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번 종점에 있던 우리 집
13번 종점에 있던 우리 집
부모님의 관계는 좋지만 가난한 게 덜 불행할까요? 아니면, 부부사이는 나빠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게 덜 불행할까요? 안타깝게도, 우리 집은 부모님 사이가 나쁜 데다가 가난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 집은, 거의 매년 이사를 다녀야 했고, 매일같이 밤마다 부모님의 고성에 잠을 뒤척여야 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는 허름한 벽돌집이 나란히 들어서 있었습니다. 버스 차고지가 있어서 "13번 종점"이라고 말하면 누구나 알던 가난한 동네에, 우리 집이 있었습니다. 단독주택의 1층이었는데, 원래는 방이 3개였던 집을 두 채로 나눈 형태였습니다.
방 2개에 거실과 부엌이 있던 앞집엔 우리가, 방 1개에 다용도실을 부엌으로 개조한 뒷집엔 왕가네 다섯 식구가 살았습니다.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가구는, 한 식구처럼 밥을 나눠먹으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지만, 소음도 공유해야 했습니다. 문에 입을 바짝 대고 암호를 전달하는 건, 당시 초등학생들에게 꽤 재미있는 놀이가 되기도 했지만,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서로의 공간을 침범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그 동네에 사는 6년 동안, 네 번 이사했습니다. 집은, 형편에 따라 반지하일 때도 있었고, 컨테이너일 때도 있었으며, 2층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 사이, 밀레니엄 시대가 열렸고, 중학생이 된 저는 다양한 동네아이들이 모이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가난이 뭔지 알게 됐습니다. 가난은 옆집 문에 걸어두고 오고 싶은 것, 가난은 커다란 교복, 가난은 급식비 미납명단, 가난은 노메이커, 가난은 이사였습니다. 변기통으로 쥐가 드나들고, 비가 온 다음날이면 꼽등이(벌레)와 지렁이가 나타나던, 그리고 온갖 전자제품에 빨간(압류) 딱지가 덕지덕지 붙어있던 집을 옮겨 다니기를 3년을 하고서야, 우리는 13번 종점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곳을 벗어나는 날은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이미화)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얽매여 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과거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겁니다. 우리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옛것을 익힘으로써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사실을 교훈 삼는다는 뜻입니다.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 추억이 될지언정,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어렵던 시절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오늘의 풍요에 빠져 살 경우, 결코 원치 않아도 다시 그 어려웠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