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교회학교와 세계화
우리 나라 기독교 교육은 대체로 미국의 교회학교의 영향을 받았았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 교육학자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였고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학교를 세우고 그 기초를 닦았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교회학교 운동을 하면서 언젠가 미국의 오랜 전통의 교회교육을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미국을 방문하여 이러한 역사의 장대한 자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기 전에 우선은 미국의 교회학교 역사를 통해 도전을 받고 내일의 한국 교회학교의 길을 우리 함께 찾아보고 싶습니다.
1. 미국의 주일 학교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적으로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은 기독교 교육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것은 특히 영국에서 온 칼빈주의적인 청교도들에게 나타났다.
청교도들은 뉴잉글랜드 지방에 거주하면서 그 어떤 사람들보다 교육적인 발전에 기여하였다.
프랑스에서 이민온 위그노파 교도들은 캐롤라이나 지방에 거주했다.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자들과 왈도파 교도들은 뉴암스텔담에,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장로교인들은 처음에는 뉴저지 지방으로 왔다가 그 후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었다. 영국의 체이커교도들과 소수의 영국 침례교인, 감리교인들은 동부 펜실베니아에,스웨덴 루터교도들은 데러웨어에 각기 거주지를 정했다. 독일의 루터교도들과 모라비안교도들,메노나이트,던커교도들,독일 개혁 교회 교인들은 펜실베니아 산간 지역에 수없이 몰려와 거주하였다. 영국 교회 신도들도 역시 버지니아와 남쪽 식민지와 후기에는 뉴욕과 뉴저지 등에 정착하였다. 메릴랜드는 처음에 박해를 받던 영국 가톨릭 신자들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곧 청교도들과 장로교인들이 더 많아졌다.
남부, 중부,뉴잉글랜드 지역으로 크게 미국을 나누어 볼 때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특히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도 매사추세츠 지방이 가장 신앙적으로 열심히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칼빈이 실시한 것과 같온 일반적이며 종교적인 형태의 정부를 조직하여 각 마을은 독립적인 자치제를 실시했으나 연방주의적인 유기적 관계를 수립하였다. 신앙을 찾아서 신천지를 향해 온 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영광을 위해,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활하도록 되어 있었다.
1631년 그들은 정치적인 권리와 특권은 교회의 회원만이 가질 수 있다는 법령을 제정하였다.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여 신앙 생활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가정에서 철저하게 예배를 드리고 자녀들에게 매일 성경을 읽히며 진리를 가르쳐 야 했다. 만일 부모가 자녀에 대해 교육을 등한히 하거나 실패하면 정부는 부모에게 징벌하도록 했으며 성직자들은 이들에게 심판날보다 큰 징벌이 있을 것임을 경고하였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 에 행할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신 6:7)을 부모들은 그대로 준행했던 것이다.
3살 이전에는 비공식적이지만 3살이 넘으면 형식적이고 보다 조직적인 교육을 실시했는데,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 씩 가장인 아버지가 간단한 교리 문답을 가르쳤다. 암기하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영적인 면을 강조하여 가르쳤으며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신앙적으로 실천하도록 교육하였다.
이 사람들은 성경에 관한 더 깊은 지식을 얻기 위해 학교를 세웠으며 1635년에 보스톤 주민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교사를 초빙하도록 주민 회의에서 결정하였다. 그 일 년 후에는 성직자 교육을 위하여 유명한 하버드 대학이 세워졌으며 찰스타운과 입시리히에 문법 학교가 세워졌다. 1637년에는 살렘에도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보아도 얼마나 교육과 종교 방면에 관심을 가졌던가를 알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라 매사추세츠주에서는 1647년에 주 법령으로 공립 학교 제도가 선포되었다. 즉,50여 호의 이주민들이 사는 곳은 반드시 1개의 학교를 설립할 것과 교사의 봉급은 주민의 부담으로 할 것을 규정하였다. 물론 그 이전인 1642년에 부모와 교사의 교육적 책임을 명하고 의무적으로 자녀들은 교육받아야 할 것이 정해져 있었다.
커네티컷주에서도 교육에 관한 매사추세츠주의 법률을 채 택하였으며 1701년에 그들도 예일 대학을 세워 성직자 교육을 실시하였고 메인주,뉴햄프셔주,버먼트주로 점차 그 교육적 정열과 제도가 확산되었다.
미국의 독립 전쟁이 발발하던 당시까지는 성서와 교리 문답이 보통으로 사용되던 교재였는데 이것은 종교개혁 시대로 부터 비롯된 영향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교재는 한정된 것으로 책은 극히 희귀했으므로 그들이 사용하던 책은「아동 학습용 글씨판(The Homebook)」이 고작이었다.6) 이 책에는 대문자와 소문자 알파벳,주기도문, 사도신경이 인쇄되어 있었다. 1690년경에는 뉴잉글랜드「초보 독본(The New England Primer)」이 발행되어 모든 가정이 다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할 테지만 교재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여 어린이의 재능, 흥미,요구에 적당치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교적인 훈련과 교육적인 열정은 점차 확대되어 1765년에 침례교도들에 의하여 뉴잉글랜드에 브라운 대학이, 1769년에는 회중 교회에 의해 다트마우스 대학이 뉴잉글랜드에 세워졌다.
