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신약신학

최초의 공동체

예림의집 2012. 9. 9. 20:51

최초의 공동체

 

처음 모인 신자들이 유대인이었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다. 이 집단에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친척들,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심당원 출신의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등 사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십자가 사건 직후 자살한 가룟 유다 대신 제자 가운데 맛디아를 뽑아 열두번 째 제자로 대치하였다.

  집단 전체가 다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으므로, 이들은 계속 유대 율법을 지키고, 회당과 성전에서 예배드렸다. 그 모든 외형적인 면에서만 보면 이들은 다른 많은 유대교의 분파들과 별로 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운동을 "도(The Way)"라 불렀으니 이는 곧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예루살렘의 공동체는 스스로를 가리켜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성회를 의미했던 단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에 상응하는 헬라어 단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영어로는 church, 즉 교회)였으니,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유대교에의 외형적인 귀속과 유대 경전의 계속적 사용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씨름해야 할 문제가 있었으니, 이는 곧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이들을 더욱 특별한 존재, 곧 새로운 가죽 부대로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오순절이 지난지 얼마 안되어, 성전 당국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설교 때문에 베드로 및 다른 열 한 명의 제자들을 체포하였다. 이는 단지 형식상의 체포였는데, 어쨌든 다음 날은 이들을 증거 불충분으로 다시 풀어주어야 했다. 산헤드린이 이처럼 유화책을 쓴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계속 성전 예배에 참석했으며, 유대교의 법규와 제식들을 계속 지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혀 모세의 율법이나 성전의 권위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2년 안에 이들의 숫자는 수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사도들의 지도 아래 점차 자라갔던 이 운동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실재성을 의미하는 예식을 계속 그들 교제의 중심에 둠으로써, 자기들의 통일을 계속 유지하였다.

  첫번째 세례였는데 대부분의 초대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이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사도들의 공동체에서의 세례는 이와는 또 달랐다. 요한의 세례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표현이었다. 반면, 초대 교회의 세례에는 현대 신학자들이 말하는 바 "종말론적" 의미가 있었다. 이는 아직 그 전체가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미 선포된 영적 왕국 안으로의 들어감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들 초대 기독교 신자들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 이어졌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매장과 부활이 신적인 사건으로 믿게 되었다. 이 사건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신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신앙으로 그 영적인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 신앙을 세례로서 증언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두 번째 의식이었던 주의 성찬은 갈보리의 사건 속에 찾아 볼 수 있던 주의 배반 당하심과 죽음을 기념하며, 빈 무덤을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약속하였던 "새 언약"의 증거로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죽음과 성령 안에서의 새 생명은 포도주를 마시고, 성스런 빵을 나누는 제자들의 모임에 의해 상징되며 인쳐지는 것이었다. 이 소박한 성찬이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언약을 새로이 갱신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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