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부인(22:54b-62)
스포트라이트는 이제 예수로부터 옮겨져서 베드로에게 비춰진다.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를 쫓아갔고,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종들의 물음에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한다. 이렇게 해서 예수의 예언은 성취되고, 닭 울음소리와 뒤를 돌아보시는 예수의 표정은 예수를 부인한 일의 무게가 베드로의 가슴에 꽂히게 만든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의 예수 부인 사건을 가야바 대제사장의 심문과 빌라도의 재판 기사 사이에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대제사장 앞에서의 심문 장면(누가복음에서 이 심문 장면은 날이 밝을 때까지 연기된다)을 먼저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내용을 보도한다. 또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한 것으로 기록하였지만, 누가는 베드로의 맹세와 저주를 생략하였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뉘우친 것으로 기록한 반면, 누가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침으로써 뉘우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누가가 마태와 마가보다 베드로의 예수 부인 사건을 완곡하게 누가복음 22: 54-62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누가는 베드로의 부인을 가야바의 심문 앞에 기록함으로써 고난의 전주곡으로 기록하였고, 마태와 마가는 가야바의 심문과 빌라도의 재판 사이에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의 수난의 정도가 수제자의 배신을 통해 점층적으로 증가되고 있음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이렇게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와 강조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기록된 것이다.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를 따라간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체포로 낙담하고 절망하며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극도로 위축되어 있는 베드로를 발견하게 한다. 50절에서 과감하게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는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베드로는 “뜰”에 앉았다(ἐκάθητο). 베드로는 사람들 가운데 앉아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방관자와 같은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두움에 자신을 숨기고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와 대제사장의 뜰에서 방관자의 무리들과 섞여서 앉아 있던 베드로는 한 비자의 “뚫어지게 보다"(개역 성경에서는 ‘주목하여") 의해 고발당한다. 22장에서 비자(56절)와 예수(61절)는 각각 베드로를 주목한다. 이는, 단락의 주된 행동을 위한 첫 번째와 마지막 동인(動因)을 제공한다. 베드로는 전자에서는 드러나는 것을 피하고자 하지만, 후자에서는 드러나는 것을 피할 방도가 없다.
‘조금’으로 번역된 βραχύ는 시간과 장소와 양과 정도를 나타내는 말로서 ‘짧은’, ‘작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진다. 여기서는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시간의 경과를 가리킨다. 이번에 베드로를 지목한 사람은 베드로에게 직접 고발하고, “그와 함께”는 “그 당”으로 바뀐다. 체포에 관한 단락은 이 시점에서는 예수의 제자로 밝혀지더라도 체포될 위험성이 없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뜰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를 체포한 것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사람들이라고 할 때, 베드로가 붙잡힐 위험은 실제로 상존했을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살기위해 예수와의 관계 자체를 부인해야 했다.
한 시간쯤 시간이 흐른 것에 대한 언급은 베드로에게 위험이 지나간 것으로 보였을 것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미완료 시제인 “διϊσχυρίζετο(장담하여)”는 세 번째로 베드로를 지목한 사람이 앞에서 두 사람이 이미 시작했던 것을 이어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베드로를 지목한 사람이 한 말의 패턴은 맨 처음 비자가 한 말의 패턴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근거를 제시하는 절이 뒤따라 나온다. 베드로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은 그의 말투나 방언(마 26:73에서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처럼), 또는 그의 옷차림의 세부적인 특징들을 통해서 드러났을 것이다.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의 “방금 말할 때”는 “곧”보다 부인의 말과 닭 울음소리의 내적 연관성을 한층 더 부각시킨다. 그리고 ‘방금 말할 때에’로 번역된 “ἔτι λαλοŭντος αύτοŭ”를 직역하면 “아직 그가 말하고 있을 때에”가 된다. 이 묘사로 볼 때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바로 닭이 울었음을 알 수 있다. 주께서는 돌이켜서 베드로를 보신다. 거기에서 베드로가 33절에서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가 드러나고, 거기에서 베드로와 예수 사이에 오간 대화가 통렬하게 상기된다. 예수의 말씀은 사실로 입증되었고, 베드로의 항변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거의 전적으로 베드로에게 할애된 이 단락 속에 예수께서 짧게 등장하신 것은 잡히신 후에도 예수께서 상황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중압감 속에서 멀찍이 따라가던 베드로는 결국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하는데까지 이르고 만다. 그러나 닭 울음소리와 예수께서 뒤돌아보시는 것을 통해서 31-34절에서 있었던 대화가 상기되고,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며(ἔκλαυσεν πικρŵς), 회복의 길로 접어든다.
