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과 십자가 영성
십자가 영성에 대한 과목을 신대원에서 햇는데 이번에는 신학원 마태복음에서 계시록까지 십자가와 관련된 것을 영적인 생활을 중심으로 쓸려고 애를 썼다.
제 1장 서론 십자가 참된 영성의 기초
한국교회에 영성이라는 말이 유행을 했다. 오래된 목사님들은 영성이라는 말보다는 경건이라는 말을 좋아 합니다. 우리도 영성훈련원 경건 훈련원으로 할까... 영성은 중세 카톨릭이다. 경건은 성경에 있다. 경건 훈련원으로 쓰여진다. 언어라는 것은 경건이라는 개념도 성경에서 제일 많이 쓰이는 곳은 유세베이아(경건) 목회서신이다. 경건이 14-15번정도 등장을 한다. 성경에 나오는 경건이라는 단어가 성경의 고유단어인가? 헬레니즘세대에 쓰이던 단어인가? 쓰이는 단어이다. 국립묘지에 호국영영에게 경건하게,,,,, 엄숙하게로 쓰인다. 경건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학자들의 논쟁이 많다. 목회서신에 관련된 부분에 많다. 나중에 시간있으면 참조하시고 간단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목회서신에서 참된경건은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을 늘 전제한다. 지식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올바른 삶,,,, 지식에 파생되 사는 변화된 삶이다.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면 경건이 아니다. 경건이 QT정도로 생각하는데 모든 경건 생활에 지향점은 좀더 좀더 하나님을 올바로 알아가는것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이 삶을 변화 시켜야 한다. 예수님의 공관복음서를 보면 씨뿌리는 자의 비유. 좋은따에 뿌린 씨앗을 보면 소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참으로 깨닫는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끝나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 이렇구나 가슴벅찬 창출 열매 맺는삶의 변화 참된 깨달음 지식의 종교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 목회 현장에서 제일 먼저 변화 삶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생각의 변화를 추구한다. 생각이 변하면 그다음에 삶이 변화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참으로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가는 도다. 경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른 참된 지식에 일치되어 나타나는 변화된삶을 말한다. 영성이라는 개념은 무엇이냐?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성의 개념 방식이 수백까지가 넘다 책 11p 둘째문단 정의 - 사람마다 각각 다른 정의를 내리기는 하지만 다음 같이 정의하는것이 좋을것 같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험하는 삶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 경건보다 영성은 경험에 가깝다. 경험하는 삶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신자의 내적인 삶을 영성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런 영적인 삶은 경건과 마찬가지로 경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서 시작된다. 경건이든 영성개념이든 궁극적으로 신약저자들은 영적인 생활이든지 핵심 밑바탕에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 재끼고 하나님을 아는것 가능?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 가능? 삶의 변화 창출이 가능? 신약 모든 구절을 들추어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살펴보면 십자가가 기초에 서있다. 수많은 찬송시나 노래를 보면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더 이상의 기독교가 아니다. 십자가 없는 영성이든 경건생이던 공허하다. 영성이 있네라고 이야기할 때 주기적 QT를 하면 영성있다. 영성 = QT는 아니다. 중세 시대의등식화하는 여러관행이 존재했다. 영성은 친목기도와 동등시 고독한 훈련을 영성개념이라고 했다. 신대원 교수 와글와글 기도 하니까 침묵기도를 합시다. 하니까. 중세의 영성 방식 침묵하고 하나님을 관조하고 나를 들여다 보는것 우리는 떠들기만 하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 금식 침묵이 영성과 등식화 할려고 한다. 중세 시대에는 그림을 보고 명상하는 것이다. 관상기도 중세 카톨릭의 영성수련방법 장신 유해룡교수 - 칼빈과 마크 로열라 -> 로열라(반종교개혁자) 개신교도들 죽였던 사람이다. 그사람이 또 예수회를 만들어서 자기 나름대로 영성수련 방식을 만들었다. 한쪽에서는 죽이고 한쪽에서 침묵관상기도를 발전 시켰다. 칼빈과 로열라의 영성을 비교분석으로 박사를 받았다. 장신 영성신학교수가 되었다. 커튼치고 관상기도를 합시다. 그분을 붙잡으십시오. 관상기도를 유도한다. 그런것을 많이 했다. 중세시대 요즘 세대에 봇물처럼 들어오고 있다. 트리디야스-입소할 때 수천개의 촛불을 켜고 포옹하고 사랑한다. 배운개 없다. 그런데 분위기는 좋다. 요즘 유행하고 있다. 이런것이 영성과 등식화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우리가 빠지기 쉬운 점들이 있다. 예수님의 사역은 히스토리아 살로티스, 오르도 살로티스와 차이점 - 일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구원서정을 밟으셨다. 히스토리아 살로티스 => 성육신 - 지상생활 - 고난(십자가) - 부활 - 승천 - 하늘보좌에 올리심(승귀)