중부 지역 식민지에서의 기독교 교육은 여러 민족이 섞여 살고 또 교파가 각기 달랐으므로 각 교구별로 교구 학교가 세워져서 교회의 통제와 감독 아래 교육을 실시하였다.
1683년 펜실베니아주의 법률은 모든 어린이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받도록 규정하였다. 1729년 장로 교인들은 록 대학을 처음으로 세웠고,1746년에는 프린스톤 대학을,1766년엔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 의해 뉴저지에 럭져 대학을,1755년엔 특정 교파와 관계 없이 펜실베니아 대학아 창설되었는데, 이들 대학에서는 성경과 신학이 주로 가르쳐졌고 매일 예배를 실시하였다.
남부 지역은 뉴잉글랜드나 중부 지역의 사람들과는 다른 목적으로 모인 정착민들이 많았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모여 든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이 사람들도 1618년부터 버지니아에서 교육 기관을 창설하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은 기초 교육에 불과했다.
1660년에 신앙적 원리에 따르는 대학을 세우려고 했으나 실패하였으며,겨우 30여년이 홀러서야 1693년에 제임스 볼래어(James Blaair)가 월리엄과 메리의 대학(William and Mary)을 세워 성직자 배출을 위한 교육이 실시되었는데 이는 뉴잉글랜드 지방보다 무려 반세기 이상이나 뒤의 일이었다. 남부 지역은 대체적으로 부자들이 가정 교사를 두고 그들 자녀를 가르쳤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는 기초적인 교육이나 간단한 직업 교육 이외에는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초기 미국은 대체적으로 기독교 교육적 분위기 속에서 발전하고 있었다.
뉴잉글랜드를 중심하여 일반 학교에서 기독교적 기초 교육이,중부 지역에서는 교구 학교,남부에서는 사립 학교가 각기 기독교적 원리에 입각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초기 미국의 교육은 기독교 교육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어린이들은 기독교적 환경에서 양육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요일에는 교사와 장로,목사에 의해 교회의 교리와 행동을 배우고,모든 학교 교사들은 기독교적 인격의 소유자로 선별되었고 그들은 어린이들에게 기독교적 생활을 영위하도록 가르쳤으며 언동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독교적 분위기는,하나님의 진리에 반대하는 인간 이성의 공격 을 받게 되었다. 16세기 현대 과학의 태동과 더불어, 17세기 이후 계몽 운동과 더불어 기존 체제로서의 기독교에 반대 세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750년 이후 바로 미국 독립 전쟁이 발생하기 이전에 교회가 통치하던 미국의 기독교 교육은 쇠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점차적으로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보편화되었다. 따라서 종교와 교육의 일치는 불가능하게 되었고 교육적 책임이 교회로부터 정부로 옮겨지게 되었는데,이로 인해 일반 교육에서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교육에 무관심하게 되었으며 19세기에 이르러 교육의 세속화가 급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물론 주일 학교 운동이 쇠퇴할 수밖에 없는 세속화된 세력이 전반적인 사회 구조를 침범하기는 했으나 미국은 역시 주일 학교 운동의 끊임없는 지속과 발전을 통해 유지되는 나라였다.
1674년 매사추세츠주 럭스버리(Roxbury in Massachusetts), 1676년 코네티컷주의 놀위치(Norwich), 1680년의 매사추세츠주의 프리마우드(Plymouth), 1683년 모르간 존스 목사 (Rev. Morgan Jones)가 시도한 롱아일랜드의 뉴톤(Newton, Long Island)에서 주일 학교 형태와 흡사한 기독교 교육이 시험적으로 계속되어 왔다. 그러다가 드디어, 1785년 월리엄 엘리어트(William Elliot)에 의하여 버지니아에서 최초로 주일 학교가 시도되게 된 것이다.
엘리어트는 매주일 저녁마다 그의 식구들과 하인들,그 자녀들을 모아 교훈의 시간을 가졌는데 이웃의 어린이들도 그 학교에 초대되었다. 그곳에서는 학생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학교는 처음에는 주로 백인 소년 소녀들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후에 흑인 어린이들에게까지 확대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그 백인과 흑인 어린이들이 함께 배운 것은 아니고 따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분리되어 교육을 받았다.
이 모임의 교재는 성경이었으며 선생님과 학생들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학교는 엘리어트의 집에서 계속되어 왔는데 엘리어트 목사가 다른 교회로 전근함에 따라 새로운 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801년 버지니아주 아코막(Accomac)군에 있는 버튼 오크 그로브(Burton Oak Grove) 감리교희로 옮겨간 엘리어트는 그 곳에서 오크 그로브 주일 학교의 첫 교장으로 선출되었다.
엘리어트의 주일 학교 운동의 시작과 더불어 미국에는 주일 학교가 곳곳에 설립되게 되었다. 1786년 버지니아주 하노버(Hanover)군에 있는 토마스 크런셔(Thomas Crenshaw)의 집에서 두 번째 주일 학교가 시작되었다. 이 학교는 프란시스 애즈버리(Francis Asbury)가 설립했는데 그는 존 웨슬레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웨슬레로부터 영국의 주일 학교 운동을 배웠으며 후에는 웨슬레가 창설한 감리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이 학교는 노예 교육을 위해 설립된 것이 목적이었다.
