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연자맷돌
복음서에는 맷돌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이 두 번 나타난다. 첫 번째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막 9:42, 17:2)”로 연자맷돌을 언급하셨다.
연자맷돌은 짐승을 부려서 곡식을 찧거나 올리브(감람) 열매를 부수어 기름을 얻을 때 사용하는 큰 맷돌로 가정용 맷돌의 10배 정도의 효율이 있다. 연자맷돌은 가정마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공동으로 사용하거나 부자집에 있기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댓가를 치루어야 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등장하는 ‘믿는 소자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매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형법인 연자맷돌을 목에 매달아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사형제도와 당시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했즌지를 이해해야 한다. 연자맷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사형법은 유대인의 사형제도는 아니었지만 고대 시리아, 로마, 마케도니아, 그리스에서 극악한 죄인이나 신성모욕죄나 반역죄를 범한 사람을 사형시키는 방법이었다. 당시 갈릴리지역은 로마에 대항하는 열심당원들이 많이 모여 활동했었기에 이러한 사형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이 사형법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무에 달린 저주 받은 자라 하더라도 그날 장사치루도록 하셨다(신 21:23). 유대인들은 죽은 후 조상들이 있는 무덤에 함께 묻어줌으로 죽은 영혼이 열조와 함께 거하게 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런데 연자맷돌을 메고 바다에 빠뜨려 죽인다는 것은 시신을 찾아 창사 치루어 주지도 못하는 아주 저주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예수님 당시 어린이는 수에 치지도 않았고 공동체에 수치를 안겨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기에 아이들을 대우하지 않았다.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시대 공동체의 비밀을 외부로 거짓 없이 밝혀 공동체에 수치를 안겨 줄 수 있는 어린아이들은 대화나 모임에 끼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번번이 어린아이를 우대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믿는 소자 하나 실족하는 것이 신성모욕죄나 반역죄 보다 더하기에 연자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연자맷돌은 마을의 이곳저고에 있고 년 중 곡식을 갈거나 기름을 짤 때 사용하는 것이기에 연자맷돌과 관련된 말씀은 맷돌을 사용하는 어느 때라도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맷돌과 관련된 말씀은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1, 눅 17:35)”이다. 이 말씀 속에 등장하는 맷돌은 연자맷돌이라기 보다는 가정용 맷돌로 생각된다. 한 여인이 맷돌질 할 때 한 여인이 옆에서 곡식을 넣어주는 상황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여인이 하고 있는 맷돌질 자체를 염두해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본문에 사용된 ‘맷돌질(뮐론)’은 ‘맷돌이 가동되는 장소’를 말한다. 두 여인이 한 장소에서 머물러 있지만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이다. 가정용 맷돌은 매일 사용하는 것으로 매일의 삶 가운데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지만 선택받는 사람이 있고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계시록에는 ‘큰 맷돌 같은 돌’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아마도 연자맷돌로 생각된다. 이 큰 돌이 바다에 던져져 보이지 않게 되는데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다(계 18:21). 또한 바벨론이 망하여 산 사람이 없기에 ‘맷돌 소리’가 결코 들리지 않을 것임도 계시하고 있다(계 18:22). 매일 곡식을 맷돌로 갈아 빵을 만들어 먹고 살 사람들이 없기에 맷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맷돌이 생명이라는 신명기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신 24:6).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히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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