기독교 인들은 십자가에 많이 두고 있다. 어디에 많이 두어야 하는가? 우리의 영성은 어디에 두어야 한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십자가에만 두고 살게되면 십자가 묵상은 고난과 짓밟힘이 생각난다. 고난 치욕 연약함 버림 받음 영성을 추구한다고 이런 면만 강조하면 우리 기독인의 삶은 어둡고 칙칙해 진다. 기독교 인의 삶이 칙칙하고 어둡게 된다. 영적인 생활을 부활쪽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다. 자유주의 자들은 어느 쪽에 강조를 두고 잇나? 성육신을 강조하면 하나님이 저세상에 너희를 사랑한다고 오지도 않고 사랑에 소리만 하다 휙지나가서 하나님은 나와 관계없이 혼자계신분 전적인 타자 그렇게만 이해 하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육신을 입고 우리의 삶에 고통에 현장에 들어오셔서 똑같은 인간이 되었다. 세상에 고통에 현장에 뛰어들게 되고 성육신을 강조한다. 민중이나 자유주의는 이렇게 강조한다. 어떤사람은 창조를 강조한다. 십자가를 강조하면 무슨생각이 드나? 갈라디아서 를 보면 십자가 밖에 자랑할게 없는데 갈 6:14 내가 뭐에 대해서 십자가에 목박혔나? 세상에 대해서 못밖히고 세상이 나에대하여 못박혔다. 십자가에 가까이 갈수록 세상과 굿바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단절을 해서 떨어져 나온 영성 스타일이 있다. 세상에 대해서 죽었지만은 나도 너희를 세상 한가운데로 보내노라고 하신다. 사랑의 교회 예배가보면 공동체 고백이 있다. 거기에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다. 를 강조한다. 십자가를 조한다고 불교 수도승처럼 떠나있어야 한다. 성경에서는 이중의 태도가 있다. 세상은 타락의 영역이니까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안은 것 같이 너희도 속하지 말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너희도 아무것도 없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상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생활은 긍정적? 부정적인가?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것 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세상도피적인 것을 말하면 안된다. 십자가를 강조한다고 해서 십자가가 뭐냐 나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하나님 없이 정욕대로 살아온 나는 죽었다. 십자가를 강조할수록 나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갈수 있다. 이 못난 마른 막대기 같은 이 못난 놈 주님 나같이 못난 나를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십자가 강조하면 그렇게 될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나니... 십자가를 너무 치켜 세운다고 해서 나에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져야 한다. 나의 옛사람이 죽었는데?? 십자가는 못난 죄인을 위한 고귀한 죽음이면서도 하나님 안에서 나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장소이다. 옛 사람에대한 나의 죽음도 발견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Turning point 나같이 못난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니 예수님이 생명을 내던지면서 나를 구했다. 나를 얼마나 고귀하게 여기셨으면 생명까지 버리고 나를 사랑하셨나? 절름발이든 소아마비든 세상에서 쓸모없는 나를 구하셧다. 어릴때 가정예배 드릴때 자기 머리를 벽에 박고 있길래 “아들아! 왜 머리를 치니?” “아빠말씀을 들으니까 내가 아주 못된 놈이에요.”라고 했다. 이렇게 죄가 많은 놈이다. 옛 자아를 가진 놈이다. 부정적인 생각가진 자아를 가진 놈 십자가에서 나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열등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지 마라. 나를 위해서 죽으실만큼 사랑했다면 나는 가치있는 존재이다. 십자가가 매우 중요한데 내 마음대로 이해하면 십자가가 세상 도피적으로 가게 될수 잇다. 오순절교단 십자가이야기 그만하자 - 오순절 성령을 강조하자 - 힘이 넘치고 능력 넘친다. 십자가 없는 성령만 강조하면 뭐가 되지 않는다. 성령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신다. 