이런 시작을 도화선으로 하여 미국에는 주일 학교가 곳곳 에서 활기를 띠게 되었다. 1790년 2월 남부 캐롤라이나의 찰스톤(Charleston) 지역의 감리교회들은 읽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방법으로 주일 학교를 공식 인정받아 설립하였다. 그들은 매주일 아침 6시에서 10시까지, 오후 2시에서 6시까지 2회에 걸쳐 의무적으로 어린이들을 가르치도록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 청소년,어린이들의 종교적 교육이 교회의 중요한 임무임을 각성하고 이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로버트 레익스의 제도에 의하여 주일 학교를 조직하고 영적으로 무장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을 훈련시키게 되었다.
뉴욕에 있어서의 첫 주일학교는 1792년 스톡브리지 목사 (Rev. Stockbridge)의 누이 집에서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793 년에 캐티 휘그슨(Katy Ferguson)이라는 흑인 여인에 의해 다른 주일 학교가 세워졌으며 1803년에 베륜(Bethune) 부부가 영국에서 직접 보고 온 레익스 운동에 입각하여 그를 모방한 주일 학교를 시작했다. 1791년 필라델피아의 보스톤, 1794년 뉴저지주 패색(Passaic)에 있는 목화솜 제조 공장은 그곳에 고용되어 있는 근로 어린이들에게 주일날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선생님 한 명을 초빙함으로써 주일 학교를 각기 시작하였다. 1803년 뉴햄프셔의 포드마우스에서,또 1804년 메릴랜드의 볼티모어에 있는 브로드웨이 침례 교회에서 미국의 첫 교파적인 주일 학교가 시작되었다. 2년 후에 월머(Willmer) 목사에 의해 캔트 메릴랜드(Kent Maryland)에서 주일 학교가 시작되었다. 1810년 하나 힐(Hanah Hill)과 요안나 프린(Joanna B. Prine), 두 여인이 메사추세츠의 비버리(Beberley) 부둣가에서 놀고 있는 30여 명의 어린이들을 불러 모아다가 성경을 가르쳤는데,이것이 자라서 후에 모든 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가 되었다. 1814년에는 델러웨어(Delaware)주에 샤프(Sharpe) 박사 부인이 첫 주 일 학교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국의 주일 학교 운동은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끊임없는 비난과 반대가 계속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원인의 하나는 현대적 의미의 미국 주일 학교 운동이 약40 여 년 가까운 동안 교회로부터 독립된 조직으로 성장했던 것을 꼽을 수 있다. 교회는 이 주일 학교 운동이 외부의 무지하고 버림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도덕적 상태를 향상시키기 위한 인도주의적 노력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적 분위기와 미국적 분위기를. 혼돈한 오해에 불과하다. 이미 앞서 이야기된 것들을 통해서 이해 되고 있는 것이지만,영국의 주일 학교 운동과 미국의 초기주일 학교 운동은 그 동기가 다르다.
로버트 레익스의 주일 학교가 자선 사업적 동기에서 사회 개선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면 미국의 경우는 순수한 종교적 교육이 그 동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 주일 학교가 더 급속히 전개된 이유의 다른 하나로는 독립 전쟁을 들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학교가 폐쇄되었고 교사의 숫자도 줄어들었으며 교사에 대한 급료를 지불할 만한 재정 능력이 없었으므로 교육적인 파산 상태에 미국은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 국민의 도덕은 말할 수도 없이 부패해지고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었으므로 주일 학교 운동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서도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겨져서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도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일 학교 운동이 교회의 사업이 아닌 개인적인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영국과 같은 박해는 없었으나 곤란한 점이 없지 않았다. 레익스에게 영국에서 반대한 것과 거의 동일한 이유들,안식일을 범하며,교역자의 권리를 침해하여 사업의 성질상 교회 사업임 에도 불구하고 평신도의 활동이 너무 광범위하다는 것들이 반대의 이유였다.
트럼벌이 증언하는 것을 보면,커네티컷주의 어느 목사가 자기가 시무하는 교회 안에서 한 부인이 어린이를 모아 놓고 기도,찬송,성경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노하여 "사탄의 자식들이 마귀의 사업을 한다“고 했다니 당시의 고충올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좀더 개화된 사회에서는 점차적으로 주일 학교 운동이 그리스도 사업의 중요한 일부임을 인정하게 되었고,교회 건물을 세를 받고 주일 학교에 빌려 주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일 학교는 미국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받게 되었으니 여기서부터 조직화된 주일 학교 운동이 시작되어 세계를 향한 오늘의 주일 학교 운동에 까지 연결되게 되었다.
2. 주일 학교 운동의 세계화
1785년 미국에서 첫 주일 학교가 세워진 지 5년 뒤에 주일 학교 운동의 촉진을 위한 모임이 필라델피아에서 결성되었다.
필라델피아의 그리스도 교회의 교구 목사였던 월리엄 화이트 목사(William White)가 자신의 감독직 임 직식을 위해 영국에 갔을 때 그는 로버트 레익스와 그의 주일 학교에 관해 배우고 돌아와 1788년 주일 학교를 설립할 것을 위해 교회를 설득,1790년 드디어 평신도 중심의 주일 학교 협회가 이루어졌다.
