으로, 무분별한 긍정적 사고로 살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까요? 무엇이 주안에서 진실한 화평을 누리는 것인지? 어떤 모습으로 사는 것이 자기부인인지 신중하게 묵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부모나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권하고 직장 동료나 상사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권고한다면 그들이 아무 이의없이 동의할까요? 혈육간이라도 신앙의 패턴이 다르고 한 직장에 몸을 담고 있을지라도 한 마음이 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쉽게 혈육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공의와 진리가 아니라고 미련없이 직장을 떠날 수 있을까요? 가정이나 사회에서 화목과 평안을 누리는 것은 불의를 용납하고 타협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