십자가 없이 오순절 성령의 경험이 되지 않는다. 성려의 능력은 무슨 말씀을 선포할 때 나타나나 십자가 도를 선포할 때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 십자가의 선포되는 현장에서만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 십자가 없는 오순절이 있을수 있나? 없다. 십자가 없는 창조와 성육신을 강조 십자가 없이 오순절만 강조한다. 균형이 깨진것이다. 세상도피적이고 탈세상적이어서도 않된다. 십자가 강조하면서 나를 학대하는 방식도 잘못되었다. 이번 한 학기동안 p12 최근의 세로운 움직임 - 그중에서 p23 십자가와 관련해서 꼭집고 넘어갈 또다른 중요한것이 있다. 형벌적 대속 비너 섭스티튜션 => 형벌적인 대속 십자가가 강조되는것 형벌적 대속이론으로 생각하는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때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 섰을때 우리는 죽어야 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성품만있는것이 아니라 사랑의 성품이 있다. 사랑에 대해서 무엇을 살려야 되는데 공의와 사랑을 만족하는 방법이 십자가 죄의 형벌의 대가를 예수님에게 넘기시고 지옥형벌을 주님이 담당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완전한 의를 덧입은 것이다. 우리의 형벌의 대가를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시고 예수님만 가능하다. 천국은 의인만 들어간다. 칭의 교리에 관점에서 밑바닥이 형벌적 대속이다.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은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는 마치 죄가 아무것도 없는것 처럼 선언하고 인정하였다. 칭의교리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형벌적 대속이론에 근거해서 우리를 최고 제판정에서 무죄하다는 선언하셧다. 무죄선언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변화는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자체가 변하나 우리의 신분이 변하나? 무슨 신분이 변하나? 법률적인 신분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형벌적 대속이론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형벌적 대속교리이다. 탁월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있다. 대신 담당하시고 의를 덧입혀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존쟂체게 죄인? 의인?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인것처럼 본질은 죄인인데 법률의 신분에서는 의인으로 여겨주신다. 법률적인 신분으 바뀌었으나 죄성을 가진자로 바뀐것이 없다. 칭의교리는 이것을 설명할수 없다. 달로 말하면 주 분화구가 있고 보조 분화구가 있는데 보조분화구이다. 나의 옛사람이 죽고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것이다. -> 이것을 신비적인 연합의 구원이라고 한다. 신약학자들이 이야기 하는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 구원론이다. 칭의구원론과 연합의 구원론... 칭의구원론은 무슨 변화에 유익? 법률의 신분에 변화에 유익 죄인인데 법적인 신분을 바꾸는데 칭의가 탁월하다. 칭의로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것은 설명이 안된다. 변화된을 강조하는것은 신비적인 연합의 구원론이라고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은바 된것은 하나님이 그를 살리신것 처럼 우리를 그와 같이 살린다. 우리도 새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고 함이니라. 목적은 새생명가운데 행하게 하려고 새생명가운데 걸어가고 행할수 잇다는 것은 법적신분 ? 존재자체가 바뀐것이다. 우리 영성은 법적 신분의 변화만 지향? 본질적인 것을 지향하나? 둘다 지향한다. 먼저 법적신분을 지향해야한다. 그다음 구원의 역동적인 면을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것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사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게죽고 다시 행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영성은 칭의말하는 것만 지향에 멈추지 않고 존재론적 십자가를 지향한다. 칭의 교리가 중요하다. 모든 구원론을 칭의 교리로 설명할수 없다. 구원론적인 용어가 무엇인가? 이신칭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구원론 나머지는 뒷부분이다. 지금 이야기 하고 싶으신것은 형벌적 대속이론이 지향하는 법률적 신분의 변화만 추구의 목표가 아니고 p25 신약성경에서는 십자가를 어느 차원에서 보응적 공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은유들도 존재하지만 보응적 공의차웜 우리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셧다. 