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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2680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23. 3. 14. 12:58

예림의집 2680번째 이야기

 

따뜻한 하루

습관이란 무엇인가?

시골 마을에 지혜롭기로 소문난 스승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습관이란 무엇인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들을 데리고 동산에 올라가 네 종류의 식물을 보여주었습니다. 첫째는 막 돋아난 어린 풀이었고 둘째는 뿌리를 내려 조금 자란 풀이었습니다. 셋째는 키 작은 어린나무였으며 넷째는 다 자라 키가 큰 나무였습니다. 그리곤 첫째와 둘째 풀을 뽑아보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했고 모두가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두 가지 풀을 뽑았습니다. 이어서 스승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 키 작은 어린나무를 다치지 않게 뽑은 다음에 다시 심어 주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약간의 힘을 준 뒤에야 뽑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나무도 뽑아보라 했지만, 이번에는 제자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 뽑으려 해도 나무는 뽑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뽑히지 않는 나무를 보며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습관의 모습이다. 습관이란 처음에는 마음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자라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쁜 습관은 아예 처음부터 뿌리 뽑고 좋은 습관은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도록 키워라." 습관에는 좋은 습관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좋은 습관으로 나쁜 습관을 덮어씌우는 것이 가능한데 그러기 위해선 21일, 66일의 법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로운 습관을 뇌에 각인시키는 21일, 몸에 각인시키는 66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부정적인 생각과 나쁜 습관을 골라낸다면 훌륭한 인품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림가족 이야기

잘못 가르친 것이겠지요!

세대 간의 차이를 극복하려면, 나이 든 세대는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젊은 세대는 나이 든 세대의 충고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나이 든 세대는 비록 젊은이들이 하는 짓이 관습과 다르더라도, 그걸 틀렸다고만 할 게 아니라 포용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젊은 세대는, 나이 든 세대의 충고나 경고가 잔소리 같아서 듣기 싫어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이 든 세대는 젊은 세대가 모르는 것들을 이미 경험해 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의를 지킬 줄 알아야 하고,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두 세대 공히 제대로 된 인간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대 간의 갈등도 완화되거나 치유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인문교육이라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나는 미국대학에서 단기 체류 중인 어느 한국인 명예교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금년 1월 1일에 서울에 있는 옛 제자에게 신년인사 이메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읽은 걸로 되어 있는데 아무런 답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 은사가 보낸 메일에 답을 하지 않는 제자도 있나요? 그것도 신년인사 메일이었는데.. 그리고 새해인사는 제자가 스승에게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하고, 내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는 씁쓸하게 웃더니, “그 제자도 인문대학 교수랍니다. 언젠가 자기도 자기 제자에게 똑같이 당해봐야 자기 잘못을 깨닫게 되겠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군요. 요즘 젊은 세대는 우리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세대 차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봅니다. 그건 사실 예의와 상식과 인간성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의 제자라는 사람은 예의가 없고, 상식이 없으며, 인간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은사가 아니어도 새해인사 메일에는 답을 하는 것이 예의이고 상식이며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복잡한 나에게 그가 후회가 된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 제자를 잘못 가르친 것이겠지요!”(김성곤 서울대명예교수)

사실, 저 자신도 인사성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사성이 밝지 못할 경우, 저 자신에게 어떤 손해가 있게 되는지 직접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이후, 저 나름 부지런히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설날과 추석, 성탄절 전후로 해서, 그동안 알고 지낸 분들과 은혜를 입은 분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톡에 생일자 명단이 뜨면 반드시 축하 메시지를 보냅니다. 아무튼, 나이 든 세대나 젊은 시대를 막론하고, 그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세대를 불문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예림단장 칼럼

재미없고 지루한 기독교?
 