"주일 또는 안식 학교 협회(Fiert day or Sabbath School Society),라고 불리는 이 기억할 만한 조직의 목적은 젊은이들을 도덕적,종교적으로 교육하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성경과 때로 사회에서 지시하는 도덕과 그 외에도 종교 서적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때 미국은 독립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국민의 생활은 극도로 지치고 쇠약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회는 매우 불건전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협회는 이러한 시대에 주일 학교 운동의 확대를 통해 기독교적 정신의 회복을 주도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은 주일 학교 운동을 위한 전국적인,흑은 지방적이거나 초교파적인 연합체로 조직,확대되어 가게 되었다.
그래서 1804년 서로 다른 교파의 여성들이 모여 연합 협회(Unio Society)를 결성하고 필라델피아에 사는 가엾은 여자 어린이들에 대한 종교적 훈련과 교훈을 목표로 설정했다. 1808년에도 서로 다른 교회의 사람들이 모여 필라델피아에 복음 협회(Evangelical Society)를 조직하고 시내와 주위의 불쌍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지식과 복종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연이어 1809년 피츠버그시에서 주일 학교 운동이 조직적인 형식을 갖추고 일어났다. 1811년 런던으로부터 온 로버트 메이 목사에 의해 필라델피아에서 주일 학교 기관 조직의 시초가 생겼다. 1816년에는 뉴욕과 보스톤에서 자체적인 주일 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연합회가 이루어졌다. 이와 유사한 연합회들이 보스톤, 하트포드, 뉴헤본, 알바니,우티카, 프린스톤, 찰스톤, 콜롬비아, 그리고 피츠버그 등에서 조직되었다. 따라서 주일학교는 급증하였고 이의 발전을 위한 지방 연합회의 증가로 긴밀한 유대 관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정보 수집 활동, 운영 방법,주일 학교 개선안 등이 각기 개발되기 시작했고 이것의 활발한 교류가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주일 학교 운동을 좀더 힘있는 조직 아래 진행해야할 필요가 있어 1817년 필라델피아시에 이미 설립되 어 있던 모든 주일 학교 관계의 기관들을 모아 필라델피아 주일 및 성인 학교 연합회(Philadelphia Sunday and Adult School Union)가 조직되었다. 그 주요한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과 사랑으로 일치하게 되기를 힘쓰는 것과,주일 학교 교사로 하여금 무보수 봉사의 정신을 가지며 아직 주일 학교가 설립되지 않은 곳에 주일 학교를 신설하고 서로 신앙적으로 격려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1821년까지 6개 주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60여 개의 주일 학교를 새로 세웠으며 이를 돕기 위해 2명의 선교사가 추가 증원되었다.
1817년 조직이 만들어진 지 7년이 지나 대략적인 조직 사업이 마쳐진 1824년 5월 25일 주일 및 성인 학교 연합회 연례 총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24개 주 가운데 15개의 주로부터 모인 성직자와 직원 대표들이 모였는데 여기서 미국 주일 학교 연합회(American Sunday School Union)가 정식으로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 특기할 만한 연합회는 주일 학교 역사에 있어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된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웨슬레는 주일 학교를 평하여 기독교인 양육원이라고 하였다. 교사들이 어린이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지도하여 놀라운 부흥의 기세가 날로 더하는 현상에 대한 칭찬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24년까지 주일 학교는 주로 성서 지식의 보급과 개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1805 년에서 1820년 까지는 가르치는 방법이 별로 개발된 것이 없어 성서 암송 법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문답식을 겸한 강의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주일 학교가 전국적인 연합회로 결속되어 크게 발전할 기틀을 잡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1817년 필라델피아에 이미 조직되어 있던 주일 및 성인 학교 연합회(Sunday and Adult School Union)의 명칭을 바꾼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임원과 위원이 모두 재선되었으며 연합회의 목적,위치와 회원 에 관한 규정에 이르기까지 아무 변동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명칭을 바꾼 것은 사업의 범위를 전국적인 것으로 확대한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 주일 학교 연합회는 초기부터 문서 간행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주일 학교 잡지(The American Sunday Magaine)」라고 이름한 월간물을 발행하는 한편, 뉴욕 주일 학교 연합희로부터 주일 학교 문고(Sunday School Repository) 를 매입하여 주일 학교 문서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들은 또「청소년의 친구(The Youth Friend)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연합희가 발족한 이듬해인 1825년에 어린이용 인쇄물 로 매일 9만 매,「주일 학교 잡지」는 매월 2천 5백 부,「청소년의 친구」는 매월 1만 부씩 발행하였다.
점차로 미국의 여러 교파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주일 학교 사업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825년 침례교에서 미국 침례교 출판 협회(American Baptist Publication Society)를 형성하여 1840년 이후 계속 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연합 교회주의자들은 1825년에 조직하여 1868년에 연합 교회 안식 학교와 발행 협회 (Congregational Sabbath school Union and Publishing Society)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또 1827년에 감리교 주일 학교 연합회(Sunday School Un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가 조직되었다. 루터교는 1830년에 주일 학교 사업을 위한 협회를 조직했다.
