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신약신학

문법적인 오류

예림의집 2016. 12. 8. 11:00

문법적인 오류

 

복잡한 구문론적인 단위에서는 단일한 단어에서보다는 훨씬 더 많은 변수들이 있으며, 따라서 오류들도 훨씬 더 많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장을 이전 장보다 더 짧게 쓰고 아주 쉬운 예들을 사용했다. 그 이유는 첫째, 단어 연구를 하면 한 만큼 오류가 쌓이기 때문이고 둘째, 지난 수십 년 간의 성경 연구에서 문법적인 분석은 그리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 헬라어의 유연성(flexibility)

엔트로피의 원리가 물리학에서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언어들에서도 작용한다. 언어들은 시간과 함께 파괴된다. 즉 구문론은 덜 조직적이 되며, 예외는 늘어가고, 형태론은 간소화 된다. 이 같은 사실은 비교적 더 조직적인 고전 헬라어 시대의 문법을 헬라어 신약 성경에 단숨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 말은 지난 세기말에 쓰여진 신약 성경 헬라어 본문에 관한 많은 전문 주석들이 많은 문접적인 사항들에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고전들에서 훈련받아 온 문법학자들은 신약을 읽을 때 특정한 실수들을 하지 않으려면, 헬레니즘 헬라어를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다양한 시제와 태와 관련한 오류들

시제는 헬라어 시제들을 가리키는 매우 정확한 방법이라는 견해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 시제(tense)라는 단어는 현재시제, 미래시제 등 시간적 개념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실제로 현재 시간을 가리키지 않고 과거를 가리키는데도 형태론적으로 현재시제인 어떤 동사가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과거 현재 시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는 끝도 없이 많다. 본 책에서는 시제를 단지 형태학적 형태(form)를 가리키는 데만 사용할 것이다. 거기에는 시간과 관련된 어떤 암시도 없다.

헬라어 시제는 행위의 시간이나 발생한 행동의 종류 모두를 시사하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을 염두에 둥 채, 최근의 특별한 시제에 관한 논의를 다시 검토하는 것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헬라어 문법책에서 전개하는 표준 범주들을 시작하여 난점들과 오류들을 지적한 후 양상적(aspectual)인 접근을 할 것이다.

 

1. 아오리스트(부정과거) 시제

아오리스트(aorist)는 이름 그대로 장소가 없고, 불확정적이다. 그것은 그 행동이 고유한지 혹은 반복되는지, 기동적인지 순간적인지, 과거의 것인지 혹은 성취된 것인지를 상술하지 않고, 단순히 해동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아오리스트 동사가 존재하는 것은 그 행위가 단 한번이거나 과거의 사건이거나 혹은 시간적으로 순간시점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아오리트 동사가 쓰였다는 사실만으로 이러한 결론을 분명히 지지하는 근거를 얻을 수 없다. 아오리스트가 대개 과거에 행한 어떤 행위를 가르키는 직설법에서조차 시간적인 과거성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아오리스트 시제가 특정한 문맥과의 관련성 속에서 대단히 광범위한 행위의 범위를 묘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아오리스트 시제가 다른 시제보다 더 유연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오리스트 시제는 다른 시제보다 의미론적 윤관을 뚜렷하게 만드는 특성이 부족하다. 한정성은 아오리스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문맥이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부적합하다고 말하는 것은 언어가 작동하는 방법에 관한 근본적인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술정적 아오리스트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형태사으이 정보나 심지어 아오리스트 시제 동사 그 자체가 배타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미론적 정보의 결과들을 절달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이 이름은 어떤 특정한 문맥의 나머지 부분과의 관계 속에서 아오리스트 시제 동사가 가지고 있는 의미론적 정보의 결과를 전달한다는 것을 뜻한다.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형태학적인 형태의 의미론과 화용론을 구분해야 한다. 이러한 구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명히 두 가지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오류 가운데 더욱 일반적인 오류는 아오리스트 시제에는 늘 아주 특정한 의미가 있다고 잘못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아오리스트 시제에는 심지어 다양한 문맥 안에서, 그 문맥과 상호 작용을 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 아오리스트의 의미론적인 가치를 넘어선 어떤 의미론적 중요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오류이다.

