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리더십
낙타의 눈물
낙타도 사람처럼 우는가.
사막의 가열한 상황에서 낙타가 정말 눈물을 홀릴 때가 있다. 그것은 모성애를 되찾았을 때이다.
사막을 적시는 사랑의 눈물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지요. 교토에 있는 동안 하 목사님으로부터 전갈을 받은 것이지요. 플러그인이라는 특별 집회가 있는데 저보고 리더십이 무엇인지,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 목사님이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셨으니 내가 무슨 이유이든 목사님 청을 거절할 수 없겠지. 이런 일이 이른바 예정설이라는 것인가. 이제 와서 생각하니 딸의 소망^로 하 목사님을 만난 것은 교토에서 한 발짝씩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영성의 계단을 향해 조금씩 발을 옮겨가는 그 발자국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전연 불가능한 스케줄을 이리저리 메우고 변경해서, 그것도 왜 나는 크리스천이 아닌가를 말하기 위해 크리스천들의 모임에 출석하려고 비행기를 타게 된 것입니다. 평소의 내 행동으로 봐서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고 내 뜻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보이지 않는 무엇이 이끌지 않고서야, 들리지 않는 무슨 소리가 날 부르지 않고서야 스스로 무인도 같은 상황께 처박히기 위해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찾아간 연구소 생활의 금기를 깨고 다시 서울에 올 생각을 했겠습니까.
여러 이야기를 덧붙이기보다는 그때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께서 기독교적 리더십이 무엇인기를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저는 교회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지금껏 어떤 종교도 믿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무신론자로서 기도시 한 편을 쓴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이끌어가시는 하용조 목사님은 종교와 관계없이 한 인간으로서도 너무 존경하는 분이시고, 제 딸 민아에게 빛이 되어주신 분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보답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저의 딸 민아의 서원은 저와 함께 교회에 나가서 기도하고, 은총받고, 제가 크리스천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자주 읽습니다만, 교회에 나간 것은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따라 몇 번 놀러 간 것이 전부였습니다.
때로는 믿는 사람의 이야기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말하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더 효과적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혹시 저를 밖에 두시고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간혹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 목사님께서 그런 미션을 저에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크리스천들의 리더십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제가 생각하는 리더십이 과연 무엇인지 밝히기 전에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에게 이상한 퀴즈 문제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낙타도 인간처럼 눈물을 홀릴까요?”
어떻습니까. 흘릴까요. 흘리지 않을까요.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영혼이 있는 인간만이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 이고 혹은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 분명히 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거나 들었다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악어의 눈물’이라는 서양 속담도 있으니 감정은 없어도 우는 것처럼 보이는 짐승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태껏 낙타가 운다는 말은 아마 들어본 적이 없으셨을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낙타는 웁니다. 아주 큰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슬피 웁니다. 몽골의 여자 감독이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 장면에 실제로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낙타는 어느 때 그리고 왜 우느냐? 그것이 아주 극적입니다.
시실 낙타는 사막의 가열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특별한 생명 장치를 지니고 있는 짐승입니다. 등에 물주머니의 구실을 하는 혹이 있다거나 모래바람을 막는 긴 눈썹이 있다거나 하는 모습만이 아니라 성격도 매우 특이하다고 합니다. 프랑스 말에도 "낙타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아주 이기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욕이라고 해요. 저는 가끔 성서에 나오는 말을 검색하는 것을 즐기는데 언젠가 낙타라는 말을 찾아봤더니 60행에 걸쳐 63번이나 나오더군요. 그런데 성서에서도 낙타는 별로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는 그 유명한 성경 구절만 해도 낙타가 나올 자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으니까요. 원전대로 하자면 그것은 ‘낙타’가 아니라 밧줄 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랍말로 밧줄은 gamta고 낙타는 ‘gamla’로 t와 ‘1’의 글자 한 자 차이로 밧줄은 낙타가 될 수도 있고, 낙타는 밧줄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그 때문에 그 한 자 차이의 잘못으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로 와전되고 만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낙타를 밧줄로 돌려놓으면 그 비유는 자연스럽게 들리고, 그 논리는 비로소 합리성을 띤다는 겁니다.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실이기 때문에 실과 대비되는 것은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지요.
