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인 시각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벅차오를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인 것 같습니다. 얼마나 귀한지 모기에 물릴까, 보이지도 않는 세균에 감열 될까 전전긍긍하기 마련입니다. 이직 옹알이도 하지 못하는 아기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며 모든 감각을 집중하여 아기의 조그마한 몸짓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늦어서 잘못될까 이기의 원하는 바를 이해한 즉시 슈퍼우먼이 되어 채워주려 합니다.
이 대만큼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가 있을까요? 시간이 흐르면 아기의 반복적인 몸짓에 의해 부모의 선입견이 형성되기라도 하면 아기의 다른 몸짓에 반응을 하지 않으려 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아기는 부모의 틀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하듯이 아이들은 그 변화무쌍한 세계에서 부모보다 더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고의 틀을 깨지 못하는 부모를 고리타분하다고 정의를 내립니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이 부모와 자녀 간의 소통에 벽을 형성하고 분리와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아기가 보모의 마음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부모가 아기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부모가 갓 태어난 아기를 잘 이해하는 것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잘 안다고 하는 순간 아기와 소통이 아닌 불통의 벽은 높아만 가는 것입니다. 즉, 내 속으로 낳은 아이라 할지라도 내 것이 아닌데, 나의 선입견의 틀에 가두기 시작하면 불통이 시작됩니다. 옹알이를 지나 또박또박 말로써 지기의 의사를 표현할 만큼 성장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같이 살았기 때문에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지요.
부모의 세계는 자기의 틀에 갇혀 한정적이지만, 날마다 성장하는 아이는 변화무쌍한 세계에서 틀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아서 울타리의 한계가 어디까지 이를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들을 모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갓난 아기를 대하듯이 아이를 마치 타인과 얘기하듯, 객관적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항상 같이 있고 싶은 타인을 대하듯이, 더 알고 싶은 애인을 대하듯이, 아이의 생각을 읽으려 하기 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기 위해 객관성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소통의 꿈은 이미 이루어져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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