사람들이 예수를 붙잡았을 때 그와 함께 한 제자들을 붙잡고자 한 시도는 없었다. 기껏해야, 베드로는 욕을 먹거나 두들겨 맞거나 뜰에서 쫓겨나는 상황을 예상했을 것이다. 또 그들은 예수와 베드로의 진정한 관계가 밝혀질 정도까지 이 문제를 압박한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는 뜰에 머물러서 예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그로 하여금 그 곳에 있게 만들었던 예수와의 관계 자체를 부인해야 했다.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으로 34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성취된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와 예수께서 쳐다보신 그 눈길을 통해서 파국을 맞는다. 기억이 밀려오고, 베드로는 자신의 호언장담과 예수의 슬픈 예고를 상기한다.
베드로의 현재의 처지는 누가복음 12: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에 잘 나와있다. 베드로의 부인의 자연스러운 결과는 예수께서도 베드로를 부인하시는 것이 될 것이었다.
예수의 눈길과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가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를 회복의 길로 돌이키는 것이기도 했다. 베드로는 물러 나와서 통곡하며 참회한다. 우리는 24:34에서 나중에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을 안다.
예수께서 잡혀서 희롱당하시다(22:63-650
장면은 다시 이른 아침에 산헤드린에서 심문을 받기 위하여 기다리며 갇혀 있는 예수에게로 옮겨진다. 잔인한 군사들이 게임을 하면서 예수를 조롱하는 모습이 빈 시간들을 채우고 있다.
누가는 산헤드린의 심문이 시작되기 전과 예수께서 헤롯에게 넘겨졌을 때(23:11) 희롱을 당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마가는 예수께서 밤중에 대제사장 및 산헤드린과 만난 후와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후에 희롱을 당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께서 안나스 앞에서 심문을 받는 동안 맞으셨고 빌라도가 심문하는 동안에 빌라도의 군병들로부터 왕을 참칭하는 자라고 희롱을 당하시는 것으로 기록한다. (공관복음서들에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추가적으로 희롱당하신 내용이 나와 있다.) 본문의 순서와 내용에 있어서 마가 본문과 누가 본문을 확실하게 조화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지만, 마가 본문에 나타난 여러 특징들은 강조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붙잡히신 예수께서는 그분을 지키고 있던 군병들로부터 조롱과 학대를 당하신다. 그들의 잔인한 농담들은 다름아닌 신성모독이다. 예수께서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신다. 이 장면에서 예수는 단지 희생양으로만 묘사된다.
예수를 붙잡는 무리는 52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지만, 우리는 누가가 여기서 의도적으로 예수를 지키던 자들의 정체를 일반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을 좀 더 정확하게 밝히는 데 그 본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Soards, BZ 31[1987] 115는 이에 반대한다). 누가는 συνέχειν(여기에서는 “구금하고 지키다”)라는 단어를 매우 선호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여기에서와 동일한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희롱은 헤롯과 그의 군병들의 행동(23:11), 또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의 군병들의 행동(23:36) 속에서도 드러난다. 신약에서 δέρειν(“때리다”)의 용례들 중 절반 이상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다른 곳에서 누가복음에는 비유적인 강화(講話) 속에서, 사도행전에서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당국자들에 의해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학대당하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된다. 예수를 지키던 군병들의 행동은 일반적으로 당시의 법 집행의 다소 잔인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법적인 심문에 있어서 틀림없이 존재했을 고문의 사용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64절에서 눈을 가리고 너를 친 자가 누구냐고 묻는 구절 속에 몇몇 고대의 놀이들이 제시되어 왔다. 예를들어, 콜라비스모스(κολλαβισμός)에서는 눈을 가린 술래가 그 놀이에 참여한 다른 사람이 어느 손을 이용해서 자기를 쳤는지를 알아맞혀야 했다. 여기에 기존의 놀이가 반영되어 있는지, 아니면 예수와 관련된 소문들이 그들의 거친 놀이에 어떤 특별한 변형을 가져온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를 지키던 군병들은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지루한 밤 시간을 소일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 본문에서와 달리, 누가 본문에서는 대제사장 앞에서의 밤중의 심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지키던 군병들의 이 잔인한 놀이만이 예수께서 붙잡히신 때로부터 이른 아침에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까지의 시간을 채우고 있다. 또 예수는 자신의 눈을 가리고 때리는 자들을 알고 계셨을 테지만, 그것을 맞추어 보라고 요구하는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을 묵묵히 이루어 가신다.
베드로의 부인 이후 남은 어둠의 시간들은 예수를 지키고 있던 군병들의 잔인한 심심풀이의 대상으로 예수가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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