문제는 그것이 밧줄이든 낙타이든 우리의 관심은 낙타는 사막지역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짐승인데도 양처럼 인기가 있는 짐승은 결코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새끼를 낳아놓고서도 간혹 돌보지 않는 모성애 없는 이기적인 낙타들이 있다는 겁니다. 새끼가 굶주려 죽게 생겼는데도 젖은 물론이고 가까이 오면 발로 차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거죠. 그러면 결국 어미에게 버림받은 새끼 낙타는 불쌍하게도 죽고 만다는 겁니다. 가열한 불모의 땅, 사막의 환경에서 살다 보면 그렇게 비정한 낙타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럴 때 몽골 사림•들은 옛날부터 이런 매정한 어미를 다스리는 독특한 비방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아주 놀랍게도 그 어미 낙타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악기로 마두금이 라는 현악기가 있는데, 그것을 특별히 잘 연주하는 악사를 먼 데까지 가서 초대해 오는 것이지요. 그러고는 낙타를 앞 에 놓고 마을 사람이 모여 연주회를 엽니다. 마두금 연주에 맞춰 그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인 할머니가, 즉 자식 손자를 많이 키워본 여인이 노래를 부른다는 겁니다. 자장가와 같이 다정다감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구슬픈 사랑의 노래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두금 연주와 할머니의 구슬픈 가락을 듣고 낙타의 눈에서 는 눈물방울이 흘러내립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린 낙타는 모성애를 되찾아 제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정을 들여 잘키운다는 거지요. 감동이라는 말을 한자로 써보세요. ‘감感’은 느낀다는 뜻이고 ‘動동’은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감동을 글자 그대로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사람도 동물도 느껴야 움직입니다. 이 감동을 주는 힘이 바로 음악이요, 예술입니다.
삭막한 사막지대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아닙니다. 마두금의 떨리는 선율과 여인의 정감 있는 노랫소리는 돌처럼 굳고 차가웠던 낙타의 가슴을 움직이는 따스한 바람이 됩니다. 숨어 있던 모정이 눈 비비며 깨어나고 잊고 있던 사랑이 모래알을 적십니다. 아무리 살기 힘든 사막의 가혹한 환경이라고 해도 음악은 그것을 초월해 생명의 초 원을 창조합니다.
왜 교회에서 찬송가 소리가 울려 나오는지 아시겠지요. 찬송가 한 번 부르는 것은 백 번 기도하는 것과 맞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음악에는 초월의 힘이 있어요. 생각의 힘보다 더 크고 깊은 느낌의 힘이 있습니다. 교회에 함께 모여서 빅수를 치고 노래할 때에 가장 먼저 찾아오는 변화가 바로 초월적인 감동입니다. 예술성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우리 가슴속에 숨어 있던 사랑을 되찾고 되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모성애를 잃은 낙타를 울리는 음악이 하물며 믿음과 사랑이 크신 여러분들의 마음을 어찌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큰 교회에 파이프오르 간이 있는 것을 보세요. 그 소리는 꼭 사막의 모래알 하나하나를 적셔 주는 이슬과도 같이, 혹은 초원의 풀을 눕히는 바람처럼 우리 가슴을 흔들지 않습니까.
낙타의 눈물과 마두금의 음악. 리더가 누군가를 이끌어가려면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영혼을 일깨워서 눈물이 솟아나게 해야 합니다. 비가 와야 무지개가 돋는 것처럼 눈물이 흘러야 영혼에 무지개가 생깁니다.
예술의 힘과 사막의 사자
권력과 금력 앞에서 사람들은 무릎을 끓지만 스스로 좋아서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니체의 낙타는 무릎을 꿇고 더 무거운 짐을 지워달라고 합니다.
