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은 감사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난 6월 1일부터 선교단을 준비해 가는 가운데 기대 이상으로 많은 질문과 관심을 보여주십니다. 메일로, 뎃글로 여러 가지를 물어 오시는데요. 그 중에 가장 많은 질문은 "이곳에서 찾는 동역자가 갖춰야 할 첫째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입니다. 즉, 오디션의 첫 번째 관문이 무엇이냐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의 제 소신을 이렇게 말해주곤 합니다.
"저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감사의 샘물이 넘쳐나고 있는가를 제일 먼저 확인해 봅니다."
사실 저는 이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동역 관계를 맺어오는 가운데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이라면 주의 사역은 오직 감사함으로만 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역자로서 갖춰야 할 조건이 많이 있겠지만 저의 경우는 그 첫째 덕목으로 감사함으로 손꼽는다는 말입니다.
흔히 찬양 사역은 재능이 뛰어나면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십중팔구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이 땅 위에서 꼭 받으려고 합니다. 물론 그 재능이 그 사람의 생활 방편임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일날의 헌신까지도 수입원의 하나로 여긴다면 그것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태는 어떤가요? 사례비를 흥정하면서 내가 얼마짜리니 하면서 다니는 사이비 사역자들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나중에 무슨 상을 받으려고 그러는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아닙니다. 무슨 책망을 받으려고 저러고들 다니는지 심히 걱정되고 안타깝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의 일은 열심만 있으면 누구나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함이 전제되지 않은 열심은 대개 자기의 의를 세우기에 급급합니다. 다시 말해서 일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뭔가를 하고 있고 또 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하는 경우입니다. 과거에 제가 젊은 시절에 이러한 함정에 자주 빠지곤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열심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 십상입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대부분 리더에게 오히려 근심을 끼쳐 드립니다. 역시 어느 교회에서나 전도 잘 하고 헌신 잘 하는 사람은 재능이나 열심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그 마음속에 감사의 샘물이 넘쳐나기 때문인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르기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고 말했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는 헌신은 이처럼 하나님도 기뻐하시거니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덩달아 기분 좋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제가 지방에서 찬양사역을 하면서 파송되어 가는 교회마다 찬양단을 세웠었습니다. 전체 단원이 10명 정도로 구성 하였는데 독특한 규칙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자비량 사역입니다. 교회에서 정규적으로 나오는 활동비를 제외하곤 대외적으로 지원을 받은 일이 없었습니다. 악기가 없어서 피아노만으로 찬양을 할 때에도 그것으로 만족했지 악기나 앰프 시스템이 없어서 못하겠다는 소리를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또한 어느 교회에 세미나나 부흥회를 가면 그 교회의 여건에 맞추어서, 최대한 그 교회의 시설을 활용하여 진행하는 노하우를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피아노나 마이크가 없는 곳에서는 기타 한대로 두 세 시간 찬양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찬양단 단복 또한 모두들 자신들이 마련하게 했습니다. 이것 역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습니다. 나아가서 개인 악기는 누구나 자기 자신이 구입해야 했습니다. 단복이나 악기를 본인에게 직접 해결하도록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 고집이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일상생활을 위해서는 그토록 과감하게 많은 돈을 들여서 옷을 구입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필요한 옷은 얻어 입어야만 한다는 말입니까? 또 학업이나 취미 생활을 위해서는 컴푸터를 비롯하여 온갖 전자제품을 서슴없이 구입하면서 어찌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인 악기만은 꼭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사줘야만 할 수 있다고 고집하는가 말입니다. 한마디로 감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찬양단을 훈련하기 위한 수련회나 기도회 때 들어가는 회비나 간식비들을 일체 지원받지 않고 스스로 은혜가운데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준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번 기도회 때마다 헌금을 합니다. 한달 용돈이 비록 4만원 밖에 안 되는 자매도 1만 원씩 헌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찬양단이 매주 2회의 연습을 합니다. 하지만, 팀 재정에서 간식비 치출 이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녁 7시부터 연습을 하기 때문에 모두 배고픔을 느낄 시간인데 누가 말하거나 굳이 순위를 정해주지 않았음에도 연습 때 마다 두 세 명의 단원들이 자신들의 형편껏 준비해오는 간식으로 인해 저희의 모임은 항상 아름다운 교제로 끝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집회지 까지 교통비 또한 자비량이었습니다. 최대한 보유한 교통편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때로는 자리가 모자르면 본인들의 자비로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집회지 까지 찾아가곤 했습니다.
