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한테만 이렇게 웃어주는 거지?
태어난 지 한 달 넘은 아기. 엄마가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줄 때마다 방실방실 배냇짓을 해대며 애간장을 녹인다. 그런 아기를 보며 엄마는 “어머, 벌써 내가 제 엄마인 걸 아나봐”라며 사방에 전화 걸어 자랑하기 바쁜데…. 엄마가 믿는 것처럼 신생아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엄마’를 알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엄마의 착각’이다. 생후 6개월이나 되어야 겨우 엄마를 어렴풋이 인식하고, 8~9개월은 넘어야 비로소 엄마에 대한 애착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신생아들이 엄마를 보고 웃는 까닭은 단순히 눈앞에 어른거리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 아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를 아는 척하고, 돌봐주는 사람에게 웃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다. 한마디로 신생아가 엄마에게 웃는 것은 엄마를 인식해서가 아니라 ‘나를 잘 좀 봐주세요’ 하는 의미의 social smile. 달리 말하면 아이는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아 우는 게 아니라 신속 정확하게 자신을 돌봐주던 존재가 없어져 ‘불편해서’ 우는 것이다. 아기는 자신의 미소가 자신을 돌보는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거울 속 있는 게 너인지 벌써 아는 거야?
엉금엉금 기어서 거울 앞에 착 달라붙어 있는 아이. 자기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이런 저런 표정을 짓고, 방긋~ 뜻 모를 웃음도 짓는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 거울 속에 비친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은 인식하지 못한다. 거울 속의 자신과 실제의 자신이 같다는 사실을 인식하려면 적어도 18개월 이후는 돼야 한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거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기존에 맛보지 못한 다양한 재미를 선사하기 때문. 내가 웃으면 따라 웃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역동적인 녀석을 보는 것으로 아이는 충분한 재미를 느낀다. 아직 ‘엇, 이 녀석이 나를 똑같이 따라 하네’ 정도의 인식도 없는 상태. 아이가 까꿍 놀이에 열광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까꿍’ 하고 나타났다가 문 뒤에 숨으면 아이는 엄마가 ‘진짜’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까꿍’ 하고 다시 등장하면 없던 게 갑자기 생겼으니 얼마나 신기할까? 수백 번 해도 질리지 않고 ‘까꿍’ 할 때마다 아이가 웃으며 자지러지는 것도 이런 이유다.
방귀 ‘뽕’, 더러운 ‘똥’이 뭐가 그렇게 좋니?
아이들은 ‘똥’에 관심이 많다. 더러운 것이라는 편견도 아직 생기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이 괄약근을 조절해 만든 ‘창조물’이라는 성취감이 있는 것. ‘나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구나’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도 대단하다. 어떤 아이들은 똥을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분으로 여기는데, 자신의 ‘분신’을 관찰하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않은가?
아이들이 ‘똥’, ‘방귀’, ‘뿡’ 같은 단어를 말하거나 관심을 보일 때 어른들의 반응도 영향이 있다. 지속적인 관찰을 통해 ‘아, 이런 말을 하면 싫어하는구나’ 나름 귀여운(?) 반항의 표시일 수도 있고, 어른들의 표정이 일그러지거나 제재하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반대로 똥을 두려워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이는 자신의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하는 경우다. 우습지만 함부로 변기 물을 내리면 똥과 함께 자신도 없어질까 봐 두려워하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이럴 때는 “이제 똥하고 안녕할까” 하는 식으로 아이를 안심시킨 후 변기 물을 내리도록. 이래저래 똥은 아이에게 중요한 의미다.
높은 곳에 기어이 올라가야겠니?
소파나 침대, 계단, 하다못해 바닥에 책 몇 권이라도 쌓여 있으면 꼭 그 위로 밟고 올라서는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원하는 아이들의 ‘탐험 정신’에서 비롯된다. 시선이 높아짐으로써 평소 눈높이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니 얼마나 신기하겠는가. “다치면 어쩌려고 자꾸 올라가!”라는 엄마의 야단을 좀 듣더라도 업그레이드된 ‘뷰(view)’가 주는 즐거움을 포기할 만큼은 아닌 것이다. 좀 더 큰 후에는 ‘높은 곳’을 향하는 이유도 좀 달라진다. 지금의 자신보다 더 크고 강한 존재가 된다고 믿기 때문. 사실 대부분 아이들은 5~6살이 넘어도 위험에 대한 인지가 거의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바닥에 안전 매트를 깔고, 베란다에 쌓인 박스와 책을 치워두는 수밖에 말이다.