1824년 미국 주일 학교 연합회는 6명의 유급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그 목적은 새로운 주일 학교 설립,기존 학교 방문, 퇴보적인 학교에 대한 부흥 운동 및 격려,연합 지부 조직,연합회 목적 설정과 그 필요성 확장이었다. 이 사업의 성장으로 선교 협회를 조직하고 선교활동의 존속을 위해 35명의 선교사를 고용했다. 당시 동부 지방 여러 주에서는 주일 학교 사업이 이미 많은 발전이 있었으나 중, 서부 지방에서는 아직 보급되지 못한 곳이 많이 있었다. 특히 미시시피 유역에는 아직 주일 학교로 인정할 만한 것이 없었다.
1930년 5월에 아더 타펜(Arther Tappen)은 미국 주일 학교 연합회가 2년 안에 미시시피 유역의 여러 지방인 오하이오,인디아나,일리노이스,캔터키,테네시,알라바마,루이지애나,미시시피,미조리 등 9개 주와 편실베니아,버지니아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방대한 지역에 주일 학교를 설립할 것을 제의했다.
30만 평방 마일에 약 400만의 인구가 있는,10만 달러의 경비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 이 제안에서 아더 타펜은 스스로 2천 불을 부담하기로 하였다. 이런 제안은 많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곳곳에서 기부금이 모아졌고 미시시피 유역 여러 지방을 구분하여 선교 기관을 조직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을 위한 모임을 가리켜 당시의 신문은 “나라 안에서 열리는 가장 중요한 모임” 이라고 보도했으며 실로 이 사업은 수년 안에 놀라운 성공 올 거두게 되었다.
대계곡 전도 운동(Valley Capmpaign)"이라고 불린 이 미시시피 유역을 위한 주일 학교 운동은 이미 서부에서 활동해 오고 있던 교육 협회,국내 전도 협회,성서 공회,트렉트(Tract) 협회의 협력을 받아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공통의 목적을 위해 교리적 정치적 견해 차이를 떠나 상호 원조한다는 원칙 아래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운동에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일리노이주의 왼체스터의 작은 마을에서 살았던 사람,낮에는 모자 만드는 일을 하고 밤에는 연희장에 나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살던 사람,어느 날 주일 학교에 다니는 그의 어린 딸이 주일 학교 교장 선생님이 한 사람씩 새로운 학생을 데리고 오라는 지시 때문에 자기의 아버지를 졸라 할 수없이 딸을 따라 처음으로 주일 학교에 나가게 된 사람,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홀리신 속죄의 보혈을 확실히 믿고 구원의 도를 증거하기로 결단한 사람,그가 바로 스티본 팩손(Stephen Paxon)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던 직업을 포기하고 미국 주일학교 연합회에 가입하여 하루 1달러라는 급료로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 돈으로는 마을에서 살기 어려워 파이크(Fike)군의 황야로 나가 통나무 오두막집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을 하며 선교사업을 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이십여 년 간의 위대한 전도자로서의 본격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리노이주의 피치필드의 조합 교회에서 설교를 마친 후 그는 목사님으로부터 말 한 필을 선물받았다. 말을 타고 전도를 하던 택손은 그 말의 이름을 주일 학교 운동의 선구 자였던 로버트 레익스의 이름을 따서 로버트 레익스라고 지었다. 그후 25년간이 말은 10만마일 이상을 팩손과 더불어 지냈던 것이다. 이 팩손의 말,로버트 레익스는 길에서 결코 어린이들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이 멈추어 서서 팩손으로 하여금 전도할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팩손의 25년간의 헌신적인 주일 학교 사업을 위한 노력은,미시시피 유역의 주일 학교 운동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는데 그는 1881년 4 월 22 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 났다. 다리를 절둑거리고 말을 더듬는 불리한 신체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팩손은 그의 생애를 통해 1,314개의 새로운 주일 학교를 설립하고 83,405 명의 학생을 얻었으며 1,747 개의 다른 주일 학교를 도와주고 격려했던 것이다. 자신의 받은바 축복올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준,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았던 스티본 팩손에게 감동되어 미국 주일 학교 연합회는 1829년에서 1831년 사이 78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2,687 개의 주일 학교를 개설했다.
이러한 미시시피 유역에서의 놀라운 “대계곡 전도 운동”은 주일 학교야말로 국민의 지적,그리고 도덕적 교양을 진흥시키고,사회적,종교적 제도를 영속시켜 국가의 번영을 도덕적인 깨끗함과 장래의 행복과 일치시킨다는 주일학교연합회의 신념 위에 서서 추진된 것이었다.
따라서 남부 지역에서도 강한 자극을 받아 1834년 5월 미국 주일 학교 연합회에서는 400만 인구 가운데 50만 명의 백인 어린이와 30만 명의 흑인 어린이들을 위한 계획도 진행되게 되었다.
1824년부터 1874년까지의 반 세기 동안이 미국 주일 학교 사업에 있어 매우 활발한 발전적 시기였다. 어떤 이는 일 년 동안에 만 칠천 명이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왔다고 보고 했다. 아무튼 이 사업의 결과로 남부와 서부에만도 61,299 개의 조직과 407,242 명의 선생과 2,650,784 명의 학생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방대했던 사업은 87,291 개의 학교에 도서를 기증했다.
이 기간 동안에 선교 계획을 위해 지출된 돈은 2,133,364 달러 13센트 그리고 가난한 학교와 가정에 도서 기증을 위해 517,000 달러가 지출되었던 것이다.