인간으로 치면 대체 낙타의 눈물이라는 게 뭘까요. 학생 시절의 첫 사랑 경험을 떠올려보십시오. 돈으로 꾀거나 깡패의 위협을 가해서는 여학생의 마음을 끌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실 겁니다. 오히려 지위가 높거나 돈을 많이 가진 자제일수록 참된 사랑을 하는 데는 불리합니다. 저 여학생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인지, 내가 권력자의 아들이고 재벌 아들이라는 소문을 듣고 접근하는 것인지.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여성에게 다가가는 이야기를 그 흔한 TV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보셨을 겁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예술에는 돈과 권력이 할 수 없는 특수한 힘이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도 잘 묘사되어 있지만, 초등학교 시절 학급을 지배하는 아이들은 대개 주먹이 센 아이들이었지요. 그러다가 중학교에 들어가면 부잣집 아들 옆에 아이들이 꼬입니다. 중국집에 데려가 자장면도 사주고 영화관에도 데려가고 비싼 물건도 구경시켜주니까 그런 것이지, 과연 그 아이들에게 무슨 지도력이 있어서일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얼굴에 여드름이 돋고 청춘사업이 시작될 무렵 이들은 주먹이 세거나 혹은 부자인 친구보다는 저에게 다가왔지요. 녀석들은 돈과 힘으로 좋아하는 여학생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지요. 나보고 연애편지를 써달라는 거였어요. 돈으로, 주먹으로 안 되는 게 사랑이니까 내 언어의 힘을 빌려야 여학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지도력을 가지려면 반드시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군사력, 경제력 다음에는 남을 감동시키는 매력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만 보면 즐겁고, 그 사람이 말하면 어려운 일도 함께하고 싶은 것. 이렇게 절로 우러나오는 힘은, 금전과 권력이 현실인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도 돈과 권력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CEO분들께 이야기를 할 때 저는 늘 문화 마인드를 가지고 매력 있는 인간이 되어야 회사도 소비자도 좋아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원래 문화라는 말은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준말입니다. 무력이나 금력이 아니라 글의 힘으로 상대방을 교화시켜 다스리는 방법이 곧 문화라는 말의 원뜻이었습니다.
야생의 쥐와 문화의 쥐를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짐승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뭡니까. 바로, 몇천 년을 두고 사람과 원수지간으로 살아가는 쥐입니다. 밤에는 대들보를 갉아 잠 못 이루게 하고 사람이 먹을 음식을 가로채고 페스트균을 옮기죠. 윤리적으로 봐도 다른 짐승은 집 바깥에서 인간을 해치지만, 같은 집 안에 살면서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쥐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쥐만 보면 무의식적으로 신발짝을 들고 쫓아갑니다. 사방에 쥐덫을 놓고 쥐약을 놓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쥐를 박멸해도 집 안에서 쥐 소리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월트 디즈니는 어떻습니까? 쥐를 만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게 해서 아이들에게는 행복을 주고, 자신은 엄청난 즐거움과 부를 얻었지요. 사랑으로 상상력과 창조력을 발휘하면 싫던 쥐들이 우리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는 쥐가 됩니다.
자식을 향해 발길질을 하는 낙타를 데려다가 누가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까. 음악이라는 감동이었습니다. 할머니의 노래였습니다. 이처럼, 미운 사람이나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현실 앞에서는 무력하지만 그것을 상상의 공간, 창조의 공간으로 끌어들이면 월트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처럼 여태껏 미움받던 쥐가 사랑과 꿈의 쥐로 바뀌면서 부까지 창출하게 됩니다.
저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신앙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신앙이라는 것과 문화, 예술이라는 것은 지극히 닮은 것이라는 점만은 알고 있지요. 쥐를 미키 마우스로 탈바꿈시킨 상상력을 하나의 은총이라고 보고, 그러한 창조력을 하나님의 입김이라고 본다면, 절대자의 권능은 자식을 미워하는 낙타를 자식을 사랑하는 어미로 변화시켰듯이 인간의 원죄 또한 바꿉니다. 그러한 점에서 예술가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도 예술의 힘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美的미적 단계는 낙타에게 눈물 이상의 것을 주지 못하지요. 키르케고르의 그 유명한 3단계설로 하자면 그저 마두금과 할머니의 노랫소리는 미적 체험에 머물러 있습니다. 모성애를 회복하고 새끼를 보살피고 고난의 사막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게 하려면 윤리의 힘, 윤리의 단계로 올라 가야합니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대체로 그 문턱에서 발을 헛디디거나 넘어지고 맙니다. 유미주의자 오스카 와일드가 그러했고, 탐미주의자 보들레르가 그러했고, 한국의 이상이 그러했습니다. 저 역시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키르케고르의 ‘미적 단계-윤리적 단계-종교적 단계’의 길로 향한 것이 아니라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손가락을 따라서 ‘낙타-사자-유아’의 그 3단계 길로 간 것이지요.