 

2. 1인칭 아오리스트(부정과거) 가정법

결정유도적 가정법이 필연적이거나, 바람직하거나, 가능하거나, 혹은 의심스러운 것을 다루는 의문문에서의 가정법 단수(및 복수) 1인칭 사용이란는 것이다. 그것은 행동의 적절한 과정을 결정하는 데 필요하다. 때로 그 질문은 수사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답변을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지적하는 내용이 정확히 말해서 오류는 아니다. 결정유도적 가정법에 대한 전형적인 정의는 실제로 세 가지 독립된 범주를 아우른다. 권고적 과정법과 같이 참된 결정유도적 가정법은 자기반사적이다. 즉 동사의 주어가 나타내는 1인칭은 주어 자신이 대답해야 할 질문을 던진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범주는 유사 결정유도적 가정법이다. 가정법의 1인칭 주어는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으며, 직접적인 대답을 구하며, 다른 누구에게 질문하거나 혹은 외부에서 대답을 찾거나 자신에게 묻는다는 암시가 전혀 없이, 단지 어떤 진술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로서 다른 누구에게 질문한다. 형식적으로는 그 질문이 개방적이고 결정유도적이기 때문에 가정법이 유지되고 있다.

지금까지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첫째, 많은 문법적인 영역이 여전히 연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으며, 둘째, 연구 결과들이 석의적으로 유용하고, 셋째, 형태학적 혀태의 의미론과 문맥의 화용론을 조직적으로 구분하는 작읍을 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는 동안에 많은 문법적인 범주들은 드러나는 만큼 많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3. 중간태

중간태와 관련한 오류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실제로 중간태가 나타나는 곳마다 그것은 재귀적이든지 혹은 주어가 스스로 행동하는 것임을 암시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이 오류는 많은 책에서 볼 수 있으며, 대개 몇몇 인기 있는 교리를 떠받치기 위한 목적 때문에 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 중간태가 암시하는 범위는 대단히 넓다. 간혹 그것은 이태동사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재귀적인 행동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종종 중간태는 주어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동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신약 성경에 나오는 pauo동사의 사용을 연구할 때, 그 동사는 규칙적으로 중간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능동태에서 동사의 사전적인 의미는 ‘멈추다, 중지시키다. 구제하다’ 등이다. 반면에 중간태에서는 ‘자신을 멈추게 하다, 그치다’이다. 하지만 분명히 스스로 ‘스스로 멈추다’란 뜻은 없다. 그리고 몇몇 구절들은 그러한 뉘앙스를 이 동사의 중간태 형태의 자연발생적인 의미론적인 뜻으로 취급하여 배제시키고 있다.

 

다양한 통사적 단위들과 관련된 오류들

 

1. 조건문

첫 번째는 일반적인 오류이다. 종종 실 조건문이라고 부르는데 제 1 조건문에서는, 조건절은 사실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전제를 근거로, 많은 사람들은 제 1 조건문의 조건절을 ‘만약(if)'이 아닌 ’왜냐하면(since)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사실 오류이다. 제 1조건문에서 조건절은 주장을 위해서 사실이라고 전제된다. 하지만 실제로 전제되는 것은 사실일 수도 잇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는 전제의 실제를 강조하는 것이지 전제되고 있는 내용의 실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제 3 조건문은 몇몇 성취의 기대를 의심스럽게 하거나 혹은 그 반대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보이어는 제 3 조건문이 가능성이나 혹은 불가능성, 개연적 혹은 비개연적인 성취에 관한 암시가 전혀 없는 미래의 일을 지시한다는 것을 간단히 보여주었다.

센째로, 보이어 자신도 제 3 조건문의 귀결절에는 분명한 ‘시간 지시’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동사가 명령법 아오리스트, 즉 ou me 가정법이든지, 현재 직설법과 함께 하든지, 미래 직설법이든지, hina를 동반한 아오리스트 가정법이든지, 혹은 몇몇 다른 형태든지 관계없이, 모든 귀결절은 의미상 미래라고 주장한다.