광범위한 사업올 위한 지역간의 긴밀한 협조와 관계는 미국에 있어서의 전국적인 대희를 소집할 필요에 공감하고 있었다. 미국 주일 학교 연합회라고는 하지만 원래 그것은 필라델피아를 중심한 지역적인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미국의 북부 지방에 아무래도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632년 4월 10일에 모였던 주일 학교 연합회 간부들은 그 해 5월 23일 전국 내에 있는 주일 학교 교장, 교사 및 기타 관계자를 망라한 전 미국 대희를 위한 준비회를 열기로 하였다. 예정대로 1832년 장로교 총회의 개최지이기도 했던 필라델피아에서 모임을 갖고 그 해 초가을 뉴욕에서 제 1 회 전 미국 주일 학교 대희를 갖기로 합의하였다.
1832년 10월 3일 드디어 뉴욕시 체담가의 교회에서 제 1회 전 미국 주일 학교 대희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14개 주 24지역에서 220인의 대표가 참석하였으며 뉴져지주의 혼 데오도어 에르링하젠(Hon Theodore Erellinghagen)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어린이 주일 학교 조직 문제, 교사의 자격,지역 연합회 조직,주일 학교 집회수를 매주 1회 이상으로 하자는 것이 토의되었다.
1833년 5월 22일전 미국 주일 학교 제2회 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어 데라웨어의 유력한 법률가 월라드 홀(Willard Hall)이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2회 대희는 1회 대회 후 겨우 7개월이 지나 다시 모였던 관계로 9개 주로부터 온 소수의 사람들로 치뤄졌는데,2회 대회에서 기억하고 넘어갈 것은 주일 학교 어린이 모집에 있어 미합중국의 건국일인 7월 4일 거국적으로 일정한 계획 아래 일제히 실시하자는 안건이 통과된 것이다. 그러나 이 2회 대희 이후 약 26년간 전국 대희는 중단 상태에 있게 되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재정적인 것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전국적인 모임보다는 지방적 활동에 더 흥미를 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에서의 전국 대희의 중단이 주일 학교 운동의 쇠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때에도 주일 학교는 꾸준히 발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지방 모임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미국 안에서 최초의 군 대희로 알려 진 1846년의 웬체스터에서의 모임을 시작으로 1855년 매사추세츠주,1857년 뉴욕,커네티컷주,1859년의 일리노이주,그보다 조금 앞선 1856년의 부룩크린과 보스톤에서의 자체적인 지방 주일 학교 대회가 있었던 것이다.
1859년 2월 22일에서 24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제3회 대회가 모였을 때에 17주와 한 지방(콜롬비아)이 대표를 파송한 이외에 영국으로부터 1명의 방문자가 왔다.
그동안 미국에서의 남북전쟁으로 대회가 다시 중단되었다가 1869년 4월 28일에서 30일까지 뉴져지주 뉴와크(Newark)에서 28개 주의 대표 526명이 모였고 처음으로 캐나다, 영국,아일랜드,스코틀랜드, 이집트,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표들을 초청, 참석하였다. 당시 회장으로는 죠지 스류어 트(Jeore Stuart)가 선출되고 이 대희에서의 획기적인 의제 는 주일 학교 교재를 위한 협동이었다. 남북 전쟁이 끝난 지 오래지 않아서 남부 지역에서는 많이 참석하지 않았으나 500여명의 회원 외에 2천 5백여 명의 방청객이 항상 회의장을 가득히 메우는 성공적인 대희였다. 이 대회는 형식상으로 전 미국 주일 학교 대회였으나 실질상으로 볼 때 이것은 한 국제적 회의였던 것이다. 이 대회에서는 대회의 기간을 삼 년에 1번씩 모이기로 정하였으므로 제5차 대희는 1872년 4월 16일에서 19일까지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게 되었는데 미국 28주와 한 지방으로부터 338명의 대표,영국,캐나다, 인도로 부터 소수의 방문자가 참석하였다.
제5회 대회는 유명한 통일 공과안이 만장 일치로 채택된 특기할 만한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결의에는 제이콥스(B. G. Jacobs)와 뉴욕 감리교회의 빈센트(H. Vincnet) 목사의 공헌을 잊을 수 없다.
제이콥스는 시카고의 한 평신도로서 주일 학교 공과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1840년 이래로 주일학교 공과가 혼잡기에 처한 것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기 교파별로 공과 발행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쓰게 되고 각기 교파적 특색을 나타내기에만 전력하였으므로 연합의 정신이 약화되는 것을 염려하여 같은 성서 본문으로 전세계 기독교 신자가 같은 시일에 공부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의 연합 정신을 고취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통일 공과를 위한 운동은 곧 실행에 옮기게 되어 공과 위원으로 목사와 평신도 중에서 5인씩 임명하여 제1주기,1873년부터 1879년까지 7년간 공과 편집의 책임을 맡게 하였다. 이로써 유명한 만국 통일 공과(International Uniform Lessons)가 나오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제이콤스와 빈센트 목사의 노력으로 통일 공과는 미국 안에 있는 여러 교파나 교회의 협동 정신을 고취한 것만이 아니었다. 1875년 5월 11일에서 13일까지 볼티모어에서 제6차 대회로 모였을 때 캐나다로부터 정식으로 파송을 받아 참석한 대표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6차 대희는 그 대회의 구성원으로 보아 미국에 국한된 대회가 아니었으므로 국제 대회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을 제1차 국제 주 일 학교 대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1차 국제 주일 학교 대회를 통해 650만 명의 미국 희원과 30만 명의 캐나다 회원을 얻게 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미국에 있어서의 활발하고도 진지한 주일 학교 운동의 노력은 세계 여러 곳으로 전해져서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1876년 프랑스 정부는 미국의 초등 교육의 원리와 방법을 연구할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 2년 후에 위원회의 위원장인 뷰송(F. Buisson)은 그 연구 결과를 발행하여 발표했다.
