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신약신학

왜 바울서신으로 복음서를 읽으려고 하는가?

예림의집 2014. 10. 16. 20:46

 왜 바울서신으로 복음서를 읽으려고 하는가?

 

요즘 설교자들 가운데는 예수님과 바울을 싸우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느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설교자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를 한번 들어보도록 하자. 바울과 예수님 사이에 싸움을 붙이는 이런 현상은 설교자가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기록된 본문을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바울서신에서 얻은 자신의 선입관이나 전제를 공식화해서 상황과 배경이 전혀 다른 복음서에 그대로 대입시키려 하거나 혹은 그것을 복음서를 해석하는 열쇠로 사용하려 할 때 일어나게 된다.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을 바울의 것처럼 뜯어고치려 하거나 예수님의 말씀을 바울에 맞게 조화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이 설교자는 예수님과 바울 사이에 대립이 있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 중에서 어느 한 편만을 인정하고 다른 한 편은 본 의미와는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예수님과 바울, 복음서와 바울서신을 싸우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실재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서를 있는 그대로 읽으려 하기보다는, 자신이 바울서신에서 추출한 단편이나 자신의 전제를 가지고 읽고 있다. 그 결과 예수님과 바울사이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예수님께 바울의 옷을 입혀 복음서를 채색시킴으로 복음서를 바로 해석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글은 설교자가 자신의 선입관념 내지 개인적 고정관념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바른 태도인지, 또 바울서신을 가지고 복음서를 읽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그런 잘못된 접근과 설교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다루는 것이다.

*성경 스스로가 말하는 깊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열린 자세를 지녀야 한다.

 

자신의 틀을 가진다는 것은 바람직한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다. 목회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 보다도 목회자들은 더욱 강한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사람이 자신의 주관이나 전제를 가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꼭 필요한 것이다. 목회자에게 이런 것이 없다면 어떻게 복음을 지켜내며, 수많은 거짓 가르침들로부터 교회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겠는가? 또한 이런 신학과 신앙의 틀-우리는 이것을 흔히 교리라 부르기도 한다-이 있기에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마다 말씀 속에서 자신의 신앙과 신학이 얼마나 성경적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고, 더 나아가 우리가 전하는 말씀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면 이외에 부정적인 면도 있다. 특히 이 틀이 성경연구와 해석에 관계될 때 더욱 그러하다. 즉 설교자가 어떤 본문을 대할 때 성경 저자가 무엇이라 말하는지 그것을 들으려 하기보다는, 이미 성경을 읽기도 전에 그 본문은 의례히 그런 의미이겠거니 하는 식으로 자신의 생각과 저자의 생각을 동일시 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더 이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신학과 사상의 틀을 입증하기 위한 하나의 참고서적, 또는 증명구절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성경이 가지고 있는 참된 의미를 발견하려 하지 않고, 설교자가 미리 알고 있는 의미를 그 성경 구절에 부여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일 뿐만 아니라 성경을 파괴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주장을 성경에 부여하려 한다거나, 또는 성경말씀을 자기의 편의를 위해 진흙 주무르듯 마음대로 다루어서는 안 되며, 성경 스스로가 말하는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열린 자세를 지녀야 한다.

우리가 이런 잘못된 접근 자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성경 구절이 실제로 이 세상에 살며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한 인간의 기록이라는 것과, 그가 그것을 기록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사상을 전달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과, 그래서 결국 그 본문에는 오직 한 가지의 의미만이 들어 잇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데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자기가 원하는 교리나 이론을 끄집어내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 결코 아니다. 누구도 성경을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설교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겠다는 자세가 요구된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이런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을 자신이 지키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심각히 물을 필요가 있다.

 

바울서신은 복음서를 읽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위의 해석의 원칙을 일단 마음에 두었다면, 이와 더불어 왜 우리가 바울서신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대로 복음서를 해석해서는 안 되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자.

많은 설교자들은 대부분 복음서보다는 바울서신으로부터 자신의 신학의 틀을 세운다. 그 이유는 바울이 비록 복음서의 저자들과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만, 복음서의 저자들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가장 깊이 해석하며 체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복음서에는 신학이 없다거나, 또는 바울서신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비록 복음서에는 바울서신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신학적인 용어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인격과 메시지는 바울서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의 신학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메시지에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바울의 서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복음 기사의 윤관은 신약 다른 부분에 나타난 것과 일치하고 있는데 특히 사복음서와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이는 바울 자신도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고전 15:11).

이렇게 복음서와 바울서신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만일 이러한 통일성과 연속성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바울서신에서 얻은 것을 아무 부담 없이 복음서의 해석에 그대로 대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에는 통일성과 더불어 또한 분명한 차이점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복음서들 특히 공관복음서를 읽고 난 후에 바울서신을 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느끼기를, “나는 지금 전혀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구나”하는 인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이는 실제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이 둘 사이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둘 사이에는 저자의 차이가 있고, 그것을 읽는 독자들의 상황이 서로 다르고, 또한 시간의 흐름에 의한 형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복음서 기자들과 바울은 그들 나름대로의 개성과 특수한 성격을 지녔고, 그리고 이 요소들은 그들의 타나냈던 사상에 불가불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대상과 상황과 문학적 양식의 차이도 둘 사이에 존재한다. 예수께서 구약의 예언이 담긴 갈릴리의 설교 형식으로 고린도 교회의 이방인들을 가리치셨다고 한 번 가정해 보자. 아마 그들 중 아무도 그 설교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고린도에서 설교하던 형식을 그대로 갈릴리 사람들에게 전했다면 아무도 그 것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복음서에 소개된 예수님의 설교는 복음의 역사 속에서 부활 이전의 단계를 나타내고 있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의 계시의 정점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되돌아보았다는 점에도 차이가 있다.

이와 더불어 이 둘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이 두 부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아직 여러 면에서 어느 정도의 은폐와 유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심지어 그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까지도 해당된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과 그것을 자신의 사역을 통해 친히 이루시고 높임을 받으신 고양된 예수님을 선포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단순히 예수님의 본래적인 모습, 즉 역사 속에 사셨던 한 인물의 인격을 발견하려는 사람에게는 복음서가 보도하는 예수와 바울이 전한 예수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복음서의 저자들과 바울이 묘사하는 예수님 사이에 서로 차이점과 간격이 있는 듯이 보여지는 주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