우리 죄를 눈감고 넘어 갈수 없다. 처벌을 해야 한다. 처벌해야 보응적 공의를 해야 한다. 이 공의를 예수님을 죽이면서 시작된다. 십자가를 그런차원에서 이해 하면 안된다. 십자가의 올바른 뜻은 회복적 공의이다. 회복적 공의이다. A와 B라는 사람이 있는데 싸움이 뿥어서 이빨이 다섯 개가 부러지다 보응적 공의는 이빨5개를 날려야 한다. 그렇게 하기 어려우니까 감옥을 가서 감옥살이를 한다. 아무리 감옥에 들어가도 진정한 회복이 아니다. 이빨 다섯 개 날라간 상태 그대로 있다. 감옥갔다고 내 이빨이 회복되는것이 아니다. 병원가서 심어서 깨끝한 이로 회복시켜야 한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의 죽이심으로 보응적 공의 실현도 있지만 하나님의 고의는 죄인을 새사람으로 회복시키고 변화시키는 공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지은 죄르 공의적으로 심판하시만 창조전의 모습으로 회복하느데도 회복적인 공의가 있다. 십자가는 보응적공의에 있나 회복적인 공의 회복에 무개가 있나? 양쪽다 있다. 진정한 영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녀가 되는데서 멈추지 않고 형상을 회복해서 예수님처럼 새사람으로 회복해 가는것이다. 회복해 가는 위대한 능력이 십자가 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회복족인 공의를 회복해 가는 것이 작동되는것이 십자가를 균형있게 이해가 되는가를 이야기한다. 영성의 뿌리는 십자가에 있다. 승천 올리심 오순절과 연결되어 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수 있나? 없다. 부활없이 십자가 있나? 없다. 십자가와 부활은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점에 두는 것은 기독교는 마크는 십자가 이다. 한학기 동안 잘 공부 했으면 좋겠다. 눈이 문제가 있다. 빛이 들어와서 점막이 점점두꺼워지면 막막의 시신경이 죽어간다. 심해지기 전에 점막을 뜯어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학기중이지만 시급한 수술이라 다음주에 휴강을 해야 되고 휴강을 한것은 수술을 한후에 보강을 해 드려야 됩니다. 수술이 고난도 수술이라 눈 수술이 잘 이루어 지도록 기도해 주세요. 다른 눈은 방학동안 해야 한다. 다음에는 바울서신쪽을 먼저하겠다. 바울서신쪽은 115p 세상에대한 죽음 하나니을 향한 삶을 할테니까 미리 읽어 오세요. 갈라디아서오 로마서 연구가이다. 로마서 주석 1600page쓰느라 10년 걸렸다. 두께로는 1등이다. 갈라디어서 주석 700page 썻다하면 두껍게 쓴다. 내용은 무진장 좋은 책이다. 평생에 걸쳐 한번은 읽어 보아야 할 주석이다. 전공이 바울서신이다. 한국 신학학회에서도 한위치 한다. 바울을 먼저 다루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그리고 공동 서신 요한계시록 같은 신학신학과 같다. 제대로 십자가를 공부하면 십자가가 뻥뚤린다. 십자가이야기한다고 밝게 해라. 디자인은 괜찮다.
우리가 거기 있었다의 요지는 무엇인가? 찬송가 거기 너있었는가에 가사와 중첩이다. 교수님의 요지는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시던 그날 예수님이 죽으시는데 영향을 끼친사람들 빌라도, 가롯유다, 공회중심의 종교지도자들, 군중들 네가지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설명 왜 십자가 달리기를 원했나? 이런요소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요소가 우리에게도 있다. 이 넷중에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거기 있었다. p29 십자가 형은 사람의 치명적 기관상하게 안하고 고통주며 천천히 죽어간다. 31-35 왜 예수님이 처형당했나? 로마 반란자들을 처형하는 방법이다. 그와 무관하지 않다. 엔크라이트가 말했따. 전통적 입장은 구약성경 기초의 입장이다. 왜 십자가 죽음 - 구약의 예언된입장이다. 오랫동안 구약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는 내용이 어디에 있는가? 질문하기 시작했따. 사 53장 속건과 대신제물은 있지만 시편22편에도 엘리 사막다니, 옷을 재비뽑음이지만 십자가 형은 없었다. 매달린다는것인데 구약에 세가지 예가 있다. 창세기 떡굽는 관원 여호수아 왕들이 달림 에스더에서 하만과 달린다. 여호수아 10명정도 달린다. 22명이 달린다. 예수님은 구원자로 나무에 달렸다. 그런데 구약에는 없다. 떡굽는 관원장이 달려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구원자로 달린경우는 없다. 여호수아가 구원자인데 나무에 달리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가나안 족속의 10왕을 달았다. 10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삶을 사는데 기여햇다. 에스더서에 보면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모르드게와 에스더이다. 거기에 나무에 달린사람들은 하만과 10아들이다. 그들이 나무에 달리므로 구원을 받는다. 나무에 달리므로 구원을 받는다. 달린자가 구원자가 아니다. 신약에는 나무에 달리면서 구원자이다. 구약성경에서 나무에 달린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래서 나무에 달린게 있지만 세가지 사건자체가 나무에 달린자가 구원자가 되는것이 아니기에 예수님과 연결이 안된다. 