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식사와 잔치
유대인들은 대부분 평일에는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끼의 식사를 했고 안식일에는 세 끼를 먹었다. 밀이나 보리를 맷돌로 갈아 반죽을 하여 구워 가족들과 함께 상에서 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상이 지금의 식탁이나 밥상 형태의 모습은 아니다. 그저 바닥에 멍석과 같은 깔개를 깔아 구분한 자리에 해당한다. 상에 둘러 앉아 같은 그릇에 있는 빵을 가져다 손으로 찢어 나누어 먹었고 찢은 빵은 식탁 가운데 있는 소스에 찍어 먹었다. 잠언에는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26:15)’고 표현한다. 식사를 할 때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을 사용했기에 식사 전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었다. 외부에서 집 안으로 들어갈 때 발을 씻었고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었다. 이렇게 손을 씻고 먹어야 하는 장로들의 유전은 예수님과 대립하게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씻지 않은 손으로 먹은 음식, 입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 더럽다(마 15:1-11)’고 말씀하시며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의미를 잊고 장로들의 유전을 더욱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 대해 책망하셨다.
예수님의 말씀 중 잔치(데이프논: 정식, 중요한 식사, 만찬)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는데 유대인들에게 잔치 문화는 익숙한 것으로 일반적 식사와 구분되었다. 잔치는 보통 종교적인 날과 개인적으로 특별한 날 배설되었다. 종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삼대 절기인 유월절(무교절), 칠칠절, 장막적(초막절, 수장절)을 매년 삼차 지켰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지키기 시작한 부림절과 수전절을 지켰는데 이때 잔치가 배설되었다. 또한 특별하게 지킨 7년에 한 번 안식년과 50년에 한 번 희년을 지켰고, 매월 초 월삭과 매주 안식일을 지켰는데 이때도 보통 저녁에 잔치가 배설되었다.
잔치가 예정되면 잔치를 베푼 주인은 두 번, 세 번 잔치에 참여할 손님에게 종들을 보내 알렸지만 여자들은 손님으로 초대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가운데 한 나라의 임금이 잔치를 벌이고 손님을 초대했는데 초대 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오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데려다 잔치자리를 가득 채운 경우가 있다(마 22:1-10).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초대되더라도 예복은 갖추어야 한다. 만약 예복을 갖추지 못했다면 잔치를 준비한 주인이 준비한 예복을 입고 잔치자리에 참석하는 기본은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자리에 기본준비도 안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임금에 의해 잔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을 말씀하셨다. 임금은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마 22:12)” 물었고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은 가난하다거나 예복이 없다거나 말하지 않고 그저 말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임금이 준비한 예복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은 사환을 시켜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2:13)”고 명령하셨다.
잔치 때가 되면 초대받은 손님들은 잔치가 벌어지는 장소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잔치가 시작될 때 주인이 등장하여 자리를 재배치한다. 잔치의 상석은 ‘ㄷ’자 식탁인 트리클리니움의 왼쪽편 중앙에 앉는 잔치를 베푼 주인공과 가까운 자리로 주인의 오른쪽이 제일 상석이고 다음은 왼쪽 방향 순서이다. 이러한 배경은 예수님께서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상좌에 안지 말라(눅 14:7)”고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게 한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앚으라(눅 24:20)”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되면 찬지를 베푼 사람이 자리를 정해줄 때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서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눅 14:10)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시 잔치를 베풀고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의 자리를 주인이 정해주는 배경을 이해함으로 예수님께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하신 말씀의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잔치가 벌어지는 집의 문은 닫히고 잔치가 벌어진 후 문은 열리지 않는다. 초대 받았지만 늦게 왔고 장치가 이미 벌어졌으며 잔치자리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열처녀의 비유중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잔치자리에 늦었을 때 이미 혼인잔치의 문은 닫혔다(마 25:10). 남은 다섯 처녀가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말했을 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고 잔치의 문은 열리지 않았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마 25:1-13).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고 말씀하시며 혼인잔치에 들어갈 시간을 기억하고 깨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셨다.
잔치가 시작되면 트리클리니움이라 불리는 ‘ㄷ’자 식탁에 둘러 왼손을 기대고 비스듬이 눕는다. 왼쪽 팔꿈치가 닫는 부분에는 대부분 쿠션이 붙어 있었다. 이러한 자세는 오른 쪽에 있는 사람의 머리가 왼쪽 사람의 가슴에 오게 되는데 잔치를 베푼 주인의 가슴에 상석에 앉은 사람의 머리가 닿게 되어 주인의 품속에 안기는 형태가 되곤 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사랑하는 자가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고 기록되었는데(요 13:23, 21:20) 요한이 상석에 앉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아마도 아브라함이 베푼 잔치에 가장 상석에 앉아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했을 것이다(눅 16:19-31).
왼쪽 팔꿈치로 지지하고 오른쪽 방향으로 비스듬히 누운 자세는 자연스럽게 발을 식탁 바깥쪽으로 뻗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죄인이었던 여인이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씻고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은 식사 때의 자세를 연상하면 자연스럽다(눅 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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