주일 학교는 미국 교육의 정상적인 재정이 투자된 부속 기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이들을 완전하게 교육시키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이의 목표는 어느 곳에서든지 가족과 학교와 교회에 할당된 복합적인 선교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미국인 생활 속에 이 기관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지 각 색의 환경은 이를 더욱 풍부하고 견고하게 대중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각 교파의 지도자들, 특히 교회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일 학교는 탁월한 전도 기관입니다.
세계적인 관심의 증가와 더불어 국제 주일 학교 대회는 확대되고 발전하였는데 여기에는 1922년 국제 주일학교 대회가 국제 종교 교육 협회로 바뀌기까지 과정에서의 대회 순서를 연대기적으로 적기로 한다.
제2차 대회,1878년 4월 17일에서 19일까지 조지아주 아틀란트에서 개최되었는데 이것이 남부 지역에서 모인 최초의 대회였다.
제3차 대회, 1881년 6월 22일에서 23일까지 캐나다의 수도 토론토에서 개최되었다.
제4차 대회,1884년 6월 11일에서 13일까지 캔터키주 루이스빌에서 개최되었다. 이때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과 캐나다는 주일 학교가 조직되지 아니한 지역이 거의 없는데 총학생수는 9,146,028 명이며 그 중 미국인이 8,712,551명임을 시사했다. 이때 1886년부터 1893년까지 사용할 공과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에서 온 회원까지 포함하여-영국인 4명 프랑스인 1명-위원이 선출되었다.
제5차 대회, 1887년 6월 1일에서 3일까지 시카고에서 열렸다. 이때 감리교의 목사인 W. A. 던컨 박사가 가정부(Home Department) 교사 제도를 제안하였다. 이것은 병자, 노인들,젖먹이를 가진 부인들,직업 관계로 주일 학교에 제대로 출석하지 못하는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위해 가정부 교사가 매주에 한 차례씩 가정을 방문하여 성서 공부를 조직적으로 지도하는 것과 또한 이들에게 주일학교 회원의 특 권을 자각시키려한 것이었다. 이것이 받아들여질 경우,성서 연구열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과,주일 학교와 교회의 출석률이 높아질 것,구제 사업과 선교 사업이 증가될 것,개인의 심령 구원과 새로운 신자를 얻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 결과,3년간에 3,261부와 132,302명의 회원을 얻었으며 그후 3년간 4,497부와 182,528 명의 회원을 얻었으며 1902 년에 8,219부와 292,107명의 회원,1905년에 10,600부와 403,905 명의 회원,1908 년에 15,650부와 551,535 명의 회원을 얻게 되었다. 이 가정부 운동은 조직 이후 1917년까지 20년간에 백만 명 이상의 회원과 불신자를 방문하였으며 약 5만 명의 결신자와 재입교인올 얻은 것으로 보아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제6차 대회는 1890년 6월 24일에서 27일까지 팬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모였다. 여기서 대회의 사무 진행상 상설 기관 조직의 필요를 느끼게 되어 실행 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미 조직되어 있던 통일 공과 위원들과 함께 국제 주일 학교 대회를 협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7차 대회는 1893년 8월 30일에서 9월 5일까지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공과 문제가 다루어졌는데 다수의 회원들이 통일 공과의 사용을 찬성하였다.
제8차 대회는 1896년 6월 23일에서 26일까지 매사추세츠주 보스톤에서 모였는데 당시까지의 최고의 인원인 1,06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당시 세계적인 부흥 설교가였던 D. L.. 무디는 매일 아침 경건회를 인도하여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에 3만 5천 불의 막대한 사업비가 책정되어 멕시코,중앙 아메리카, 서인도의 여러 지방까지를 주일 학교 운동의 범위로 확대하기도 하였다.
제 9차 대회는 조지아주 아트란타에서 1899년 4월 26일 부터 30일까지 개최되었다.
제10차 국제 대회는 1902년 콜로라도주의 댄버에서 6월 26일부터 30일까지 모였다. 여기서 그동안 계속되어 오던 통일 공과에 대한 문제들이 제기되었고 제이콥스의 서거로 인한 새로운 실행 위원장의 선출이 있었는데 하트손(W. N. Hartshorn)이 뒤를 이었다.