기독론관계에서 예수님 제물되시고 제사장되신다. 제물이 제사장될수없다. 구약에서는 그렇다. 제물과 제사장은 구별이다. 예수님은 한분이 두가지가 된다.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수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된다. 예수님 그 한분속에 비밀이 있다. 복음에 비밀이다. 그래서 복음서나 예수님 말씀을 보면 십자가 달린것은 기록과 예언데로 가는것이다. 예수님 십자가 달려 죽으신것을 보면 구약성경에 근거였다. 오랫동안 예수님 달리신 근거가 있나? 톰라이트 로마시대라서 이 형벌을 받았다. 그 시대가 그 형벌을 사형수에게 집행했기 때문이다. 그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정황과 문화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죽음이다. 로마 뿐만아니라 당시뿐아니라. 정황이 고대 사회에 있었다. 여호수아를 보면 알수 있다. 에굽에도 잇어서 페르시아에도 있어서 하만이 달렸다. 교수형 달려 죽는겋이다. 교수형이라는것이 우리 시대에도 존재한다. 오래된 형벌의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연결될때는 연결된다. 이것을 위해서 쓴것이 박사논문이다. 여기에 보면 형벌적 대속이라고 하는 p23쪽에 보면 4째줄 전통적으로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는 방법은 형벌적 죽음이다. 24p 대속교리에 불편함을 느끼는 학자가 많다. 피널 서스티튜션 조직신학 학자들과 책을 내기도 했다. 2006년에 틴내일에 조직신학 학회에서 다룬것이 이것이다. 형벌교리 계속 이어가나 바꾸나? 박형대 교수님 논문이 이 답을 제시한다. 형벌적 교리를 이어가도 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이 죄가 없었다. 34-35 밑 4줄 예수의 무죄를 알면서도 현실적인 타협책을 택한 자기 보신주의 이러한 비겁한 보신주의가 우리에게도 있다. 34밑2 남에게 떠넘기고 손을 씻는 죄라 표현함.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 그러세요. 예!! 그러면 교수님 말씀이 맞다 빌라도 자리에 있으면 우리도 그렇게 했을것이다. 강자들은 약자를 히생시켜 사회를 유지하려고 한다. 예수님을 공개 처형도 사회유지으 이류이다. 로마는 성이 항복하지 않으면 다 죽인다. 항복하면 살려준다. 결국 항복이 쉽게 된다.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이 누군가의 희생양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전설의 고향에 보면 이무기 처녀 받침 공동체 살기위해 한사람 죽임. 십자가가 그런요소가 업는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과 다르다. 예수님은 최강자이다. 예수님은 천사를 불러다 세계제패가 가능하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갈리셧다. 십자가는 약자 희생시켜 공동체 살리는 것이 아니지만 기독교에서 그런일이 있다. 이것은 십자가 복음을 실현시키지 아니한 것이다. 빌라도 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가정에서도 누가 제일 피해를 보느냐면 가정에서 약자가 피해를 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다. 영국에서 귀국할 때 고등학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걱정했다. 큰애는 고등학교 막내는 5개월이 됫다. 막내가 제일 고생을 했다. 한국적응이 가장 힘들었다. 큰애가 고생할줄 알았는데... 큰애를 맞추었는데... 둘째도 힘들었지만 막낸 5개월이지만 제일 힘들었다. 아프기 시작하는데 죽는줄 알았다. 1년반이 될동안 걷지를 못했다. 태어날 때 4K로가 되던애가 1년이 지나서 8K밖에 안되었다. 사실은 이아이가 죽을수 있다고 생각할만큼 아팠다. 아이에게 의사를 물을 수 없었고 애느 말이 없으니까 괜찮을줄 알았는데 제일 고생했다. 애 때문에 제일 힘들다. 누가 제일 희생량이 되냐면 막내가 당한다. 넷째는 아무알도 않고 다섯째에게 한다. 제일 맷집이 좋은애가 5째이다. 건강한 교회 목사님이 책임지는 교회가 목사님이 당하는 교회다 대부분의 교회는 평신도가 당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것은 힘든것은 내 몱이고 좋은것은 평신도가 받아야 하는것이 잘못되었다. 학교에서도 1학년에게 가장 힘들다. 우리는 십자가 정신이 우리의 구조속에 구현되어 있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학교에 불만이 생긴때가 언제인가? 우리가 약하고 힘든데 우리에게 최종병기가 될수 있냐는 이야기다. 제일 어리고 제일 약하다. 수업거부해서 제일 피해 본사람은 우리이다. 학생들이 수업거부 시점에서 20년 교수 교수님이 말했다. 하나는 자해고 하나는 상해다. 점거 농성이다. 결국 자해를 했다. 우리학교에서 십자가정신을 배워야 하는데 예수님처럼 강자가 부유한자가 가난해질려고 하는구나.. 십자가르 보고 나가야 한다. 우리의 구조속에서 못배울것 같을때 우리의 구조가 악용될때... 부름받은 나 자신이 슬프게 될 때... 1학년이 제일 약하다. 몸은 건강하다. 1학년이 약하다. 사실 십자가 영성 중요하다. 빌라도 자리에서 비라도 자리에 있을것이다. 주를 위하여 빌라도 자리에 있을때 빌라도 같이 아니하는게 목표이다.
