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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골산 칼럼 제1064호 /나는 후회의 사람인가? 아니면 회개의 사람인가?

예림의집 2009. 4. 17. 09:36
창골산 칼럼 제1064호 /나는 후회의 사람인가? 아니면 회개의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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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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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시드니에서 온 백 열 아홉 번째 편지           

      

    나는 후회의 사람인가? 아니면 회개의 사람인가? 

  
   국어사전에 보면 후회(後悔)란 “이전의 잘못을 뉘우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후회란 잘못을 범하고 그 결과 참담한 지경을 당하여 그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후회의 가장 큰 문제는 뉘우친 후에 변화되어지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회개(悔改)란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이라고 나왔습니다. 회개란 잘못을 범하고 그 결과 참담한 지경을 당하여 그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뉘우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치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후회와 회개의 공통점은 잘못을 뉘우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은 후회는 단지 뉘우치는데 그치는 것이고 회개는 뉘우친 후에 고치는 단계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후회한 사람과 회개한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성경에서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후회의 대표적인 사람은 가롯 유다입니다.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넘긴 유다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 하니”(마27:3,4)


   “스스로 뉘우쳐”, 유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분명히 뉘우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뉘우친 후에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하나님께 더 큰 죄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0)


   회개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둘째가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재산 중 내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의 재산을 두 아들에게 각각 나눠 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재산을 물려받자마자 둘째 아들은 그 재산을 다 모아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재산을 다 허비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재산을 다 허비한 아들은 자신의 잘못해 대하여 분명 후회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받은 돈들을 허랑방탕하게 써버리는 것이 아닌데’ 그러나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따르며 함께 즐겼던 주위의 친구들이 자기를 도와줄 것이라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 떨어진 그에게 세상 쾌락을 즐기던 친구들은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침 또 그 나라에 흉년까지 들어 먹고 사는 것조차도 수월치 않았습니다. 주린 배를 움켜쥐며 그는 분명 또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아버지 겉을 떠나는 것이 아닌데’


   그리고도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이방 나라의 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종살이 하면서 그는 또 분명히 후회하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을 것입니다. ‘내가 종살이 할 사람이 아닌데, 내가 여기서 이러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그러나 그것은 또 후회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 그를 아버지께로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마침내 율법에 금하는 돼지까지 치면서 생활합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로 끼니를 채우며 비참한 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또 처절한 후회를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고 아버지의 품을 떠났더니 이제 내가 굶어 죽게 되었구나’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7)


   그러나 다행히 둘째 아들은 그 후회로만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 아버지께 죄를 범했다고 고백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들이 아닌 품꾼으로 써 달라고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15:20)


   탕자는 분명히 수많은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후회하고도 또 그 자리에 계속 안주했기 때문에 그에게 불행은 더 강한 것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후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개하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 왔을 때 그에게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와 탕자와의 공통점은 스스로 돌이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은 가롯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고 탕자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곡하면서 가슴을 치며 눈물을 뿌린 후 다시 자신이 걷던 그 길로 계속 걸어간다면 수 백 번, 아니 수 천 번씩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일어나 세상이 아니라 180도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그러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냉정히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나는 가롯 유다처럼 열심히 후회만 하는 후회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돌아온 탕자처럼 후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의 자리에까지 서는 회개의 사람입니까?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가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나를 위해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솔직하게 나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나는 후회의 사람인가? 아니면 회개의 사람인가?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칼  럼  필  자

김해찬목사

호주 시드니 하나교회

hanachurchmoksa@hanmail.net

흐  르  는  곡

구주여 나를 가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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