제11차 대회,1905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1,958 명의 대표가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대회에서 그동안 국제 주일학교 대회라고 부르던 것을 국제 주일 학교 협회(International Sunday School Association)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후 국제 종교 교육 협회가 성립되기 까지 미국,캐나다 각지에서 이 모임은 계속되었다. 이런 과정 가운데 이미 제이콥스의 제안으로 1899 년7월 1일을 기하여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참석한 904명의 대표들이 모여 주일 학교 운동 사상 획기적인 제1회 세계 주일 학교 대회(World's School Connection)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비로소 본격적인 세계적인 연합체로서의 조직이 시작된 것이다.
2회 대회는 제7차 국제 주일 학교 대회가 개최되었던 세인트루이스에서 1893년 8월 30일에서 9월 5일까지 같은 기간과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중요하게 토의한 문제는 일본에 주일 학교 사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한 사람이 1불씩의 방법으로 사업비를 내어 수백 불까지 얻게 되었다.
제3회 대회는 1898년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런던에서 모였다. 당시 유학생이던 일본의 이께하라(池原)가 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일본의 주일 학교 사업 발전상을 보고하면서 기관 조직올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극동 방면에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주일 학교 사업의 확장에 새로운 의욕을 느끼게 되었다.
제4회 대회는 1904년 4월 17일에서 19일까지 예루살렘에서 모였다. 주일 학교 운동이 선교 사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공감하는 자리가 되었는데 26개국,52개 교파에서 천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37개국과 53개교파와 교단에서 1,118명의 대표를 파송하여 1907년 5월 18일에서 23일까지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제5회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세계 주일 학교 대회를 세계 주일 학교 협회(World's Sunday School Association)로 명칭을 고치게 되었다. 바로 이 대회에 윤치호(尹致吴) 선생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하였는데,대회에서 연설도 하고 실행부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제6회 대회를 워싱톤에서 5월 19 일에서 24일까지 모였으며 윤치호 선생이 이곳에 다시 참석했는데,선교사 마포 삼열 박사(馬布三悅, S. A. Moffett)가 참석하여 명예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때 이 승만(李承晚) 박사도 참석하였다.
제7회 대회는 1913년 7월 8일에서 15일까지 스위스의 쮜리히에서 모였는데 51개국 75교파에서 2,609 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이때 미국에 유학중이던 신흥우(申興雨) 박사가 참석하여 실행부 위원으로 피선되게 되었다. 그의 보고서는 1920년에 발행된「주일학교」라는 잡지에 실려져 있다.
제8회 대회는 1916년 일본 동경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세계 대전으로 인해 연기되어 1920년 개최되었다. 대회는 30여 개국에서 3,378 명의 대표가 출석하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교파를 초월하여 수백 명의 대표가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1919 년 3.1운동으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투옥 중이었으며 일본에 대한 반일 민족적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정식 대표는 한 명도 파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장로교의 박정찬(朴驢燥) 목사가 개인 자격으로 참석 하였다. 그는 대회장으로부터 10분간의 기회를 허락받아 흰 두루마기를 입은 몸으로 단상에 올라가 백발을 휘날리며 당시 한국 교회의 실정을 보고하고 한국 교회의 간절한 요구를 전하여 듣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감동을 받게 하였다. 그 결과로 대회에 출석한 많은 사람들의 한국 방문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로 한국의 대표가 정식으로 세계 주일 학교 협회의 대회에 9회 대회로부터 참석하게 된 것이다.
1924년 6월 18일에서 24일까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에서 열렸는데 54개국으로부터 2,810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여기에 한국의 대표로 남궁혁(南宮赫),정인과(鄭仁果) 목사가 정회원의 자격으로 한국 교회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이로부터 한국의 주일 학교 운동도 세계 대회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제10회 대회는 1928년 7월 11일에서 18일까지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는데 58개국으로부터 7,361명의 대표가 참석 한 것으로 세계 대회가 생긴 후 전에 없었던 성황을 이루었다.
"당신의 나라이 임하옵소서”라는 표어 밑에서 여러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는데 "세계 주일 학교 협회”라고 부르던 것을 종교 교육 세계 주일 학교 협의회(World Sunday School for Religious Education) 로 개칭하였다.
한국에서는 각 교파를 망라하여 김관식(金觀植),김준옥(金俊玉),변성옥(邊成玉) 등 수십 명이 참석하였는데 임원 선거에 있어 한국의 대표 중 한 사람인 김관식 목사가 부회장 13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된 것은 기억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제11회 대회는 1932년 7월 25일에서 31일까지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에서 33개국에서 1,000 여 명이 모여 “살아 계신 그리스도”라는 표어 아래 모였다. 당시 조선 주일 학교 연합회 총무이던 정인과 목사가 참석하였는데 당시에 보고된 세계 각국의 주일 학교 통계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한국은 교사와 학생수 40만 2천 3백 11명으로서 세계 제8위를 차지하였다.
제12회 대회는 1936년 7월 6일에서 12일까지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모였는데 세계 50개국으로부터 2,700여 명의 대표가 출석하여 "그리스도는 세계의 소망”이라는 표어 아래 회의를 진행하였다. 이때에는 기독교 대한 감리회 총리원 교육국 총무인 류형기 목사를 파송하여 한국 교회의 종교교육 사업을 대회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때 전세계 129개국에 36만 9천 510개의 주일 학교에서 314만 5천 8백 95명의 교사에 의하여 3 천 4백 13만 9천 6백 24명의 학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되고 있다는 놀라운 보고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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