낙타는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지고 외로운 사막을 향해 갑니다. 더 많은 짐을 지고 가는 용기와 오기가 낙타를 사막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다 낙타는 그 사막에서 복종성, 긍정성, 그리고 수동성의 낙타의 정신 에서 벗어나 부정의 정신, 용을 물어 죽이는 강력한 힘과 용기를 지닌 사자로 변신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제어하는 사막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지요. 다시 니체의 길은 사자에서 낙타의 긍정도, 사자의 부정의 정신도 모두 지워버리고 무구한 상태의 유아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의무에서 나온 일은 유희로 바뀌고 그 행동은 주어진 과업의 수행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한 창조로 변합니다. 낙타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 외로운 사막에서 왕양한 자유가 있는 초인의 벌판을 향해 달려갔던 것이지요. 물론 그러한 초인은 어디에도 없고 그 사통팔달로 뚫린 초원의 바람은 광기의 바람이었지요. 니체가 미쳤던 것처럼 지도자가 아니라 미치광이가 되는 수가 많습니다. 예술가가 지도자가 된다 해도 대개는 그림을 그리던 미술학도이며 니체를 섬기려던 히틀러처럼 독재자가 되는 일이 많았지요.
아직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조금씩 낙타가 어디로 향해야 되는지를 공부하고 있지요. 최근의 교토 생활, 저에게는 사막처럼 외로운 그 생활 속에서 니체와는 또 다른 사막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자가 되고 초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나약하고 비겁하고 욕심 많은 지방덩어리로서의 자신을 보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미적 체험의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로, 거기에서 다시 종교적 단계로 그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저는 아직도 미적 단계의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왜 지도자가 될 수 없나를 말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주제인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리더십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답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베토벤은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지만 정작 자신은 사람 하나 제대로 거느리지 못하고, 친구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보들레르나 랭보를 보더라도, 대개 예술가들은 자신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으로 남에게 감동을 줍니다. 물귀신처럼 남을 자기 대신 어둠의 심연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은 있지만 그곳에서 나와 구제의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은 없습니다.
예술가가 남 앞에 리더로 군림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란 교향악단의 지휘자 정도입니다. 청중을 아무리 감동시킨다 하더라도 연주장을 떠나면 청중의 한 치 마음에도, 그들이 가야 할 발걸음의 방향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드러커도 군대 조직과 대비되는 것으로 교향악단적 조직과 지휘자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정보를 갖고 다른 연주자와 협력하면서 전체의 교향곡을 연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휘자는 단원에게 일일이 정보를 주거나 지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연주를 네트워크로 모아 조화시키는 힘. 그것이 오늘날의 새로운 CEO, 리더들입니다. 옛날의 리더들은 정보를 혼자서만 가지고 있었지요. 능력도 혼자만 가지고 있었고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그 사람 말이면 다들 복종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시대적 지도자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런데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해보세요. 교향악단에서 지휘자는 어느 쪽을 봅니까? 관객석을 봅니까? 관객석에서는 지휘자의 둥만 보입니다. 객석이 아니라 연주자 쪽만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청중들의 표정이 어떤지, 자고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교향악단 지휘자처럼 CEO가 회시를 운영한다고 가정해보세요. 큰일 납니다. 저희는 생산만 했지 소비자가 뭘 생각하는지,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니까요. 연주가 다 끝나고 나서 박수를 받을 때만 관객석을 향합니다.
“박수받을 때 떠나라”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박수받을 때만 관객석을 보는 지도자는 안 됩니다. 또 자신들끼리만 서로 한 그룹을 이루고는 상대방이 기침 한번 못 하게 합니다.
교향악단뿐만이 아니라 연극도 그렇습니다. 한국의 판소리와 비교 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령 악장과 악장사이에 약간의 휴식이 있으면 관객석에서는 참았던 기침을 하느라고 야단입니다. 그런데 우리 국악을 들으면서 기침 참는 걸 보셨습니까? “좋다!” 하고 추임새도 넣고, 기침도 하고, 별짓을 다합니다. 음악은 연희자와 함께 있는 것이죠. 함께 음악 속에 들어 있는 거예요.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판소리에서 최고는 노래 부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옆에서 북을 치며 장단을 맞춰주는 고수지요. 그래서 일고수 이 명창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고수는 한쪽 눈은 창을 부르는 사람에게, 한쪽 눈은 관객석에 두고 있습니다. 서양의 컨덕터지휘자처럼 뒷모습을 보이고 자신들끼리 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연희를 청중과 연희자 사이에 낀 중간적 위치에서 함께합니다. 오늘날의 CEO는 지휘봉을 든 교향악단의 컨덕터가 되기보다는 북채를 든 고수가 되어야만 기업을 끌고 가게 됩니다.