누군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무래도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 여러분의 평소 생각과는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는 것이 그분의 뜻에 포함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선포할 때 천사들이 전한 메시지를 보면, 누가복음 2장 10절,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님은 "큰 기쁨"을 주시려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기쁨을 우리 안에 가득 채워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복음은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재미없는 종교라고들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생각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에 관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꿈으로써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게 만들어야 합니다.
기쁨 없는 기독교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뜻을 잘못 보여 줄 뿐 아니라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쁨 없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신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기쁜 모습을 보고 그분께 끌렸습니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기쁜 모습을 보여야 사람들이 우리에게 끌릴 것입니다. 기쁨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며, 파티(축제)는 기쁨을 가져옵니다.

 

새찬송가 부르기

 

예림의집 Q.T.

사울의 광기 어린 보복
 
"왕이 사람을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사울이 이르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에게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냐 하니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하건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알리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사무엘상 22장 11-23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에돔 사람 도엑의 고발을 들은 사무엘이 제사장 아히멜렉을 비롯하여 놉 땅의 제사장들을 모두 죽이는 하나님 없는 자의 광기 어린 보복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울이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들을 부릅니다. 다윗과 공모해 자신을 대적했다며 사울이 추궁하자, 아히멜렉은 다윗을 변호합니다. "제사장들을 죽이라!"라는 사울의 명령에 호위병들이 따르길 꺼리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에돔 사람 도엑에게 명령하여 모두를 도륙합니다. 그 혼란한 와중에 하나님께서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을 보존하사 다윗에게로 도망하게 하십니다.
 
아히멜렉을 추궁하는 사울(11-16절).
하나님의 사람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중요한 표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말과 판단과 행동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적이 된 자의 특징은 광기와 무모함과 무자비함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바른 판단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대제사장 아히멜렉과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왕궁으로 부릅니다. 이어서 사울은 아히멜렉에게 다윗의 반역을 도왔느냐며 추궁합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충신이고 왕의 사위이며 왕의 호위대장이고 왕의 일가이기에 도운 것이지, 반역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실상은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모든 사정을 올바로 말하지 않았기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윗을 도운 것뿐입니다. 사울은 아무런 조사나 검증 절차도 없이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기 어린 판결입니다. 자신의 왕권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된 사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들을 죽이고, 무죄한 피를 흘리는 일에 망설임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에게서 버려진 이유입니다. 반역이라는 눈으로 상항을 바라보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의 감정과 판단은 어떠할지 묵상합시다.
 
제사장들을 죽인 도엑(17-23절).
사울은 제사장들을 반역죄로 몰아 신하들에게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이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사장이라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으면 처벌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단지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몰아 제사장 집단을 몰살하는 것은 불의한 처사입니다. 도엑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인이기에 거리낌 없이 85명이나 되는 제사장을 죽이고 성읍을 진멸합니다. 순종할 일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은 큰 악입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사무엘상 15:2-3, 7-9). 자기 편리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저버린 사울은 에돔 사람 도엑의 말만 듣고 권력 수호에 대한 집착으로 제사장 성읍에서 선량한 사람들을 진멸해 버립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비아달은 다윗 진영에 합류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주의함과 안일함이 부른 대참사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상 속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우리가 동조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무엇이 있는지 묵상합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의 불의함이 위세를 떨치고 하나님 이름은 땅에 밟히는 현실을 보며 눈물로 부르짖습니다. 또한 주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보면서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고 애통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을 경계하게 하시옵소서.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악의 자리에 앉지도 서지도 않게 아시옵소서. 하나님의 충실한 군사로서 늘 악을 멀리하고 말씀을 가까이하며 경건하게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

그리스도인의 삶

주님을 향한 사랑 회복하기
 
저는 "평생토록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눈물이 마르지 않기를 원합니다!"라고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결단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목회를 해 보니 주님을 향한 나의 첫사랑을 평생토록 간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명예와 직장과 배우자와 자녀 때문에는 걱정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의 비극은 돈이 없어서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때문에 오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비극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 찾아옵니다.
짜증 나는 일이 많아지고, 마음이 공허하고, 불안하고 두려운 이유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피 묻은 사랑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과거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닌 바로 오늘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예전처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변질되면, 나를 향한 주님의 완전한 사랑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의 회복이며, 사명의 회복입니다.(꿈을 버려라/정홍준 목사).