 

2. 관사: 예비적 고찰

헬라어에서 정관사는 철저하게 분류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몇몇 용례들은 명백한 원리보다는 그것을 ‘말하거나’ ‘기록한’ 사람의 ‘감’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지침이 될 수 있는 법칙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간과하거나 이해하지 못해서 사람들이 많은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 특별히 헬라어 본문은 관사가 있기 때문에 영어 번역에도 관사가 있어야 한다고 추정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게 된다. 영어와는 달리 헬라어에는 부정관사가 없다. 그리고 헬라어의 정관사는 종종 영어의 정관사나 혹은 부정관사의 용례와는 판이하게 다른 기능을 한다.

3. 관사: 그랜빌 샤프 법칙

샤프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만약 두 실명사가 kai로 연결되어 있고, 둘 다 관사가 있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지칭한다. 하지만 만약 첫 번째 것에는 관사가 있고 두 번째 것에는 없다면, 두 번째 것은 첫 번째 것과 동일한 사람이나 사물을 가리킨다. 물론 그 법칙은 세 개 혹은 그 이상의 실명사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오류의 발단은 그랜빌 샤프가 주의를 기울였던 것보다 훨씬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그랜빌 샤프의 법칙을 만들어 낸 데 있다. 샤프의 법칙은 사실 대단히 복잡하다. 너무 복잡해서 여기서 분석할 수도 없을 정도다. 하지만, 아주 분명한 것은 그는 복수 명사를 자신의 법칙에서 제외시켰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만약 한 관사가 kai로 연결된 두 복수 실명사들을 지배한다면, 그 관사가 어떤 측면에서 하나의 전체 역할을 하기 위해서 둘을 하나로 묶고 있다고 할지라도 두 실명사가 동일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만한 증거가 없다.

 

4. 관사: 콜웰 법칙과 관련 문제들

1933년에 콜웰은 동사 앞에 오는 것과 동사 뒤에 오는 한정 서술 명사들을 모두 연구했으며, 관사가 있는 것과 관사가 없는 한정 서술 명사를 모두 연구했다. 그는 다른 것들 가운데서 만약 어떤 한정 명사가 연계동사 앞에 오면 그것은 대게 무관사 명사이며, 한정 명사가 콜웰의 연구 결과는 광범위하게 인용되어 왔지만, 거기에는 몇 가지 방법론적인 약점이 있다. 코웰의 법칙이 일반적인 경향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이지는 않다. 결국 이 법칙은 관계절이나 고유 명사들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상당히 많은 단계의 특성표현적 명사도 빠뜨리고 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제시한 수치에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제시한 수칙에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무관사 서술 명사들 가운데 단지 한정 명사들만 포함시켰으며, 따라서 한정성의 정도를 평가하는 것도 극도로 힘들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한계들을 넘어 코웰의 법칙은 쉽게 오용될 수 있다. 코웰의 법칙에 기댈 때 나타나는 많은 오류는, 요한복음 1:1에는 적합한 콜웰의 법칙의 일부가 연계 동사 앞에 나오는 모든 무관사 명사들에 대한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사실 그는 한정 무관사 명사들만 연구했다. 연계 동사 앞에 나오는 서술 명사에는 관사가 없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것이 한정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가 되는 것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그것은 비항정적이라고 결론 내릴 수 없는 것만큼이나 가능성이 없는 주장이다. 

 

5. 시제의 관련성

이 영역에서 일어나는 주석적이고 신학적 오류는 대개 동사적인 형태에 의해 수립되는 절과 절 사이의 관계에 적절하게 주이를 기울이지 않은 채 결론을 이끌어낼 때 생긴다.

 

정확성 개선 가능성(The potential for Renewed Precision)

놀랍게도 지난 십여 년 동안 헬라어 문법에서는 거의 진보가 없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고전 교육의 수준 저하를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관심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예외적으로 헬라어 문법 분야에 든든히 기여하고 있는 학자들도 많다. 하지만 아직도 연구가 더 필요하다. 새로운 문법 공식을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술적인 발전으로 인해 앞으로 헬라어 문법에 대한 귀납적 분석이 더욱 쉬어질 것이며, 실수를 줄이고 문법적인 오류들을 더 잘 드러내는 데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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