양치기의 리더십
진정한 리더는 앞에 서지도 않고 뒤에 서지도 않는다. 그 한복판에서 양을 이끌어가는 양치기가 진정한 리더이다.
교회 지도자의 업그레이드를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청탁이었지요. 그때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천 년 동안 최고의 지도자이셨던 예수님이 계신데 뭘 다시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리더십이 무엇인지 몰라도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발자국만 좇아가면 될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걸어가신 150킬로미터의 그 길, 석가모니가 룸비니에서 갠지스 강까지 걸어가신 5백 킬로미터의 길. 그것이 지도자의 길이었습니다. 양 떼 모는 이야기에서 보듯, 그 길이 바로 지도자의 길이었습니다. 그 모든 드라마와 일생이 우리에 게 보이고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걸어가신 길을 알면, 지도자의 업그레이드는 할 필요가 없지요. 권력도 돈도 상관없이, 2 천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나라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지도자로서 군림하셨습니까? 때문에 기독교인이라면 지도자의 모델은 예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양 치는 목자로 비유할 경우, 양을 치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가능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양 치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알려져 있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는 양 떼의 어디에 서 있습니까. 대개는 지팡이 짚고 양 떼의 선두에서 걸어가면 뒤에서 양 떼들이 졸졸졸 따라오지요. 목자는 리더, 양들은 팔로어 입니다. 지도자는 무리의 앞장에 서서 미래의 풍성한 초원을 향해 수 많은 양 떼들을 이끌고 갑니다. ‘나를 따르라’ 하며 지팡이를 들어 갈 길을 지시하고 그 방향을 알려줍니다. 어디에 가면 풀이 있고, 어디에 가면 늑대가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목자이기에 양은 안심하고 지팡이가 가리키는 쪽을 향해 묵묵히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양을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처럼 전능할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보통의 경우 "나를 따르라’ 하는 지도자 는 독재자가 아니면 독선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독재자도 못 되는 지도자가 앞장을 서다가는 낭떠러지에 전부 떨어져 죽거나 길을 잘못 들어 눈밖에 없는 설산에서 굶어 죽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와는 달리 목자가 앞에서 양 떼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모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리더들은 문자 그대로 양 떼를 뒤에서 몰아가는 백업형이지요. ‘너희 마음대로 풀이 있는 곳을 찾아가 뜯어 먹어라.’ 그러면 양 떼들은 무리를 지어 밑에서부터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갑니다. 불타는 식욕의 욕망이 푸른 풀을 찾는 것이지요. 누가가르쳐주지 않아도 풀이 어디에 있는지, 냇물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양을 뒤에서 몰아가는 목자는 가끔 무리에서 벗어난 양들이 무리를 찾아가도록 지팡이로 경고하고 유도합니다. 이따금 늑대가 오면 지팡이로 내쫓아 양의 무리를 보호하기도 합니다. 앞장서서 양을 이끄는 목자의 지팡이는 방향을 알려주는 방향타요 비전의 빛이지만, 뒤에서 몰아가는 목자들의 지팡이는 양을 관리하고 늑대를 쫓는 보호의 무기가 됩니다.
뒤에서 몰아가는 목자가 앞에서 이끄는 목자보다 훨씬 민주적인 지도자입니다. 좀 비근한 예를 생각해봅시다. 여러분들은 혹시 중고등 학교 시절에 커닝을 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시험시간에 앞에서 지켜보는 선생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시선을 보고는 선생님이 저쪽을 보면 이쪽에서 커닝을 하고, 이쪽을 보면 저쪽에서 커닝을 하는 것이죠. 그러나 조금 지능적인 시험 감독들은 뒤에 가서 서 있습니다. 자신이 어딜 쳐다보는지 모르게 하는 거지요. 그러면 학생 전체에 감독관의 시선이 고루 퍼져 있게 됩니다. 실제로는 시선이 한 곳에 있어도 말입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힘이 골고루 미칩니다.
