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 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아지를 바라보면서 웃어대는, 입이 찢어질 것 같은 그런 웃음을 아이에게 보여주게 된 것은, 참으로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실 거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딸은 여전히 저로 하여금 죄책감을 갖게 하는 생성기였습니다. 꿀짱아는 도무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훗날 알게 된 바, 꿀짱아는 기질적으로 말이 없고 표정이 적은 아이였습니다. "행복한 아이는 까르르 웃는다."라는 것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 중의 하나였습니다. 행복해도 큰 소리로 웃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꿀짱아가 그랬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소리 없이 벙긋 웃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초보 엄마였던 저는 제가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꿀짱아가 내내 뚱한 표정으로는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에 수시로 쫓겼습니다. 우리가 허둥거린 가장 큰 이유는 아이의 심한 낯가림이었습니다. 꿀짱아는 정말 치가 떨리도록 낯을 가렸습니다. 아이가 피부 접촉을 용납하는 사람은 친정엄마와 저 두 사람뿐이었고, 낯선 얼굴이 있으면 내내 불편해했습니다. 그러나 친정엄마는 아이의 낯가림에 관대했습니다. “괜찮다. 똑똑한 아이들이 낯을 가린다. 뭘 좀 안다는 뜻이거든.”
하지만, 저는 미래에 아이가 똑똑할 것이라는 희망만으로는 쉽사리 관대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낯을 심하게 가리는 바람에, 저는 타인과의 교류가 어려웠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몹시 피곤했습니다. 낯을 가리지 않고 벙긋벙긋 웃으면서 낯선 사람의 품에도 척척 안기는 이웃집 아이들이 너무너무 부러웠습니다. “네가 어릴 때 한 짓을 생각하면, 네 딸이 낯을 가리는 것은 당연하지. 너처럼 심하게 낯을 가린 아이가 세상에 또 있었을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가 옳았습니다. 사실 딸더러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게, 꿀짱아의 낯가림은 유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낯가림으로 악명 높았습니다. 삼촌들이나 고모부처럼 남자목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저는 기겁을 하고 자지러져서, 할머니가 저를 데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숨어야 했습니다.(심윤경)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한테서도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부모나 자녀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바로잡도록 힘써야 합니다. 요컨대, 누굴 탓하거나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는 모순과 허물을 고쳐나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전서 1장 8-9의 바울의 격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