왜 친구의 장난감을 네 것이라고 우기니?
친구가 가진 장난감을 ‘내 거야’ 하며 달려드는 아이. 하지만 상대 아이인들 앉아서 당하겠는가? 티격태격하는 걸 발견했을 때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후다. 분명 장난감은 친구의 것이었으니 엄마의 민망함이란…. 버릇없이 키운 것도 아닌데, 어째서 남의 것을 제 것이라고 우기는지 알 수가 없다.재미있게도 이 시기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여긴다. 머릿속에 아예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다. 그토록 당당하게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것도 이런 이유. 따라서 아이가 남의 물건을 제 것이라고 떼를 쓸 때 “네 것이 아니야” 라고 혼내면 아이는 몹시 억울하게도 제 것을 뺏긴 느낌에 사로잡힐 것이다. 따라서 “물론 네 것이면 좋지만 다른 친구 거란다” 하며 차분히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이 먼저다.
여자아이 아니랄까 봐 분홍색 옷만 찾는 거야?
많은 여자아이가 ‘분홍색’을 좋아한다. 몇몇 여아는 놀랄 만한 ‘집착’을 보이며 검은색이나 파란색 옷은 입을 수 없다고 우기기도 한다. 그 이유를 두고 두 가지 가설이 팽팽한 상황. 첫 번째는 본래 타고나는 ‘여성의 기질’이라는 것이다. 다른 어떤 색보다 분홍색을 더 매력적으로 느끼도록 말이다. 반면 무의식적인 사회학습의 결과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옷이든 육아용품이든 학용품이든 남자아이는 파란색, 여자아이는 분홍색 위주로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자라면서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분홍’을 기대한다고 여기니 자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 여자아이에게 바비 인형을, 남자아이에게 로봇을 선물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여자=분홍’, ‘남자=파랑’의 공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남자아이가 분홍색 옷을 입혀달라고 조를 수 있고, 여자아이 역시 인형보다 로봇에 훨씬 큰 흥미를 보이기도 한다. 이때 “여자애가 왜 그런 색을 골라?”, “남자라면 파랑색을 입어야지” 하는 엄마의 반응은 최악. 아이는 ‘아,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구나’ 하는 죄의식에 사로잡게 된다. 결론은 아이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 원하는 색의 옷과 장난감을 사주라는 것.
엄마 화장품에는 제발 손대지 말아줄래?
이 시기의 아이들은 쉽게 말해 ‘따라쟁이’다. 엄마가 걸레질을 하면 제 손수건을 가져와 방바닥을 훔치고, 언제 화장하는 걸 봤는지 립스틱 범벅인 채로 화장대 의자에 앉아 있곤 한다. 아이의 이런 모방 행동은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으로, 이를 통해 여러 상황이나 사물 등을 접하면서 각각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 배워가게 된다. 따라서 아이가 엄마 옆에서 무언가 함께 하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면 일을 그르치지 않는 선에서 동참시키는 것이 좋다. 부엌놀이 세트, 인형 목욕시키기, 인형용 유모차 등의 역할놀이 장난감 또한 이런 아이의 ‘모방 욕구’를 효과적으로 해결해주는 도구다.
똑같은 그림책을 100번씩! 읽어주는 엄마가 다 지겹다
같은 영화를 연속해서 두 번 본다면? 어른이라면 분명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일단 한번 꽂히면(?) 책이든, 비디오든, 장난감이든 무한 반복 모드로 재생해도 절대 지겨워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아이들은 ‘반복’을 좋아한다. 같은 장소를 계속 뱅그르르 돌고, 이제 외울 지경이 된 <뽀로로> 비디오를 두 달째 보고 또 봐도 아이들은 볼 때마다 새롭게 느낀다. 내용은 알더라도 상황 자체가 그전과 절대 ‘동일’하지 않고, 매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견된 ‘기대감’이 아이를 더 흥분시킨다. 오랜 반복 학습으로 ‘이쯤에선 뭐가 나올 때가 됐는데’ 하는 느낌이 있는데, 실제로 그것이 눈앞에 떡 하니 등장하면서 아이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읽어주는 엄마만 지겹지 아이는 같은 그림책에도 절대 싫증을 내지 않는다. 속으로야 ‘에휴, 또 이걸 읽어 달라고…?’ 하겠지만 아이에게는 늘 첫 그림책인 셈. 그러니 엄마들이여, 기운 빠지는 목소리는 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