 

신앙생활 가이드

이웃을 향한 사랑⑦
 
출애굽기 20장 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마지막 계명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이 계명을 통해서 십계명이 시민법에서 도덕법으로, 외적인 행위에 비중을 둔 법에서 내적인 경건에 관심을 둔 법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탐욕을 품었다고 해서 법정에서 고소당하지는 않습니다. 탐욕이란 행동이 아니라 일종의 마음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도둑질의 관계는 분노와 살인, 음욕과 간음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죄악 된 행동, 심지어 범죄로 전락할 성향이 다분합니다. 바울은 회심하기 이전에 그 계명이 자신에게 끼쳤던 영향력을 인정했습니다.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을 몰랐다면 죄가 무엇인지 자신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흠이 없다고 믿었으며 외적인 의에 비추어 볼 때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이 그의 마음 상태를 밝히 보여주는 바람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7장 7-12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다른 서신서인 에베소서 5장 5절에서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탐욕이 인간에 대한 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 이상으로 그보다 더 크게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갈망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리를 다른 그 무엇(누구)에게 내주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탐욕은 이기심입니다. 실제로 이 계명은 소비 사회의 탐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냉소적인 무관심을 그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탐욕의 반대는 만족입니다. 
만족이란 말은 신약 성경에서 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바울 역시 무수한 고난과 궁핍을 겪으면서도 빌립보서 4장 12-13절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순례자이며 본향을 찾아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근본적으로 만족해야 할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6-8절,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바로 여기에 제10 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탐욕이라 불리는, 불순하고 파괴적인 욕망에 대한 해독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검소함과 관용과 자족의 조화입니다!

 

기도의 횃불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하박국 2:2-3).
 
오래 참으신 주님!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기다리며 광야 사십 년의 모진 역경을 견딜 수 있었던 것처럼, 환난과 질고 속에서도 주님의 약속을 끝까지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신 말씀대로 날마다 부르짖는 제 기도가 거절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상하고 더 좋은 것으로 주실 줄 믿고 끝까지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고향을 떠나 오랜 기다림 끝에 "여호와 이레" 주님이 준비하신 아들을 얻은 것처럼, 하나님이 지금도 저를 위해 준비하고 계심을 깨달아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가물어 메마른 제 심령에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실 그때를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제 기도가 제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응답되지 않는다 하여도 자손의 때에 가서는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고 그때를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그리스도를 보기까지 죽기를 연기했던 시므온처럼, 언제나 주의 날을 기다리며 소망 중에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추천 찬양

 

날마다 감사

임금님의 상은 누가?
 
어느 날 임금님께 궁중 요리사가 맛있는 요리를 해서 올렸더니 맛에 감동한 임금이 요리사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임금님! 제가 아무리 요리를 잘하려고 하여도 재료가 좋지 않으면 이런 음식을 만들 수 없사오니 이번에 좋은 재료를 납품해 준 상인에게 상을 내리시옵소서." 임금이 요리사에게 재료를 납품한 상인을 불렀더니 이번엔 상인이 농민에게 공을 돌렸습니다. 결국 임금은 그 농사꾼을 궁궐로 불러 상을 내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농사꾼은 임금에게 이렇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상은 제가 받을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봄에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가꾸어도 하나님이 이처럼 좋은 채소를 만들어 주지 않으시고, 경작할 땅을 만들어 주지 않으시고, 때마다 비를 주지 않으시고, 때마다 따사로운 햇볕을 주지 않으셨다면 어찌 제가 이런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다만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을 뿐이니 참으로 상을 받아야 한다면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