그러나 이 관리형 지도자에게도 한계는 있지요. 양에게 맡기고 뒤에서 양 떼의 치다꺼리를 하는 지도자들은 엄격하게 말해서 리더가 아니라 매니저자라고 해야 옳습니다. 초원에 풀이 풍성하게 있을 때에는 충분히 양 떼들을 이끄는 지도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관리 능력만으로 새로운 초원으로 양 떼를 끌고 갈 수는 없지요. 출애굽의 상황, 그 사막에서는 모세처럼 앞장서는 지도자의 힘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는 독선적인 지도자도 관리형 지도자도 양 떼들을 몰기 힘듭니다. 양 떼들이 침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진정한 양치기는 앞에도 뒤에도 서지 않습니다. 양 떼들의 한복판에서 함께 움직입니다. 뒤도 앞도 아닌 무리 한가운데에서 말입니다. 이것이 현대 의 지도자상입니다.
제 임스 앙소르James “라고 하는 유명한 벨기에 화가가 그린 「1889년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Christ's Entry into Brussels in 1889」라는 그림 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 안에서 예수님을 찾아보세요. 브뤼셀 거리에 예수님이 재림한 순간을 그린 그림인데, 아무 곳에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통 그림 같으면 군중 맨 앞에 서서 높이 손을 들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그 그림에서 앞장서서 플랜카드를 들고 가는 것은 ‘사회주의 만세’라고 쓴 정치꾼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뒤쪽에서 이 환영의 무리를 지켜보고 계신가. 그것도 아닙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앙소르의 재림한 예수님은 군중 속에 파묻혀 있지요. 술주정뱅이나 부랑자들로 보이는 군중 속의 한 인물로 아주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옛 성당 같은 곳을 가보면, 한가운데 예수님이 있고 좌우나 그 아래에 사도들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만 하더라도 한가운데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창의 빛이 들어오는 곳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예수님도 한가운데 눈에 띄는 자리에 앉아 계시지만 앙소르의 그림에서는시육제의 가면 행렬처럼 인간의 얼굴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밀집한 군중의 어딘가에 숨어 계신 것입니다. 군중 속에 묻혀 있는 예수, 그래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눈에 띄지 않는 예수, 그러나 도마에게 그랬듯이 손을 내밀면 그가 예수라는 증거인 창 자국을 만질 수 있는 예수.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은 군중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지만 항상 바로 내 곁에 있는 분입니다. 섬김의 지도자라는 말을 많이 쓰고 계시지만 진정한, 업그레이드된 지도자들은 섬기는 것도 모르게 섬기는 자여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지도자로 생각하지 않고 희생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양 떼를 이끌고 모세처럼 사막을 건너 가나안의 땅에 이르는 지도자의 힘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요청되는 리더십의 특성이 제각기 다르지만 예수님은 우리 앞에, 뒤에, 그리고 나의 옆에, 무리의 한가운데에 묻혀 계십니다.
낙타는 사자가 아니라 양이 되어 사막을 건너 생명의 초원으로 가는 것이지요. 니체처럼 ‘신은 죽었다’고 하지 않고 그 초원에서 하나님을 다시 찾고 낙타처럼 무릎을 끓고 눈물을 홀리지요. 다시 모성애를 찾고 사랑으로 젖을 먹이는 착한 낙타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다만 저 같은 사람들은 아직도 니체의 유아 단계에서 자기 자신을 극복하여 초인이 되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요. 로뎅의 조각 「생각 하는 사람」을 볼 때 단지 그 모습의 아름다움만을 봅니다. 그것이 죄 지은 자들이 모든 희망을 버리고 지옥의 문(단테의『신곡』에 등장하는 지옥의 문을 재현한 조각)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여러분과 함께 지옥의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눈물짓고 있지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는 예수님과 같은 지도자, 인간을 구제하는 가장 큰 리더가 되지 못할까요.
미의 단계에서 윤리의 단계를 거처 종교의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는 것이 지도자의 프로세스인데 저는 지금도 그 최하의 계단인 미적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글쓰기를 멈추고 미의 단계에서 윤리의 단계로 가기에는 신념이 부족합니다. 신념은 때로 저를 광기에 몰아넣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니체도 예수님도 다 같이 믿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지요. 다만 종교적 단계로 오른 리더들, 예수님처럼 무리 가운데 우리와 늘 함께하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리더들에게 존경의 뜻을 보내며 저의 이야기를 끝마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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