두 번째 군중 37위6 예수님께 걸었던 현실적 기대가 좌절로 바뀐다. 이기적 욕망과 변덕스러움... 군중 병고침 자유를 얻었고 먹었다. 그런데 자신들의 기대와 걸맞지않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인해 변덕을 부리게 되었다.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외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군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다수에 무지 대중은 무지하다. 우리도 교수님은 공동체에 대해서 우리는 무지한 대중은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지해서도 않되지만 무지한 대중은 아니다. 인내할줄 알고 생각이 있는대중이다. 군중들이 십자가들이 스타우로 십자가에 달아라. 군중들이 소리를 지르면 영향이 미친다. 우리가 다수인데 우리가 이책에서 말하고자하느 십자가 영성을 가지고 있으면 개혁은 분명히 일어난다. 시대가 지나면 세대가 바뀐다. 군중도 기회가 있다. 제네바 목사회가 모여서 성경공부를 했다. 노회총회모이는데 월요일날 계속 있지 못하고 노회가 공부하는 시간은 안건 시간....이다. 칼빈의 제네바 목사회는 성경공부의 시간이다. 뭔가 우리가 우리내부의 개혁이라고 하느것이 관례가 아니고 성경에 기초해서 건강한 다수 건강한 공동체가 되면 개혁은 빠르고 쉽게 된다. 군중의 문제르 다루었는데 어떤것도 학생들의 탓할 생각은 없다. 학생들의 결정은 학생의 결정이다 기대하는것은 들어왓을때 보다 나갈때가 더나은 자가 되라
세 번째 동일시는 시기심이 있는 유대지도자들이다.38및 8줄 진짜동기는 추악한 시기심이었다. 마 7:18 시기심이더라 유대 종교지도 자들만큼이나 현대인들도 예수의 신적권위를 싫어한다. 이기적이라느 것이다. 내이름 내 명예 올라가는것 좋고 내가 욕먹는거 싫다. 이타적인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이타적으로 사느것은 높아진다. 이타적으로 살면 힘드나? 힘들다. 물론 하늘의 복을 이야기 하지만 이타적으로 살면 힘들다. 마지막 주인공은 가롯유다이다 결국 우리도 가롯유다 같다. 42쪽 불의 한 삵 때문에 스승까지 팔아넘긴 탐욕이 그만의 것이겟느냐? 성찬에 대해서 쓴글중에 눅 22:21-23절까지 새롭고 놀라운 한나님 나라 불청객 유다 떡잔을 받지만 어약과상관없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 넘길시 기회만 여뽄다. 보라 새유월절 어린양 다른 생각을 한다. 새어약 자리에조차 팔아넘길 기회를 주신다. 내의 팔손 나의 손 그 가 화가 있을것이다. 이미 알고 있으면 분명하다.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신다. 유다에게 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유다 회개하지 않느다. 사도 가운데 앉아 있다. 누가 행하지 유월적 언약에 유다를 위한 말씀을 하신다. 나를 파는자 그를 파는가 나쁘게 된다. 감정이 아니라 사실로 말한다. 가롯유다라도 인자를 안팔면된다. 누구야 예수님 팔면서 나는 아니데 복음과 외곡된것은 내려 놓으라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돌이키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지 않고 계신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도다 끝까지 기회를 주신다.
빌라도
군중
유대지도자
가롯유다
십자가에 형을 받은 것에 영향을 끼진다. 그들의 잘못되 성품과 성향의 영향을 끼친다.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없는것이 아니다. 이것에 적용을 한다면 해결된다. 주님이 원하시는것도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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