여러분! 만약 학국 교회의 모든 성가대원들이나 반주자, 지휘자, 찬양단에게 찬양으로 헌신하는 조건으로 매 주 1만원씩 헌금을 하고 아울러 매주 2회 이상 연습에 참여하며 성가대 가운이나 단복을 스스로 구입하고, 반주자의 경우 피아노나 오르간까지라도 본인에게 직접 구입하라고 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 그 자리를 계속 지키겠다고 할지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교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는 그런 조건 아래서도 지난 15년간 한 주도 빠짐없이 또 단 한 번의 불미스러운 일이 없이 이 사역을 계속해 왔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역의 근원적 힘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그것은 바로 "감사함"이라는 것입니다. 직장생활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아직 나이 어린 형제, 자매들이 자신의 것을 모두 드리면서 한 주에 세 차례 이상(2회 연습, 1회 이상 집회) 모임을 갖고 목포나 진해, 광양 그 어디까지라도 조퇴를 하고 결근을 해가면서까지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감사함이라는 그 이유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겐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고 찬송전도부 장관으로 세워 주셨으니 영광스러운 그 부르심 앞에 몸둘바를 몰라 그야말로 황송합니다." 이 말은 소아마비로 인해 두 다리를 전혀 사용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광야를 걷는 나그네처럼 묵묵히 주의 일에 헌신했던 한 형제의 고백입니다. 감사, 오직 감사함에서 나오는 신앙의 에너지가 그를 지탱해 주었으며, 매일 매일의 감격이 곧 헌신을 위한 원동력이 되어 항상 뜨거운 구령의 불을 밝힐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비단 구원의 문제만이 아니라도 감사해야 할 조건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참 가난하게 지냈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완전히 흰 쌀밥은 1년에 다섯 번 밖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추석, 설날, 대보름날, 아버지 생일, 내 생일날이 바로 그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유일한 소망은 제발 쌀밥 좀 실컷 먹어봤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먹는 것을 가지고는 절대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버리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어느 시대에나 상대적인 빈곤은 있게 마련이기에 모두 다 똑같을 수만은 없지만 불과 20년 전과만 비교해 봐도 얼마나 살기가 좋아졌는가 말입니다. 거기다 우리는 죽음의 문제까지도 모두 해결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들 그러십니까? 웬 불평과 원망의 소리가 그렇게도 요란한가 말입니다. 광화문을 가득 매우는 사람들의 함성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못살겠다. 힘들다. 배고프다" 내 그렇습니다. 지금은 험난한 시기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에 비해 많은 것을 풍성히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힘들 때 일수록 과거의 고통에서 지금껏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예배하며 잠잠히 주님의 사역에 동참해야할 때입니다. 말로써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움직이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대통령을 만나 뵈려면 접견표를 가슴에 달아야 하는 것처럼 주의 일을 위해 성소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믿음이라는 신분증에 감사라는 소인이 선명하게 찍힌 헌신의 표를 가슴에 달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가슴에는 과연 어떤 표가 달려 있습니까?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 가운데서 마지못해 헌신하는 이 시대의 사명자들. 우리 모두를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 4:11)
제발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이 내 재능이나 내 의지 때문이라고 뽑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고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셨으니 나는 단지 쓰임 받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하라는 듯이 아닌가 말입니다. 사실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서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생색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아울러 나를 위해 마지막 한 방울의 물과 피까지 다 쏟으신 주님 앞에서 내가 처한 환경,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토록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고 앉아 있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세상 적으로 볼 때에야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은 인가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남들은 어둠이 깔리면 술집으로, 노래방으로, 여관으로 향하여 자신의 쾌락을 쫒고 휴일만 되면 산과 바다로 줄행랑을 치는데 비록 시원찮게 보이는 신앙생활 이지만 그래도 믿는답시고 여름이라고 물놀이를 제대로 갈 수가 있습니까? 휴가는 교회 수련회에 맞추어 그 기간 동안 휴식이 아니라 봉사를 위해 다 쓰는 여러분의 그 마음을 누구보다 주님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 즐거움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더 이상 일락을 좇아 살 수만은 없는 처지이고 보면 차라리 주이 성업이라도 자원함으로, 감사함으로 해서 예수 믿는 즐거움, 사역하는 즐거움이나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보자고 스스로 위로겸 다짐을 해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먼저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고 노래했는데 그와 같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 주변에 무수히 쌓여있는 은혜의 선물 축복의 보화를 우리는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써 감사의 찬송이 터지고 아무 조건 없이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전심전력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건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감사라면 그것은 진정한 감사라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진정한 감사의 고백은 어떤 내용이어야 할까요? 적어도 선지자 하박국의 고백만큼은 되어야 합니다. 하박국 3장 17,18절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이 시간의 강의를 다시한번 정리해 봅시다. 흔히 사람들은 무엇을 했거나 지금 현재 무엇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크게 강조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때문에 지금까지 어떻게 해왔고 또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냐?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시 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찬송을 쉬지 않고 불러왔습니다. 헌금 역시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로 많이들 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열심도 세계 어느 나라 성도들 보다 남다르게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전심으로 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히 한번 돌아보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이름에 합당하게 해왔는가에 대해서는 스스로 양심의 소리를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돌아볼 필요도 없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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